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내용은 아래 기사 및 칼럼 내용을 요약 번역한 내용임*
David Gordon,
In Defense of Non-Aggression
24 April, 2013
유명한 자유주의 정치철학자 맷 즈월린스키는 자유주의가 '비침해성의 원칙'을 포기해야 한다는 놀라운 제안을 했다. 비침해성의 원칙은 "다른 사람에 대한 물리적 폭력의 사용과 위협이 정당방위가 아닌 한 언제나 잘못되었다."는 규범이다. 즈월린스키는 특히 머레이 라스바드가 정립한 비침해성의 원칙에 대해 반대한다. 그러나 라스바드를 지지하는 사람이 즈월린스키를 걱정할 필요는 없다. 그의 반대는 허술하기 때문이다.
즈월린스키에 따르면, 만약 우리가 라스바드의 원칙에 입각할 경우, 누군가 부모의 방치로 굶어 죽어가고 있는 세 살짜리 아이를 먹이기 위해, 그 부모의 재산에 무단으로 침입하는 것을 옳지 않다. 그 아이를 굶기는 부모는 아이를 직접 공격하는 것이 아니지만, 부모 재산에 대한 무단침입은 침해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는 말도 안 되는 주장이다. 사람을 감금하거나 떠날 수 없게 하고 굶기는 것은 그 사람에 대한 살인이다. 사람을 죽이기 위해 반드시 손을 댈 필요는 없다. 살인에 대한 자유주의적 견해는 물론 일반적 상식과 일치한다. 우리가 재산을 소유한다고 해서, 그 재산을 이용해 다른 이의 권리를 침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라스바드의 자유주의는, 개인이 자기 재산에 근거하여 절대적 폭군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즈월린스키는 라스바드가 산업 오염이 침해라고 주장한 점에서 다시 비침해성의 원칙을 공격한다. 산업 오염이 침해이고, 만약 다른 사람이 이의를 제기할 경우, 누군가의 재산에 아주 약간의 먼지도 날릴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공해를 유발하는 모든 산업을 중단해야 하는가? 게다가, 만약 누군가 자기에게 비친 몇 개 입자의 빛도 침해라고 간주한다면, 전등을 켜거나 하는 사소한 일도 침해로 간주되어야 하는가? 이런 비판을 전개하며 즈월린스키는 라스바드의 비침해성의 원칙이 인간의 거의 모든 활동을 침해적 행위로 만들 수 있다고 주장한다. 만약 라스바드가 특정 수준 이하의 오염이나 사소한 행위를 침해라 보지 않는다면, 무슨 근거로 라스바드는 침해의 한계를 설정하는가?
나는 라스바드가 침해의 한계를 설정하는 터무니없는 주장을 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라스바드는 침해의 한계는 사회적 상식과 관습의 차원에서 해결되어야 한다고 인식했다. 이 지점에서 즈월린스키는 많은 자유주의자들이 저지르는 실수를 범한다. 즉 개념과 관습의 경계를 구분하고, 개념의 실재적 응용으로서의 관습의 역할을 간과한다. 그러나 우리가 자연스럽게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한, 개념의 응용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관습의 중요성을 간과하며 즈월린스키는 비침해성의 원칙이 모든 인간행동의 잠재적 리스크가 침해를 가져온다고 주장한다.
물론 즈월린스키의 주장이 항상 틀린 것은 아니다. 비침해성의 원칙 그 자체로 사람들이 보유한 재산권이 무엇인지 말할 수 없다는 그의 지적은 옳다. 또 재산권 침해를 명확히 하기 위해서는, 직접적인 물리적 폭력을 넘어선 '침해'의 정의를 원칙적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는 그의 지적 역시 옳다. 그러나 라스바드 역시 비침해성의 원칙을 이런 입장에서 이해했다. 그럼에도 왜 그는 사기의 금지가 물리적 폭력이 아니기 때문에 비침해성의 원칙과 호환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가?
즈월린스키는 비침해성의 원칙을 보강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도덕적 우주의 중심이라는 생각을 버리는 코페르니쿠스적 전회가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린다. 즈월린스키는 이렇게 비유한다. 코페르니쿠스는 프톨레마이오스 천문학의 대안을 제시했으며, 라스바드의 비침해성의 원칙은 자유주의 윤리학의 프톨레마이오스 천문학과 같다. 그런데 그의 비유를 응용하자면,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에도 많은 보강이 필요했었다. 즈월린스키의 대안도 마찬가지이다.
비침해성의 원칙은 무의미한 동어반복인가?
또 다른 자유주의 정치철학자 훌리안 산체스 역시 비침해성의 원칙에 대한 새로운 비판을 전개하였다. 그에 따르면, 비침해성의 원칙은 우리에게 침해를 저지르지 말라고 말해주지만, 마치 즈월린스키가 정확히 지적한 바처럼, 비침해성의 원칙만 이용해 우리는 사람들이 어떤 권리를 가지며, 무엇이 침해로 간주되는지 알 수는 없다. 그렇기 때문에 비침해성의 원칙은 구체적인 자유주의 규범을 연역해내는 근본공리로서 자격을 상실한다. 따라서 그는 비침해성의 원칙은 도덕철학에서 전혀 중요하지 않은 동어반복에 불과하다고 결론 내린다. 권리는 법적인 집행기준이 될 수 있어야만 한다. 그리고 모든 실제 행동은 명확한 권리이론에 근거해야 한다. 그러나 비침해성의 원칙은 무엇이 권리인지 말해주지 않는다. 그것은 오직 "진정한 권리인 권리만 집행하라"만을 말해준다.
그러나 산체스의 주장과 달리 비침해성의 원칙은 동어반복이 아니다. 비침해성의 원칙은 무력의 사용을 권리의 침해라는 맥락에서 이해하며, 특정한 목적을 위해 무력을 사용하는 것에 반대한다. 예컨대 어떤 사람은 효용의 증가를 이유로 부자로부터 부를 빼앗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야 한다고 주장할 수 있다. 그는 이 주장을 위해 적절한 힘이 있다면 그것을 사용할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그 사람은 전혀 권리나 침해를 염두하고 있지 않다. 그의 주장은 부자의 부유함이 가난한 사람의 권리를 빼앗았다는 주장이 아니다. 오히려, 이 이론은 권리와 침해를 완전히 간과하고 있으며, 그저 부자로부터 거지에게 부를 이전하는 것이 더 효율적이며, 따라서 무력사용이 정당화된다고 주장할 뿐이다. 비침해성의 원칙은 권리와 침해라는 개념에 기초해 이러한 주장에 대해 판단기준을 제시한다. 이런 맥락에서 비침해성의 원칙은 가 자체로 권리가 무엇인지 말해줄 수는 없어도 동어반복이거나 무의미하지는 않다.
요컨대 비침해성의 원칙 그 자체로 권리이론이나 침해의 기준을 명확하게 할 수 없다는 비판은 옳다. 그러나 이 점이 비침해성의 원칙이 쓸모 없음을 증명하지는 않는다. 비침해성의 원칙이 모든 일을 할 수는 없어도, 몇 가지 일은 해낼 수 있다.
번역: 김경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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