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정위는 2004. 5. 7. 행정절차법 제 41조에 의거, 시장개혁 3개년 로드맵과 관련하여 공정거래법 개정안을 입법예고하였다(공정거래위원회 공고 제2004-6호). 이번 개정안의 골자는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출자총액제한제도의 유지’ ‘금융계열사의 의결권 축소’ ‘계좌추적권 연장’이다. 이하에서는 이들 개정안의 핵심쟁점을 중심으로, 동 개정안의 타당성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고자 한다.
1. 출자총액제한제도의 내용 및 변천과정
출자총액제한제도란 자산총액 5조원 이상 대규모기업집단에 속하는 계열사가 순자산의 25%를 초과하여 타 국내회사의 주식을 취득 또는 보유할 수 없도록 제한하는 규제이다. 출자총액규제는 1986년 12월 최초로 도입되었으며, 당시에는 순자산의 40%를 초과해서 출자를 하지 못하도록 규제하였다. 1994년에는 규제를 강화하여 출자한도를 순자산의 25%로 하향조정하였다. 그 후 1998년에 외국기업으로부터의 적대적 M&A를 방어하고 외국기업과의 역차별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출자규제를 폐지하였으나, 2001년에 다시 부활하였다. 2002년에는 출자규제의 ‘예외인정’ 및 ‘적용제외’ 항목을 추가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2004년 4월 현재 18개 기업집단 331개 계열사가 출자총액규제 대상이 되고 있다. 이처럼 출자총액제도는 많은 우여곡절을 겪어 왔으며, 지금도 끊임없는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다.
2. 공정위의 출자총액제한제도 유지에 대한 논거는 타당한가?
공정위는 최근 배포된 자료(출자총액제한제도에 대한 몇 가지 오해, KFTC 경쟁이슈 04-04, 2004. 5.3)를 통해, 다음의 3가지 논거로서 출자총액제한제도 유지의 불가피성을 역설하고 있다. 3가지 논거는 i)대기업집단 계열사간 출자를 통한 무분별한 지배력 확장 및 소유지배구조의 왜곡심화 억제, ii)기업집단의 힘을 남용하는 데 따른 독립 중소'중견기업과의 불공정 경쟁차단, iii) 복잡한 출자고리에 의한 기업집단 동반부실화 방지로 요약될 수 있다.
출자총액제한 제도의 규제익(規制益)을 냉정하게 평가하기 위해서는, 동제도를 통해 달성하고자 하는 정책목표가 타당한지, 동제도가 정책목표를 달성하는 데 효과적인 정책수단인지, 다른 정책수단을 통해 이 같은 정책목표를 달성할 수는 없는지 등을 고찰할 필요가 있다.
2.1 계열사간 출자를 통한 부분별한 지배력 확장 방지
출자총액제한제도를 통해 가공자본에 의한 ‘무분별한 지배력 확장’을 막겠다는 것은, 달리 표현하면 “지배주주의 실질 소유권을 초과하는 의결권 행사”를 용납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공정위는 가공자본을 통한 소유와 지배의 괴리가 총수의 전횡은 물론 기업 리스크(risk)의 진원지라는 정책판단을 하고 있는 듯하다.1)
그러나 주식회사제(制)는 사업주체가 약간의 종자돈(seed money)으로 소액자본을 끌어 모을 수 있도록 하는 장치이기 때문에, 지배주주가 전문경영인을 영입하지 않는 한 자신의 투하자본을 상회하는 경영권을 행사하게 된다. 따라서 ‘소유와 지배’는 일정부분 괴리될 수밖에 없다. 우리나라 대기업의 경우 사업의 모태(母胎) 또는 주체세력이 사업을 확장하는 과정에서 총수의 지분이 낮아졌지만 사업의 주체가 변한 것은 아니다. 사업 주체에게 경영권이 귀속되는 것은 당연하다. 따라서 경영권 행사를 뒷받침하는 지분율의 과다(寡多)가 문제의 본질일 수 없다. 2)
중요한 것은 ‘경영성과’이다.
미국의 경우 빌게이츠의 마이크로 소프트 지분은 11%이나 제이콥스의 퀼컴지분률은 3%에 지나지 않는다. 계열사간 출자가 소유구조를 왜곡시켰다는 정책인식도 문제가 있다. 일반적으로 소유구조는 신설기업이 아닌 한 누군가의 치밀한 계산과 계획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가변적 시장환경 하에서 오랜 기간에 걸친 투자자의 의사결정이 현재의 소유구조를 형성한 것이다. 따라서 무분별하게 지배력을 확정하기 위해 출자가 이루어졌다기 보다는 계열사의 경영권을 방어하는 차원에서 출자가 이루어진 것으로 보아야 한다. 기업이 경영권 방어에 진력(盡力)하는 것은 당연하다. 스웨덴, 핀란드, 독일 등 유럽에서는 경영권 안정과 국부유출을 막기 위해 ‘차등의결권주식제도’를 도입하고 있다. 미국 포드사 대주주도 보유지분의 10배가 넘는 의결권을 행사하고 있다. 시각을 달리하면 지배주주의 차등의결권이 인정되지 않는 상황에서 계열사간의 출자는 자구책일 수도 있다.
지배주주가 존재하는 한국적 현실에서 대기업의 본질적인 문제는 지배주주가 소액주주와 채권자의 이익에 반(反)하는 행동을 할 개연성이 상존한다는 점이다. 따라서 관건은 지배주주의 사익추구(tunneling) 행위를 어떻게 차단할 것인가로 압축된다. 이러한 이해상충의 문제는 기본적으로 이해관계자간의 문제이기 때문에 출자규제로 접근하기 보다는 지배주주와 관련된 제반 거래의 공시강화, 부당내부거래 차단, 내부통제 장치 및 증권집단소송제 등을 통해 해결하는 것이 효율적이다. 즉 출자를 규제한다고 지배구조가 개선되고 경영투명성이 높아지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지배구조 개선과 투명경영과 ‘직접적’ 관련이 적은, 사익추구 행위를 우회적으로 규제하는 장치에 불과한 출자총액의 ‘규제익’은 크다고 볼 수 없다.
공정위는 기업집단의 가공자본의 해소를 위해 일종의 유인책을 설계한 것으로 보인다. 지배주주의 실제 출자지분과 의결권과의 괴리도가 작은 기업집단을 출자총액제한 규제에서 지정 제외하는 근거를 마련하였다. 출자총액제한 졸업기준을 지배주주의 ‘의결권 승수’로 전환하겠다는 것이다. 의결권 승수는 “지배주주의 의결권을 실질소유권으로 나눈 값”으로, 승수 값이 낮을수록 소유와 지배의 괴리도는 완화된다. 의결권 승수개념은 정교해 보이지만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다. 예컨대 51%의 의결권과 100%의 의결권은 특정기업의 지배 면에서 차이가 없음에도 의결권 승수의 값은 달라질 수 있다. 구체적으로 의결권과 실질소유권의 조합이 각각 (45%, 15%), (80%, 20%)라고 가정하자. 의결권이 45%, 80%인 경우 실제적으로 두 기업을 지배하기에 충분한 의결권 지분이다. 그러나 의결권 승수 값은 실질소유권이 큰 후자[(80/20)=4.0]가 실질소유권이 적은 전자[(45/15)=3.0]보다 크게 된다. 뿐만 아니라 의결권이 100% 또는 100%에 가까운 비상장회사의 경우 상장회사에 비해 의결권 승수 값이 커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다른 조건이 같을 때 비상장회사의 비중이 높은 기업집단일수록 의결권 승수 값이 커지게 된다. 결국 의결권 승수로서 기업의 지배구조를 평가하기에는 일정한 제약이 따를 수밖에 없다.
2.2 독립 중소,중견기업과의 불공정 경쟁차단 및 기업집단 동반부실화 방지
독립 중소,중견기업과의 불공정 경쟁차단은 공정한 시장경쟁질서 확립을 위해 필요한 정책과제임에는 틀림없으나 경쟁정책과 출자규제와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 현행 공정거래법상의 시장지배자의 우월적 지위남용과 부당내부거래 방지 및 하도급계약 규제 등으로 충분히 접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역설적으로 출자규제는 사전적 의도와 달리 기업간 경쟁을 제한시킬 수 있다. 특정기업의 시장지배력이 크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단지 대기업집단의 계열사라는 이유만으로 ‘차별적 취급’을 받게 되기 때문이다. 예컨대 TV 홈쇼핑산업의 주요 기업은 3개이나, 그중 A홈쇼핑만이 출자총액제한을 받고 있다. 하지만 A홈쇼핑이 여타 기업보다 시장지배력이 큰 것은 아니다. 이처럼 출자규제는 기업간 경쟁을 제한시켜 소비자 후생증진에 역행할 수도 있다.
기업집단 동반부실화 방지는, 기업집단 내의 부실기업을 계열사간 출자를 통해 지원하려 할 때 출자규제가 이러한 연결고리를 차단하는 유용한 수단이 될 수 있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계열사 동반 부실화를 방지하는 데 있어 출자총액규제보다 더 유효한 정책은 채무지급보증 해소와 신규보증금지이다. 기업구조개혁 차원에서 1998. 2월 공정거래법 개정을 통해 계열사간 채무보증 금지규정을 신설하고, 2000. 3월까지 기존 채무보증을 모두 해소토록 이미 조치한 바 있다. 따라서 현 단계에서 출자총액규제가 동반부실화를 방지하는 데 추가적으로 기여할 수 있는 여지는 적다고 판단된다. 3)
뿐만 아니라 소수주권이 상당정도 ‘실질화’됨에 따라 경쟁력을 잃은 계열사를 단순히 지원하기 위한 출자는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 그같은 계열사는 시장압력에 의해 구조조정 대상이 될 것이다.
3. 출자총액제한 규제로 실제 투자가 위축되었나?
출자총액규제 유지와 관련해 가장 뜨거운 핵심 쟁점은 과연 출자규제가 실제 투자를 위축시켰는가 하는 점이다. 공정위는 별도 책자(KFTC 경쟁이슈 04-04)를 통해, 출자총액규제가 투자를 저해한다는 재계의 주장을 반박하고 있다. 반박의 요지는, 투자와 출자는 다른 개념이며, 출자규제가 기업의 투자를 제한하지 않는다는 것이 실증분석 결과에 의해 뒷받침되고 있다는 것이다.
공정위 주장대로, 자본스톡의 증가(설비의 신,증설 등)를 의미하는 ‘투자’와 주식을 취득하는 재무적 행위로서의 ‘출자’는 다른 개념이다. 그러나 출자와 투자는 종국적으로 별개일 수가 없다. 출자를 통해 특정기업을 지배만 해서 무슨 유익이 있겠는가 하는 의문이 제기되기 때문이다. 기업가치를 높이기 위해서는 설비투자 및 연구개발 투자를 하지 않을 수 없다. 부실회사를 인수(출자행위)하는 경우에도 부실기업의 정상화를 위해서는 대규모 투자가 수반될 수밖에 없다. 또 다른 경우로서, 1개 계열사가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거대한 규모의 자본이 필요할 때 계열회사들이 함께 출자하고, 금융기관의 대출 등을 통해 투자를 할 수도 있다. 따라서 출자는 투자에 선행하고 일정한 시차를 두고 생산적 투자로 연결될 것이다.
공정위는 KDI의 실증분석(2003) 결과를 인용하면서, 출자와 투자 간에 의미 있는 ‘양의 상관관계’가 없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KDI의 연구결과에 따르면 투자와 출자는 별개인 셈이다. 그러나 투자는 미래에 대한 전망에 기초한 일종의 위험부담 행위이기 때문에, 출자가 투자로 이어지는 정도는 투자사안과 경제상황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다. 즉 기계적으로 출자와 투자의 연결고리는 상정될 수 없다. 그리고 동연구의 ‘실증분석기간’이 기업의 입장에서 출자총액규제라는 제약조건이 적용된 기간(1997~2002년)과 일치하는 만큼, 출자규제가 기업의 출자 및 투자행위에 미친 영향을 추적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4)
뿐만 아니라 출자총액규제가 폐지된 기간동안(1998-1999년)의 특수 사정도 고려되어야 한다. 당시 출자가 신규투자(유형고정자산)로 연결되지 않았던 이유는, IMF외환위기 동안 ‘부채비율 200%’라는 외부적 제약이 주어졌기 때문이다. 기업은 부채비율 감소를 위해 부채를 줄이기보다는 재무적 출자를 통해 자본을 늘려 부채비율을 짜맞추기에 급급했었다.
최근의 투자부진의 요인은 복합적이기 때문에, 그 이유를 출자총액규제로 돌릴 수만은 없다. 그러나 상식적인 관점에서 출자규제가 투자를 촉진하는 유리한 환경조성과 배치되는 것도 사실이다. 원론적으로 대기업집단에 속한 기업들이 계열사를 포함한 다른 기업에 출자하는 이유는, 계열사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하려는 목적도 있지만 한편으론 구조조정, 신규사업 진출, 전략적 제휴 등을 통해 기업가치를 높이는 생산적 투자의 목적도 있다. 하지만 출자총액규제는 사전적이고 획일적인 규제로 출자의 성격을 구별하지 않아 생산적 출자(투자)마저도 규제할 위험요소를 내포하고 있다.
출자규제의 또 다른 역기능은 기업조직을 왜곡시킬 개연성이 높다는 점이다. 출자규제를 피할 수 있는 가장 명료한 투자행위는 기업이 기존의 사업영역을 확대하거나 혹은 사업부 등을 신설하는 데 필요한 자본을 당해 회사가 충당할 경우이다. 그러나 이종업종에 진출하고자 하는 경우에는 조직을 외부화 즉 독립기업화하는 것이 효율적일 수 있다. 독립기업화하는 것이 효율적인 경우에도 출자총액규제로 사업부 방식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면 출자총액규제는 기업조직의 왜곡을 초래할 수 있다. 물론 동종 관련업종에 대한 출자를 ‘적용제외’ 대상으로 인정해주면 기업조직의 왜곡문제는 최소화할 수 있다. 그러나 동종관련 업종 판단기준을 한국표준산업분류에 두는 경우, “이종산업간 기술융합”에 따른 새로운 산업재편을 포괄하지 못할 수 있다. 5)
4. 로드맵상의 출자총액제한은 한시적 규제인가?
공정위는 별도자료(KTFC 경쟁이슈 2004-04)에서, 대기업집단 지배주주의 불합리한 경영관행을 견제할 수 있는 기업 내,외부의 통제시스템이 아직 정착되지 않아, 우리의 현실이 시장이 신뢰하는 투명하고 공정한 시스템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라고 진단하고 있다. 따라서 ‘시장자율감시체계’가 효과적으로 작동할 때까지는 출자총액제한제도를 유지해 나갈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출자총액제한을 풀기에는 ‘시기상조’라는 것이다. 하지만 ‘시기상조론’은 규제의 상설화를 함축하는 것이다. 한가지 소득이 있다면, 부적절한 그리고 무분별한 출자는 정부가 아닌 ‘시장’의 자율기능에 의해 걸러질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한 것이다. 분명한 것은, 민간기업의 출자와 투자 그리고 기업조직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출자총액제한규제를 오래 지속시키면 시킬수록, 시장의 자율감시기능은 조기에 작동되기 어렵다는 점이다. 민간의 ‘사(私)영역’이 구획되어 존중될 때 비로소 경쟁이 촉진되고 시장이 진화할 수 있다는 하이에크의 예지를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
5. 금융계열사 의결권한도 축소는 타당한가?
공정거래법은 상호출자제한기업집단에 속한 금융계열사의 의결권 행사의 범위를 “임원의 선임과 해임, 정관변경, 피합병, 영업양도” 등에 한해 특수관계인과 합해 30%로 제한하고 있다. 이 제한을 15%로 축소하겠다는 것이 이번 개정법률안의 주요 내용 중의 하나이다. 재계는 금융계열사의 의결권행사한도가 축소되면 우량기업마저 외국계펀드의 인수,합병의 공격대상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에 대해 공정위는 고객 돈을 기반으로 한 의결권 행사는 처음부터 잘못되었다는 반박이다. 이는 산업자본과 금융자본은 마땅히 분리되어야 한다는 인식에 기초하고 있다.6)
우리나라 굴지의 전자기업 A사의 지분 분포를 보면, 지배주주 및 비금융계열사의 지분이 7.2%, 계열금융사의 지분이 8.3%인 데 비해 10대 외국인투자가의 지분이 22%에 이르러 만일 외국인들이 적대적 M&A를 시도할 경우 마땅한 방어수단을 찾기 어렵다는 것이 A기업 담장자의 설명이다.7) 물론 A사의 최근의 경영실적을 감안할 때, 우량기업에 대한 적대적 M&A시도는 어불성설이라는 반대견해도 존재한다. 그러나 우량기업도 때에 따라서는 소유구조 상의 취약점을 가질 수 있다. 예컨대 소버린의 공격을 받은 SK(주)는 우리나라 대표적 우량기업 중의 하나이다. SK(주)가 의표(意表)를 찔린 것은, 출자총액규제를 우회하기 위한 ‘주식맞교환’ 8)이 무위로 돌아가면서 지배주주와 SK(주)간의 취약한 자본적 연결고리(지분)가 그대로 노출되었기 때문이다.9) 소버린의 공격을 받은 후, SK(주)는 경영권 방어차원에서 지배구조 개선을 위한 가시적인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하지만 SK(주)는 늘 경영권 방어의 부담을 안아야 한다. 소버린은 이미 상당한 잠재적인 투자평가 차익을 거두고 있다. 외국계 펀드는 시장규율(경영권 시장)의 작동을 돕는 순기능을 발휘 할 수 있다. 그러나 외국계 펀드의 궁극적인 목적은 ‘투자차익’을 거두는 것이다. 국내기업에 대한 역차별적인 규제로 외국계 투자펀드에게 ‘대박의 기회’를 제공할 이유는 없다. 재벌의 구조개혁은 어디까지나 ‘우리의 몫’이어야 한다.
여기서 왜 많은 기업집단, 즉 산업자본이 금융계열사를 갖게 되었는지를 고찰할 필요가 있다. 현상 이면에는 다 그럴만한 이유가 존재한다. 만약 금융시장에서 필요한 자금을 제 때 그리고 필요한 만큼 구할 수 있었어도 금융계열사를 가졌겠는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기업집단이 금융계열사를 갖게 된 것은 기업 환경이 ‘내부금융시장’을 가질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산업자본과 금융자본의 분리라는 명분에 함몰되어, 충분한 경과조치 및 유예 기간 없이 금융계열사의 의결권 행사를 대폭 축소하는 것은 ‘교각살우(矯角殺牛)’의 우를 범하는 것이다. 그리고 현재 금융관련법은 금융기관의 자기계열에 대한 주식취득한도를 제한함으로써, 산업자본과 금융자본간의 기초적인 방화벽이 설치되어 있음을 고려해야 한다.
공정위에 계좌추적권(금융거래정보요구권)이 처음 부여된 때는 IMF외환위기 와중이었던 1999년 이었다. 계좌추적권을 부여한 이유는, 계열사간 내부거래를 통해 부실한 계열사를 지원하여 존속시킬 경우 구조조정이 어렵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금융실명제법과 영장주의에 어긋나고 남용이 우려되어 2년간만 한시적으로 허용하였다. 그 후 1차로 3년간 계좌추적권이 연장된 바 있으며, 2003년 재연장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였다. 공정위는 이번 공정거래법 개정을 통해 계좌추적권 5년 연장을 재차 시도하는 셈이다.
계좌추적권 연장에 대한 공정위의 입장은, “부당내부거래는 대부분 금융기관을 통해 이루어지며 우회 교차지원 등의 경우 금융거래정보가 없으면 조사가 곤란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화폐경제에서 모든 거래는 금융기관을 통해 이루어지기 때문에, 부당내부거래가 금융기관을 통해 일어난다는 것은 쟁점이 될 수 없다. 따라서 쟁점은 계좌추적권을 발동해야만 부당내부거래를 추적,파악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과거 내부통제 장치가 미흡했던 시기에는 누락, 변조 등이 가능해 계좌추적이 필요했으나, IMF위기 이후 지배구조 개선, 회계관리제도 개선 등으로 거래내역의 기재 및 기업이 공시하는 회계정보의 정확성이 높아진 만큼 계좌추적권의 실효성은 그만큼 줄어들었다. 구체적으로 2003년 공정위는 6대그룹 부당내부거래조사에서 계좌추적권을 발동했으나, 기업체 조사에서 밝혀진 사항 이외의 추가적인 내용이 없었다.
계좌추적권과 관련된 주요 고려 사항은 부당내부거래의 판정기준이다. 국세청이 판정하는 ‘지원성 거래’의 기준은 정상가격을 중심으로 상하 30%로 명확한 반면, 부당내부거래의 경우 ‘상당한 혐의’로 되어 있어 기준이 분명하지 않다. 이는 부당내부거래의 판단이 공정위의 재량에 맡겨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기업집단내의 계열사간 거래는 일종의 ‘준내부적 거래’이기 때문에 내부거래의 효율증진 효과를 감안한 ‘합리의 원칙’과 실제로 경쟁을 제한했는지에 의거 부당 여부를 신중히 판단해야 한다. 이미 ‘경쟁제한적’이지 않은 계열사간 거래를 통한 세금 포탈행위와 대주주를 포함한 계열사간의 고가양수와 저가양도에 의한 자산이전은 각각 ‘부당행위 계산부인’과 ‘증여의제’에 의해 오래전부터 금지되고 있다.
계좌추적권 연장논의가 충분한 설득력을 갖지 못하는 이유는, 이미 공정위가 ‘충분한’ 조사권한을 확보하고 있기 때문이다. 공정위는 내부거래 등의 조사를 위해 현장조사권, 자료영치권을 보유하며 기업이 조사를 거부하는 경우 과태료를 부과할 수 있다. 또한 필요하다고 인정할 때에는 금융감독위원회와 국세청 등 관계기관과 연계검사를 요청할 수 있으며 경쟁질서를 현저히 저해하였다고 인정될 경우에는 검찰총장에게 고발할 수 있다. 규제기관의 권한강화만이 규제기관의 권위를 높이는 것은 아니다.
공정위는 경쟁촉진과 경쟁질서 확립차원에서 부당내부거래 보다는 ‘부당공동행위(카르텔 또는 담합)’ 적발에 더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이는 국제적인 추세이기도 하다. 미국의 독점금지국(Antitrust Division)도 경쟁을 제한하는 부당공동행위에 대해서만 강제조사권을 갖고 있다.
7. 결어
공정위의 시장개혁 3개년 로그맵이 지향하는 바는 투명하고 공정한 경쟁질서의 구축이다. 따라서 정책목표에 관한 한 이의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시장개혁 과제에 있어서는 ‘시장과 정부의 역할’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다양한 견해가 있을 수 있다.
출자총액제한규제 유지로 압축되는 대기업정책의 기조는 ‘기업집단의 무분별한 지배력 확장’을 막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글로벌 경쟁시대에 팽창욕구를 제어하지 못하고, 무분별하게 확장하려는 기업이 지금도 존재하는가? IMF외환위기 이후 혹독한 구조조정과정을 거치면서 기업의 학습효과가 전무하지 않았다면 ‘무분별한 확장’은 없을 것이다. 또한 시장의 규율도 이 같은 기업을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과거의 시각에 집착해 기업을 규제하는 것을 개혁으로 보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을 갖게 된다.
출자총액제한은 ‘기업의 소유구조와 기업조직’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규제이다. 설령 기업집단에 문제가 많다 해도, 사(私)영역에 대한 정부의 개입은 시장경제의 근간을 부정하는 것이다. 글로벌 시각에서 볼 때, 우리의 문제는 경제력 집중도 아니고 소유와 지배의 괴리도 아니다. 우리나라 전체기업의 시가총액은 미국 ‘GE’ 1개사에 지나지 않는다. 어찌 보면 더 많은 글로벌 기업을 육성하는 것이 경제력 집중을 완화시키는 지름길이 될 수 있다. GE의 미국내 시가총액 비중은 3%미만이다. 또한 기업규모가 커지면서 소유와 지배간의 괴리는 당연할 수도 있다. 그리고 재벌총수가 기업규모가 커짐에도 불구하고 족벌경영에 집착해 전문 경영인 영입에 무관심하면, 이는 스스로 그 성장한계를 긋는 것이다. 재배주주가 지배권의 보호막 속에서 '사익추구행위'(tunneling)에 몰두하면 스스로 시장의 신뢰를 잃는 것이다. 시장은 불완전하지만, 효율적이지 못한 기업, 시장의 신뢰를 잃은 기업을 충분히 솎아낼 수 있다. 기업의 운명이 정치권력이 아닌 '소비자의 손'에 의해 좌우될 때 비로소 시장규율이 작동될 수 있음을 받아들이는 것이 '시장친화적' 개혁의 첫 단추인 것이다. 영국, 아일랜드 등 경제위기를 극복한 국가의 경제개혁은 '시장중심의 개혁'이었음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이는 정부가 시장을 이길 수 없음을 웅변하는 사례인 것이다.
공정위의 시장개혁 프로그램은 대단히 정교한 느낌을 준다. 설계주의의 정교함으로 경제의 진로를 원하는 바대로 교정할 수 있다면, 효율적인 정책수행이 될 수 있다. 하지만 그렇지 못하면, 경쟁압력에 의한 점진적인 '시장의 진화'마저 봉쇄시키게 된다. 하이에크가 설파했듯이, 무릇 정책은 '편의'가 아닌 '원칙'을 추구하는 것이어야 한다. 공정위의 존재근거에 충실한 경쟁촉진 정책을 펴는 것이 원칙에 충실한 정책방향이라고 생각된다. 공정위의 시각이 좀더 유연하고 친시장적일 것을 바란다.
1)그렇다면 과거에 피라미드 소유,지배구조 측면에서 비슷한 특성을 가진 기업집단이 ‘생존과 도산’의 엇갈린 길을 가게 된 이유와, 총수가 경영 전권(全權)을 행사해 온 일부 대기업에 대한 외국인 지분률이 높은 이유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2)최근 기업집단의 소유지배구조의 대안으로 지주회사제도가 부상하고 있으며, 공정위도 지주회사로의 전환을 유도하고 있다. 그러나 지배주주가 “적은 자본으로 많은 자산을 지배하기”는 마찬가지이다. 예컨대 갑(甲)이 10을 출자해서 지주회사를 설립했다고 가정하자. 갑이 소액주주로부터 10을 출자 받는 경우, 경영권행사(지분률과 의결권 각각 50%)가 가능하다. 이때 ‘자기자본금’은 20이 된다. 갑이 자기자본의 100% 만큼(지주회사의 법정부채비율 100%) 타인자본을 쓴다면 총가용자금은 40이 된다. 갑은 40을 출자해서, 자본금 130의 자회사를 30%(지주회사의 자회사 법정지분률)의 지분률로 지배할 수 있다. 결국 갑은 ‘10’을 출자해서 ‘130’을 지배하게 된다. 만약 손자회사를 설립한다면 갑은 더 많은 자산을 지배할 수 있다. 따라서 계열사 조직(기업집단)이건 자회사 조직(지주회사)이건 지배주주가 약간의 종자돈으로 많은 자산을 지배한다는 점에서 본질적인 차이는 없다.
3)물론 부채비율이 높은 부실 계열사가 다른 계열사로부터 출자를 받아 부채비율을 인위적으로 낮출 여지는 있다. 그렇다면 이같은 부실계열사가 은행권으로부터 차입에 성공할 수 있을까? 부채비율을 개별회사 단위로 계산했던 IMF외환위기 전에는 계열사간 출자를 통해 재무지표를 실제보다 건전하게 보일 수 있었다. 그러나 IMF 외환위기 이후에는 결합 재무제표 의무화로 가공자본 형성을 통한 부채비율의 인위적 축소가 불가능해 졌다. 그리고 가공자본 형성을 통한 부채비율의 인위적 축소가 은행 차입시 더 이상 유리하게 작용하지도 않는다. 이는 그만큼 은행의 대출심사기능이 ‘실질화’ 되었음을 의미한다.
4)이는 출자규제로 인한 투자저해의 입증책임을 재계가 지라는 것과도 무관하지 않다. 출자규제가 엄존하는 한, 출자총액을 초과할 수 있는 출자 및 투자계획을 세우는 것 자체가 어려운 것임을 부정할 수 없다. 그리고 설령 신규투자를 출자규제로 접은 경우라 하더라도, 신규투자계획은 일종의 주요 기밀사항이므로 투자계획의 취소를 공개하는 것은 쉽지 않다.
5)구체적으로 최근 융합추세에 있는 통신산업과 위성방송산업의 경우, 현행 산업분류상 이업종으로 분류되고 있어 출자규제 ‘적용제외’ 대상이 되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적용제외의 경우를 일일이 열거하는 것도, ‘규제의 단순성’ 원칙에 비춰볼 때 바람직하지 못하다.
6) 확정된 것은 아니지만 재경부는 대기업이 컨소시엄을 구성해 사모펀드를 만들 경우, 은행경영 참여의 길을 열어주겠다는 방침이다. 이같은 사모펀드 안은 부동자금을 끌어 ‘우리금융’ 등 정부 소유 금융기관을 국내자본에 매각키 위한 고육지책이지만, 산업자본의 금융참여를 막겠다는 공정위의 입장과는 상충되고 있다. 확정된 것은 아니지만 재경부는 대기업이 컨소시엄을 구성해 사모펀드를 만들 경우, 은행경영 참여의 길을 열어주겠다는 방침이다. 이같은 사모펀드 안은 부동자금을 끌어 ‘우리금융’ 등 정부 소유 금융기관을 국내자본에 매각키 위한 고육지책이지만, 산업자본의 금융참여를 막겠다는 공정위의 입장과는 상충되고 있다.
7)금융계열사의 의결권이 축소되는 경우, 의결권 행사가 가능한 A기업의 총 내부 지분은 15.5%에서 15%로 줄게 된다.
8)SK그룹의 C 회장이 SK(주)의 지배권을 확보하기 위해, 자신이 갖고 있는 워커힐 호텔 주식을 SK C&C가 갖고 있는 SK(주) 주식과 일정비율로 맞교환 한 것을 의미한다. C회장은 자신이 갖고 있는 워커힐 주식을 고평가한 혐의로 검찰에 의해 기소된 바 있다. 현재 재판이 대법원에 계류 중에 있으며, 이 사건으로 비상장주식의 평가문제라는 뜨거운 논쟁이 일어났다.
9)공정위는 소버린이 적은 자본으로 SK(주)를 공격할 수 있었던 것은, SK(주)와 SK 글로벌(네트웍스)간의 출자 고리로 SK글로벌의 부실이 SK(주) 주가를 떨어뜨렸기 때문으로 분석하고 있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출자총액규제로 최회장의 SK(주) 지배력이 약화되었기 때문이다.
조동근 (명지대 경제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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