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위석 시집 <유모레스크>중 두 번째로 소개해드릴 시 '사진'입니다.
사진
1.
사진을 찍고 싶었다
특별한 소실점 없이 전 화면이 통째로 사라져가는
굵은 비 오는 골목을 찍고 싶었다
어제와 내일 사이에서
지붕도 벽도 허물어진
도시계획 언저리 빈집도 찍고 싶었다
없어진 것, 없어지고 있는 것
없어질 것을 찍고 싶었다
2.
좋은, 낡은, 남은 것,
합천 해인사를
아주 여러 장 찍고 싶었다
두물머리 세미원서 연꽃 구경하는
가야금 동호회 내 친구 노인들도 찍고 싶었다
맑은 날엔 사람 말고 그 연꽃을
직접 찍고 싶었다
“8월이 가기 전에, 가기 전에,”라고 잉잉거리며
날아든 목숨 짧은 벌레들이
연꽃 꿀을 훔치는 사이, 그 편에
수술들이 암술에게
바삐 바삐 수분을 행위 하는 사이
8월을 찍고 싶었다
물욕과 색욕의 이 선행을
허무해서 눈 밝아진 카메라로 찍고 싶었다
3.
사랑이여
성불도 우화등선도 부럽지 않게 된 뒤
그래도 남는 것을 찍거나
그 벌레들과 함께
떠돌 때까지 떠돌다가
졸리움 같은 남은 시간 남으면
그 연꽃 근처에서
당신을 기다리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