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오늘 서정적이다
나는 오늘 서정적이다.
저리 흐드러진 철쭉 화사한 빛깔을
내 깃발로 펼치고 눈에 세상을 한껏 담으면
마음은 이리 가볍게
보얀 늦봄 하늘을 난다.
한사코 붙잡는 땅의 중력을
잘라도 잘라도 붙잡는
이 끈끈한 인연들을 벗어나는 데
서정만한 것이 있으랴.
나는 오늘 서정적이다.
죽음은 없다.
하늘 아래 어디에도 죽음은 없다
삭은 목숨이 문득 꺼지는 순간이
그 아득해지는 순간이 있을 따름.
내 몸으로 구현된 질서 한 무더기가
사십억 년 다듬어진 모습의 한구석이
허물어지고 있을 따름.
걷잡을 수 없이 무너지는 군사들을 다시 모아
검은 군사들과 맞서는 데
서정만한 것이 어디 있으랴.
나는 오늘 서정적이다.
우리 모두 알지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을.
한 번 흘러간 물
거슬러 오는 법 없고
소리 없이 진 꽃잎
인연의 가지 위로 올라앉을 리 없고
저 멀리 오똑한 연희고지
거기 묻힌 젊은 병사들
어느 아득한 세월이 흘러도
땅속에서 부스스 일어나
끊어진 젊음을 이을 리 없고.
우리는 잘 알지. 그리고 엔트로피를 근거로 내놓지.
질서는 허물어지기 마련이라고.
그러나 이 자리에선
철쭉꽃 흐드러지고
비탈 타고 꿩 울음 들리고
엄마 치맛자락 뒤로 숨는 저 수줍은 애기에겐
내가 그래도 가장 흥미로운 풍경인
이 환한 자리에선
난 의견을 좀 달리하고 싶네, 내 비록
열역학 제이법칙을 존중하지만.
흘러간 세월 다 불러오고
저 애기의 화사할 봄철들도 불러오고
가슴 활짝 열어 모두 받아들여서
이 우주의 이치를 잠시 멈추게 하는 이 자리
허물어지는 한 줌 질서가
문득 서늘한 날로 서도록 하는 데
서정만한 것이 어디 있으랴.
오늘 나는
서정적이다.
지은이: 복거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