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내용은 아래 기사 및 칼럼 내용을 요약 번역한 내용임*
Murray N. Rothbard,
Hayek and the Nobel Prize
4 May, 1999
F. A. 하이에크가 1992년에 영면하면서, 한 시대가, 즉 미제스-하이에크 시대가 종말을 고했다. 루트비히 폰 미제스의 '사회주의(Socialism)'를 읽고 1920년대 초반에 좌파에서 전향한 하이에크는, 미제스의 수 많은 제자 중에서도 가장 위대한 인물로 성장했다. 그의 단연 가장 위대한 업적은 미제스의 훌륭한 경기변동이론을 구체화했다는 점이다. 하이에크는 자본주의에 내재된 결함 때문에 경제위기가 도래하는 것이 아니라, 중앙은행이 형성한 인위적인 인플레이션과 신용팽창이 불황의 원인임을 증명하였다.
하이에크는 미제스의 '사설세미나(privatseminar)' 학생이었고, 1927년에 미제스가 설립한 오스트리아 경기변동 연구소의 이사로 재직했으며, 1931년에는 영향력 있는 영국 경제학자 라이오넬 로빈스의 초청으로 런던정경대의 교수로 부임했다. 런던에서, 하이에크는 오스트리아학파의 가격이론 및 생산이론을 영어권 세계에 전파하는데 큰 역할을 담당했다.
1930년대 영국에서 미제스의 견해가 큰 지지를 얻은 이유 중 하나는, 미제스와 하이에크가 대공황을 예측했기 때문이다. 불행하게도 존 메이너드 케인스가 1936년에 '고용과 이자 및 화폐의 일반 이론(The General Theory of Employment, Interest and Money)'을 발표함에 따라, '케인스 혁명'이 경제학계를 휩쓸었고, 그 여파로 거의 모든 오스트리아학파 지지자가 케인스주의자로 전향했다.
케인스주의는 경제과학에 통계중심주의와 막대한 정부 지출의 증가를 가져왔다. 케인스 경제학의 이 특징이 매혹적이었음은 사실이다. 케인스 본인부터,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명성있는 학자였으며, 개인적인 카리스마를 통해서 학자들을 매료시켰다. 1930년대 후반에 접어들자, 국가주의와 적자재정의 반대자는 미제스와 하이에크 밖에 없었다.
말년에 하이에크는 그가 케인스의 '일반 이론'을 적극적으로 반박하지 않았던 것이 인생 최대의 실수임을 인정했다. 그는 케인스가 머지않아 자신의 이론을 포기하거나, 인기를 끌지 못하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 않았다. 불행하게도, 하이에크는 치명적인 판단 실수를 내렸다. 오스트리아학파 경제학의 경기변동이론이 케인스의 모델에 의해 대체되었다면, 미제스-하이에크의 사회주의 비판이론 역시 1930년대에 들어 폐기되었다. 대부분의 경제학자들이 사회주의 정부가 시장을 모방함으로써 경제 계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렇듯 1930년대와 제2차 세계대전 시기는 인간의 자유와 오스트리아학파 경제학의 명운에 있어 가장 위험하고 절망적인 시대였다.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의 승리는 필연적 결과로 보였다. 그런 상황에서 하이에크는 1944년에 '노예의 길(Road to Serfdom)'을 출판했다. 이 책에서 그는 공산주의, 사회민주주의, 그리고 파시즘의 국가주의는 모두 연결되어 있고, 가장 미약한 국가주의도 언젠가는 파시즘과 공산주의와 같은 극단적 형태로 반드시 변화할 것임을 주장했다.
1974년, 그의 스승인 루트비히 폰 미제스가 사망한지 1년 후, 하이에크는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했다. 이 절묘한 시점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그는 1920년대와 30년대에 미제스와 함께 사회주의를 논파하고 경기변동이론을 구체화한 공로를 인정받아 노벨상을 수상했다. 그 무렵에 미제스와 하이에크 모두 경제학계에서 잊혀진 상태였기 때문에, 많은 경제학자들이 하이에크를 이해하기 위해 노력했고, 그리하여 오스트리아학파 경제학의 부흥이 시작되었다.
하이에크의 노벨경제학상 수상은 참 역설적인 면이 있는데,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하이에크의 사상은 미제스로부터 굉장히 멀어졌기 때문이다.
1920년대와 30년대에 하이에크가 경기변동이론을 연구하고, 인플레이션에 반대했던 것과 반대로, 후기의 하이에크는 정부가 물가를 안정시켜야 한다고 주장하고, 인플레이션의 원인으로 은행의 신용팽창이 아니라 노동조합을 비난하는 등, 미제스의 사상에서 벗어나 오스트리아학파 경제학과 모순되는 입장을 주로 표방했다.
이는 하이에크의 관심사가 경제학보다는 정치사회철학으로 옮겨갔기 때문이다. 이 영역에서 그의 접근법은 미제스의 그것과는 확연히 달랐다. 미제스가 전 생애에 걸쳐 이룩한 업적은 모두 하나로 모여 거대하고 강력한 단일 체계를 구성하고 있다. 반면 하이에크는 정교하고 발전된 체계를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모순적이고 혼란스러운 입장을 계속하여 전개함으로써, 자신의 견해 및 관점을 시시각각 계속 바꾸었다. 이 같은 차이점이 발생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미제스는 인간이 이성적이고, 의식적이며, 목적지향적인 존재자라고 보았다. 반면에, 하이에크는 인간을 무의식적으로 행동하는 비이성적 존재자로 이해했다. 인간은 자기가 하는 일이 도통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하이에크가 인간 이성을 극도로 경멸했기 때문에, 인간 이성에 대한 통찰을 근거로 인권과 재산권을 규명하고, 자유주의의 자연법을 상세히 설명할 수 없었다. 미제스는 인류의 번영과 생존을 위해 자유방임 시장경제가 필수적임을 입증하고, 정부의 모든 강제적 개입에 반대하는 이성적 설명을 제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하이에크는 그럴 수 없었다. 하이에크는 오직 우리가 우연히 '진화한' 모든 사회규칙에 복종해야 한다고 맹목적으로 주장했을 뿐이다. 정부 개입에 반대하는 그의 유일하고 미약한 근거는, 정부가 시장경제에 종사하는 개인들 보다 훨씬 더 비이성적이고, 무지하다는 것이다.
일관성있고 명료한 미제스가 아니라, 매우 혼란스럽고, 모순적이고, 일관성이 없는 하이에크가 학계에서 더 큰 관심을 끌고 있다는 점은 매우 슬픈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기적으로 볼 경우, 미제스가 남긴 위대한 지적, 과학적 체계는 더 많은 존경을 받게 될 것이고, 하이에크의 공헌은 미제스의 경기변동이론을 정교하게 개선한 점에만 국한될 것이다. 물론 사회주의와 케인스주의라는 악이 지배했던 암울한 제2차 세계대전 시기에, 하이에크가 미제스와 함께 용기를 가지고 투쟁한 사실은 매우 영광스러운 업적으로 기억되어야 한다.
번역: 김경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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