동북아 평화에 관한 낭만과 현실

김영준 / 2019-09-02 / 조회: 9,890

한 국가의 외교정책은 그 나라의 주권을 보장하고 국익을 실현하는 것을 목표로 이루어져야 한다. 그리고 주권의 보장과 국익의 실현, 두 가지 중 더욱 우선이 되어야 하는 목표는 당연히 주권의 보장이다. 인권 없는 개인이 사회 속에서 개인일 수 없듯이, 주권 없는 국가도 국제사회 속에서 국가일 수 없다. 국익의 실현은 그 이후의 문제다. 그렇다고 해서 국익의 실현이 중요하지 않은 것은 결코 아니다. 주권이 보장되는 상황에선 당연히 국익을 실현하는 정책이 필요하다. 적절한 외교정책이란 이 두 가지 목표에 반하지 않는 정책을 이야기한다.


대한민국은 외교적으로 주권이 보장되고 있는 나라다. OECD 가입국이고, UN의 회원이며, 올림픽과 월드컵이라는 세계적 이벤트의 개최 경험도 있는, 경제적으로는 세계 10위권의 규모를 자랑하는 그런 나라다. 하지만 대한민국은 언제든 그 주권을 위협받을 수 있는 상황에 있는 국가이기도 하다. 한국전쟁은 아직 종전되지 않았고, 중국과 러시아는 호시탐탐 한반도를 노리고 있다. 그간 대한민국은 이러한 위험요소들을 일본, 미국과의 협력을 통해 억제해왔다.


문재인 정권의 외교정책은 그동안의 이러한 기조와는 느낌이 사뭇 다르다. 그간의 동북아 질서를 흔들어보려 하고 있다. 그동안의 기조가 미국과 일본을 통해 중국과 러시아, 그리고 북한을 견제하는 것이었다고 한다면, 문재인 정권이 그리는 그림은 대미, 대일 관계를 다소 포기하더라도 중국과 러시아라는 대안을 마련해두는, 한편으로는 북한과의 단절 상황을 영구히 해소하는 그런 그림이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 문재인 정권은 두 가지 정도의 목표를 두고 있는 듯 외교를 하고 있다. 첫 번째는 북한과의 단절 상황을 최소한 단기적으로라도 해소하는 것이다. 물론 더 나아간 목표는 지금과 같은 단절 상황을 영구히 해소하는 데 있다. 두 번째는 일본과의 과거사를 청산하는 것인데, 이는 북한과의 단절 상황 해소라는 제일의 목표를 위해 부차적으로 필요한 목표에 해당한다. 동북아시아에서의 주권을 확보를 위한 중국과 러시아라는 대안을 마련하는 계기를 만들고, 그리고 대일 과거사 청산이라는 한반도-일본 관계의 초석을 다져두기 위한 것이다.


실제로 문재인 정권의 외교는 이들이 목표하고 있는 대로 잘 흘러가고 있는 듯하다. 북한과의 단절 상황 해소라는 목표에 대해서는, 전 정권에서 마련한 평창올림픽이라는 기회를 잘 활용했고, 북미 대화를 이끌어내는 데까지 성공했다. 일본과의 과거사 청산이라는 목표는, 일본이 화이트리스트라는 무역특혜를 해제한 것을 계기로, 이전 정권 때의 군사정보협정을 파기하는 강수를 두면서 맞대응하고 있다. 이대로라면 한미일 관계가 어느 정도 약화되면서 중국과 러시아라는 대안을 마련해 둬야만 할 계기가 만들어질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는 하나 돌아보아야 할 것이 있다. 문재인 정권이 현재 목표하고 있는 바, 그리고 그것의 달성을 위해 취하고 있는 방법들이 외교정책으로서 적절한가? 한 국가의 외교정책은 첫째로 주권의 보장을 목표해야 하고, 둘째로 국익의 실현을 목표해야 한다. 문재인 정권이 그리고 있는 그림대로라면 첫째 목표는 물론이고 둘째 목표까지도 노려볼 수 있겠지만, 지금 흘러가고 있는 상황이 썩 그렇지는 않게 되었다.


대륙을 바라보는 외교정책이 함의하는 것


동북아에서의 대한민국 안보, 즉 주권 보장의 핵심이었던 한미일 관계를 약화시키고 그만큼 그 대안이 될 중국과 러시아에 기대는 정책은, 바램대로 되면 물론 좋겠지만, 사실 외교적 모험에 가깝다. 우선, 중일 관계와 러일 관계가 썩 좋진 않다. 전략적 협력을 하는 수준의 관계이지, 상호 신뢰가 충분하다고 볼 수 있을 정도로 우호적인 관계가 아니다. 아직 서로를 불신하는 관계에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미중 관계와 미러 관계도 그렇게 좋은 상황이 아니다. 미국과 중국은 지금 무려 무역전쟁을 하고 있는 상황이고, 미국과 러시아 사이의 관계는 중일, 러일 관계와 마찬가지로 상호 신뢰가 충분한 수준은 아니다.


때문에 한미일 관계와 한중, 한러 관계를 모두 취할 수 있으리라는 보장이 없다. 한국 정부로서는 이러한 줄타기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상당히 어려운 일일 것이고, 설령 문재인 정권이 임기 동안 그것을 잘 해낸다고 하더라도, 이후 정권에서도 동일하게 이 일을 잘 해내주리라는 보장이 없다. 문재인 정권이 그리는 동북아 질서는 그런 점에서 불안정 균형이다. 지속 불가능한 질서에 가깝다는 것이다. 동북아 질서에 이해관계가 있는 6국 서로간의 관계를 모두 개선시킬 수 있다면 물론 문제가 없다. 그런데 지금의 한일 관계를 보면 쉬운 일은 아닐 것 같다. 한일 양국의 이해관계도 서로 조정하지 못하고 있는데, 6국 사이의 이해관계를 대한민국의 의도대로 조정한다는 것은 꿈같은 일이라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하리라.


한일 관계 위기의 발단


다음으로, 일본과의 과거사 청산을 위해 현 정부가 가고 있는 길은, 그것을 위해 감수해야 할 몫을 생각해봤을 때 국익을 실현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국익을 포기하는 길에 가깝다. 국가 경제를 일시적으로 희생시켜 일본과 외교적 대결을 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화이트리스트는 일종의 특혜조치에 가까웠다. 물론 그것이 한일 간의 신뢰가 굳건하다는 전제 하에서 제공되어온 특혜조치였지만, 일본 측에서 한국을 더 이상 화이트리스트 국가로서는 신뢰할 수 없다는 이유를 들며 해제한 특혜조치였기 때문에, 어디까지나 대결이 아니라 대화가 우선되어야 할 일이었다.


하지만 문재인 정권은 이 사건을 판을 흔들기 위한 계기로 활용했다. 한국 대법원이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전범기업에 대한 손해배상 청구권을 인정해주면서 이에 대한 보복으로 일본이 화이트리스트를 해제한 것이라는 명분을 내세웠다. 군사적으로 악용될 수 있는 물품이 북한으로 넘어가게 했다는 의혹으로 신뢰가 무너진 것이라는 일본의 주장은 표면상의 명분이고, 일본의 저의는 한국 대법원의 판결과 한국 정부의 입장에 대한 경제보복이라는 것이다. 이번 사건을 중요하게 다루면서, 일본에 대한 불매운동을 부추기기도 했다. 그리고 문재인 정권은 일본이 특혜조치 해제를 철회하지 않자 군사정보협정을 파기하기에 이른다. 일본에 대한 자잘한 대응조치를 이어나가고 있기도 하다.


주권국가로서 이러한 대응을 할 수 있느냐를 논하기 이전에, 문재인 정부의 이러한 대응은 일본과 어떻게든 경제적으로 얽혀있을 대한민국 국민 개개인의 사익을 희생시키면서 정권의 외교적 목표를 실현하겠다는 성격의 대응이다. 주권국가로서 마땅히 해야 할 대응은 해당국의 주권이 침해를 받은 경우 그에 대한 대응에 한하는 것이다. 지금 상황과 같이 양국 간의 신뢰가 (표면적으로라도) 무너진 상황에 우선적으로 필요한 것은 적극적으로 대화를 시도하는 것이다. 대화 이전에 대결을 하고 보는 대응은 주권국가로서 ‘할 수 있는’ 대응일지는 모르겠으나, ‘해야만 하는’ 대응은 결코 아니다. 이런 면에서는 과잉대응에 해당하는 것이다.


평화를 이루는 방법


한 나라가 스스로의 주권을 대외적으로 보장하기 위해서 택할 수 있는 방법에는, 즉 대외적 평화를 달성하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크게 보면 강력한 무력을 보유하는 방법, 즉 힘에 의한 질서를 추구하는 방법, 그리고 상대국의 이해가 자국과의 평화 상태에서 만족되도록 하는, 즉 이해관계에 의한 질서를 추구하는 방법이 있다. 전자의 방법은 현재 세계가 미국의 강력한 무력과 경제력에 의한 질서 하에서 움직이고 있기 때문에 사실상 불가능하다. 과도한 무력보유 시도는 UN의 경제제재를 의미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이미 북한의 사례를 통해서 잘 알고 있다.


그렇다면 대한민국이 택할 수 있는 방법은 이해관계에 의한 질서를 추구하는 방법뿐이다. 여기에는 자국에 대한 상대국의 경제적 의존도를 높이는 방법, 상대국과 동맹을 맺는 방법, 상대국의 이해관계에 완전히 독립적인 상태가 되는 방법이 있다. 이 중 세 번째 방법은 역시 대한민국이 갖는 지정학적 특성상 불가능하다. 한반도는 대륙으로 가는 관문이면서, 대양으로 가는 관문이기도 하다. 역사적으로는 냉전의 전선이었기도 하다. 주변국들의 이해관계와 무관할 수가 없는 위치에 있는 것이다.


최종적으로 남는 방법은 자국에 대한 상대국의 경제적 의존도를 높이는 방법, 그리고 상대국과 동맹을 맺는 방법이다. 동맹을 맺는 방법은 가장 확실하다. 애초에 동맹이라는 것이 전쟁과 같은 특수한 상황 하에서가 아니라면, 그간의 상호이해와 신뢰관계에 대한 확인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맹을 맺는 방법이 좋은 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여기에는 주의해야 할 것이 있는데, 우리와 동맹관계를 맺을만한 지속적인 유인이 상대국에게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현재 미국과 일본이 대한민국과의 동맹에 대해서 갖는 유인은, 대한민국이 대륙 세력과 북한의 핵위협을 견제하는 일에 있어 쓸 만한 수단이라는 것이다.


이제 마지막으로, 경제적 의존도를 높이는 방법을 생각해보자. 중국과 같은 나라는 자국에 대한 경제적 의존도를 높이기 어렵다. 인구 규모도 거대할 뿐더러 이제는 경제 규모도 미국에 버금갈 정도로 거대해졌기 때문이다. 중국이 대한민국에 경제적 의존성을 갖게 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러면 러시아는 어떨까? 러시아의 인구 규모와 경제 규모 역시 결코 적은 수준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의 의존성은 만들 수 있을 정도로 적절한 규모에 해당하기는 한다. 인구 규모는 1.4억 정도로 5천만 정도에 해당하는 대한민국에 비해서 약 3배 정도 많은 수준이다. 경제 규모 역시 러시아는 GDP 약 15억 달러로 우리나라와 거의 같다. 오래 걸리는 일일 수 있지만 비현실적인 일은 아니다.


한국이 진정 가야할 길


한미일은 이미 상호가 경제적으로 상당히 통합된 상태다. 군사적 동맹관계에 있기도 하다. 중국과의 관계에서는 경제교류와 협력을 통해 의존성을 높이는 것 보다, 북핵문제 해결을 위한 전략적 협력관계를 추구하는 편이 현실적이다. 그럴 수 없다면 중국은 포기하는 편이 낫다. 중국과 한국이 경제적으로 상호 통합되는 일은, 중국과 한국의 경제 규모 차이를 생각했을 때 한국에게만 아쉬운 상황을 만들기 쉽기 때문이다. 러시아와의 관계에서는 경제교류와 협력이 현실적인 방법일 수 있다. 한국과 러시아의 경제규모는 매우 비슷하다. 경제적으로 상호 통합될 경우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하는 상황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이러한 점에서 문재인 정권은 지금까지의 외교정책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 중국의 일대일로 계획에 참여하는 것은, 물론 양국에 손해를 안겨주는 일은 아니겠으나, 한중 관계 사이에 불균형을 만들 수 있는 일이다. 그리고 지금과 같은 한일 관계에서 탈피해보려는 시도는, 과거사 청산이라는 목표에 한해서는 도움이 될 수 있으나, 그것을 위해 감당해야 할 비용이 상당하다. 기본적으로 외교적 목표 달성을 위해 국민을 희생시키는 일인 것이다. 한미일 관계에 의한 평화를 깰 위험도 다소 있다. 주권국가로서의 지위를 더욱 확실히 인정받고자 하는 지금의 일본이라면, 최악의 경우 한일 관계가 지금과 같은 적극적 협력관계를 벗어날 수도 있다. 공조하지 않는 한일 관계를 보고도 미국이 한국에게 지금까지와 같은 수준의 신뢰를 가질 수 있을까? 지금처럼 중국과 러시아도 진지하게 바라보고 있는 한국이라면 더더욱 의심스러울 것이다.


북한과의 단절 상황을 해소한다는 목표도, 북미 대화의 기회를 조성해주는 조정자로서의 소극적 역할만 계속한다면 완전히 달성될 수는 없을 것이다. 남북 양국이 서로를 국가로서 인정하는 것이 단절 상황의 해소를 향한 진정한 첫걸음이다. 북한을 망하게 해서 남한에 흡수할 것이 아니라면, 또 남북 간의 진정한 평화를 바란다면, 북한을 국가로 인정하고 북한 또한 남한에 대해 그렇게 하도록 해야 한다. 그 후에야 정말로 종전선언을 하고 우호관계를 맺든, 경제교류와 협력을 늘리든 하는 방법을 통해서 단절을 해소할 수 있는 것이다.


조정자로서의 한국이라는 역할은 다음 단계로 이행하기 위한 중간 단계가 되어야 한다. 그러지 못한다면 지금의 상황에서 한국은 트럼프 대통령의 재선을 위한 도구로 이용당한 뒤 버려질 수 있다. 미국의 신뢰를 잃어가는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는 더욱 그렇다. 극적 상황을 연출해보겠다는 낭만적 의지에 매몰된 현 정권이 심히 걱정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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