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이 시장과 투자자의 신뢰를 받기 위해서는 회계정보의 정확한 작성과 적시 제공이 필수적이다. 그동안 회계선진국으로 자부해 온 미국이 엔론'월드컴 등 일련의 회계부정 사건으로 초래된 시장의 신뢰위기를 극복하기 위하여 기업개혁법(Sarbanes-Oxley Act)을 통과한 것도 이러한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다. 우리나라 역시 미국의 회계부정과 같은 문제를 방지하기 위해 회계'공시제도의 운영이 강화될 필요는 충분하다.
기업의 투명성을 제고해 투자자를 보호하고 증시의 효율성을 높이는 것은 투자자는 물론, 시장가치를 높인다는 점에서 기업에도 바람직한 일이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약도 정도가 지나치면 부작용이 있듯이 기업의 회계 현실을 도외시하고 개혁의 명분에만 치우쳐 조급하게 추진하거나, 불필요한 중복규제를 과하는 것은 아닌지 재검토해볼 필요가 있다. 특히, 이번 법률안은 대주주와 경영진의 책임을 강화하는데 초점을 맞춘 것으로 보여 회계제도와 경영투명성 제고보다는 대기업 규제 측면의 성격을 짙게 띠고 있다. 또한 전반적으로 우리와 기업여건이 다른 미국제도를 지나치게 답습하고 있으며, 이미 타 법률에서 규제하고 있는 사항에 대한 중복규제 등의 문제점이 발견된다.
2. 경영투명성과 회계관련제도 도입 급증
외환위기 이후 기업지배구조 개혁과 회계ㆍ공시관련 제도가 봇물처럼 도입되었다. 집중투표제도를 도입하고, 사외이사제도를 의무화함으로서 소수주주 보호 및 경영의 독립성을 확보하였고, 자산총액이 2조원 이상인 상장법인, 협회등록법인 및 증권회사 등에 대한 감사위원회 설치를 의무화하였다.
또한, 대주주가 감사선임시 의결권 있는 주식의 3%이상을 행사할 수 없도록 하여 감사기능에 대한 대주주의 영향력을 축소하는 등 감사의 독립성을 강화하였다. 회계제도 측면에서는 기업회계기준을 국제적 정합성을 갖는 기준으로 전면 개정하였으며, 세계에 유례가 없는 결합재무제표 작성을 30대 그룹에 대해 의무화하였다. 분식회계를 뿌리뽑기 위해 감리 결과 적발된 분식회계에 대해서는 그 내용을 금융기관 및 유관기관 등에 통보하고, 일반인에게도 공개토록 하였으며, 2001년 기업구조조정촉진법 제정을 통해 자산규모 70억원 이상인 기업과 여신규모 500억원 이상인 기업에 대하여 내부회계관리제도 구축을 의무화하는 한편, 회계부정을 고발하는 내부고발자를 보호하는 제도를 도입하였다. 또한, 분기 보고서와 전자공시 시스템, 공정 공시제도를 도입하여 투자자 보호와 증권시장의 투명성제고를 도모하였다. 문제는 이러한 제도들의 부작용이나 현실적합성 여부가 거의 점검되지 않은 채 또 새로운 제도도입이 추진된다는 것이다.
3. 법률안에 대한 평가
첫째, 공시서류의 적정성에 대한 경영진의 책임을 강화하기 위해 사업보고서 등에 CEO/CFO의 인증을 의무화하는 것(개정안 8조)은 우선 중복규제의 성격이 크다. 현재에도 공개기업의 경우 사업보고서'유가증권신고서 등에 대표이사가 날인하게 되어 있으며, 허위표시임을 알고 날인할 경우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3,000만원 이하의 벌금을 물게 되어있다. 또한, 회계감사준칙상 경영자의 책임을 인정하는 「경영자확인서」를 대표이사 및 회계담당 임원이 작성'서명하여 외부 감사인에게 제출하게 되어 있다. 우리의 현실과는 다른 맥락에서 형성된 제도를 여과없이 받아들인다는 점이 아쉽다. 미국은 재무제표 승인권이 이사회에 있어, 철저한 책임소재 확정을 위해 CEO의 인증이 필요한 측면이 있는 반면, 우리나라는 사업보고서의 경우, 내부회계관리 책임자, 감사위원회(사외이사가 위원장), 이사회(사외이사 1/2 이상), 주주총회를 통해 감시되고 승인되는 까다로운 확인 절차를 거쳐 총회에서 승인을 받는다. 이런 점에서 CEO의 인증은 규제 위의 규제의 성격이 크다.
한편, 경영판단의 원칙(Business Judgement Rule)이 명확히 정립되어 있지 않고, 내부통제절차를 충분히 밟으면 형량이나 벌금을 경감해주는 판결지침도 형성되어 있지 않은 우리 실정에서 CEO에 대해 지나치게 포괄적으로 책임을 부과하는 것은 과도한 부담으로 경영활동만 위축될 것이 우려된다. 다행히 동 개정안에서 ‘허위기재 사실을 알고’ 서명한 경우로 처벌대상을 규정하고 있어 형사제재가 남용되지는 않을 것으로 보이나, 결합재무제표를 작성하는 그룹기업의 경우 CEO가 모든 관계사의 회계처리 적정성을 인증한다는 것은 심대한 부담이 아닐 수 없다. 더구나, 현행 기업회계 관련규정은 분식회계 여부에 대한 명확한 기준이 사실상 결여되어 있고, 감리자의 주관적 판단에 의존하고 있는 실정이므로 언제든지 해석에 따라서는 위반으로 간주될 가능성이 농후하여, 처벌의 적정성에 대해서도 논란의 소지가 크다. 이렇게 무한책임에 노출된 상황에서 앞으로 누가 선뜻 CEO나 CFO에 나설지 걱정스럽기도 하다.
둘째, 사실상의 업무지시자와 전문가 등에 대해서도 민사책임을 부과할 수 있도록 하는 것(개정안 제 14조)도 이미 상법에서 자신의 영향력을 이용하여 이사에게 업무집행을 지시한 자(업무집행지시자)에 대하여 이사와 연대하여 손해배상책임을 지도록 하고 있는 「사실상 이사제도」를 도입하여 운영하고 있는 실정이므로 중복 규제의 성격이 크다. 우리나라 대주주는 미국과 달리 광범위한 의결권 제한과 사외이사 자격배제 등 경영참여가 제한되어 있는 상황에서 책임부과만 늘어나 권리와 의무의 형평성에도 문제가 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전문가의 손해배상책임을 규정한 것은 불성실한 전문가의 의견이 남발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것으로 일응 타당성이 있으나, 지나친 부담은 오히려 전문가의 의견진술을 억제하여 투자자의 정보이용을 제한할 소지가 크다. 전문가에 대한 통제는 시장평판이 더욱 효과적이고 본질적이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셋째, 주요주주'임원의 지위남용 방지를 위하여 이들에 대한 금전대여를 원칙적으로 금지하는 것(개정안 제 191조의 19등) 역시 현행 은행법'상호저축은행법 등 금융감독 관련법에서 주요주주 등 특수관계인에 대한 대여금 등을 제한하고 있고, 증권거래법 및 외감법상 회사가 이들에게 자금 대여시 공시의무를 부과하고 있어 규제가 중첩된다고 할 수 있다. 또한, 공정거래법 11조 2항에도 특수관계인과의 가지급금, 대여금, 주식, 회사채 등의 거래시 이사회 의결 및 내용 공시가 의무화되어 있으며, 2001년 3월 증권거래법 개정을 통해 최대주주와 특수관계인에 대한 거래시 이사회의 승인 및 주총 의결을 거치도록 하고 있어 이미 상당한 정도의 투명성이 확보된 상태라 할 수 있다. 다만 특수관계인의 과다한 회사자금 차입의 경우 이해상충과 비정상적 회계처리를 초래할 수 있다는 점에서 금전대여를 원칙적으로 금지하는 것은 어느 정도 타당성이 있으나, 규제대상인 특수관계인의 범위가 지나치게 넓어 사기업의 거래자유 원칙을 침해할 수 있고, 현실적으로도 사업용 토지 매입 등 경영과 직결된 대여도 불가피해 이를 금지하는 것은 문제가 많다. 미국의 기업개혁법에서는 회사임원에게만 대여금을 제한하고 있는 점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4. 바람직한 법률개선 방향
이번 법안은 엔론 사태 이후 급조된 미국의 기업개혁내용을 대체로 수용한 것이다. 이중에는 국내에서 이미 시행중이기 때문에 굳이 '개혁'이라고 하기 어려운 것들도 있고 우리의 관행 및 현실과 거리가 멀어 현실성이 떨어지는 부분도 적지 않다. 예컨대, 재무제표에 대한 최고경영자(CEO)의 서명을 의무화한 것은 현재의 서명날인과는 별도로 책임각서를 한 장 더 쓰라고 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동개혁안의 실효성을 검토하기 위해서는 준거의 틀이 되고 있는 미국의 현실과 우리의 실정을 비교해볼 필요가 있다. 미국은 GAAP기준을 통해 시장에서 규율하는 시스템을 운용하여 왔으며, 회계관련법체계에 있어서도 특유의 불문법체계를 유지해 오다, 회계부정사건 이후 종합적인 법적통제가 필요하다는 인식하에 기업개혁법을 제정하게 된 것이다. 이에 반해 우리나라는 이미 오래 전부터 성문법체계로서 상법, 증권거래법, 외부감사법, 공인회계사법 등을 통해 규제위주의 법체계를 유지해 왔다. 또한, 미국경영은 최고경영자(CEO)에게 기업경영의 전권과 최고 수억달러의 막대한 스톡옵션을 동시에 부여하는 특징을 갖고 있다. 이에 따라, 기업 경영자들은 단기이익에 매달리지 않을 수 없어 부풀리기식 회계 부정의 유혹이 큰 상황이다. 이에 비해 우리나라 CEO는 보상유인도 적고, 갖가지 경제ㆍ사회적인 규제 환경하에서 경영활동을 하고 있는 상황이다. 따라서, 미국식 경영이 가져다 준 폐해를 막고자 성립된 기업개혁법의 대부분의 조항을 아무런 여과없이 국내법에 그대로 반영하는 것은 설득력이 부족하다.
회계는 제도의 안정성이 다른 어떤 분야보다 중요하다. 취지가 좋다고 외국의 제도를 나열하는 것이 회계정보의 신뢰성을 높이는 것도 아니고, 현실과 괴리된 규제를 중복적으로 부과한다고 해서 회계투명성이 일거에 달성되는 것도 아닐 것이다. 분식회계나 회계의 불투명성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제도를 추가 도입하기보다는 기도입된 많은 제도부터 철저히 집행하고 문제점을 보완하는 노력이 시급하다. 모든 제도도입에는 비용이 발생하는데, 중복적인 제도도입의 경우는 더욱 많은 비용부담이 초래되기 때문이다. 사실 IMF이후 도입된 수많은 회계ㆍ공시관련제도 자체가 기업의 투명성을 제고하는데 효력이 없었다기 보다는 집행기능의 취약에 문제가 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회계감사의 기능을 제고하고, 기업내 체계적인 통제기준을 확립하기 위한 인센티브를 부여하는 것이 보다 효과적인 접근방식이라고 생각된다.
양세영 (전국경제인연합회 기업정책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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