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낭송] 복거일 - 나는 오늘 서정적이다

복거일 / 2020-05-12 / 조회: 5,459



나는 오늘 서정적이다


나는 오늘 서정적이다.  

저리 흐드러진 철쭉 화사한 빛깔을 

내 깃발로 펼치고 눈에 세상을 한껏 담으면 

마음은 이리 가볍게 

보얀 늦봄 하늘을 난다. 

한사코 붙잡는 땅의 중력을 

잘라도 잘라도 붙잡는 

이 끈끈한 인연들을 벗어나는 데 

서정만한 것이 있으랴. 

나는 오늘 서정적이다. 


죽음은 없다. 

하늘 아래 어디에도 죽음은 없다 

삭은 목숨이 문득 꺼지는 순간이 

그 아득해지는 순간이 있을 따름. 

내 몸으로 구현된 질서 한 무더기가 

사십억 년 다듬어진 모습의 한구석이 

허물어지고 있을 따름. 

걷잡을 수 없이 무너지는 군사들을 다시 모아 

검은 군사들과 맞서는 데 

서정만한 것이 어디 있으랴. 

나는 오늘 서정적이다. 


우리 모두 알지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을. 

한 번 흘러간 물 

거슬러 오는 법 없고 

소리 없이 진 꽃잎 

인연의 가지 위로 올라앉을 리 없고 

저 멀리 오똑한 연희고지 

거기 묻힌 젊은 병사들 

어느 아득한 세월이 흘러도 

땅속에서 부스스 일어나 

끊어진 젊음을 이을 리 없고. 

우리는 잘 알지. 그리고 엔트로피를 근거로 내놓지. 

질서는 허물어지기 마련이라고. 


그러나 이 자리에선 

철쭉꽃 흐드러지고 

비탈 타고 꿩 울음 들리고 

엄마 치맛자락 뒤로 숨는 저 수줍은 애기에겐

내가 그래도 가장 흥미로운 풍경인

이 환한 자리에선 

난 의견을 좀 달리하고 싶네, 내 비록 

열역학 제이법칙을 존중하지만. 


흘러간 세월 다 불러오고 

저 애기의 화사할 봄철들도 불러오고 

가슴 활짝 열어 모두 받아들여서 

이 우주의 이치를 잠시 멈추게 하는 이 자리 

허물어지는 한 줌 질서가 

문득 서늘한 날로 서도록 하는 데 

서정만한 것이 어디 있으랴. 

오늘 나는 

서정적이다.


지은이: 복거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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