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내용은 아래 기사 및 칼럼 내용을 요약 번역한 내용임*
Ludwig von Mises,
A Tribute to F.A. von Hayek
5 August, 2017
하이에크 교수의 업적을 제대로 평가하기 위해서는, 제1차 세계대전이 막을 내렸던 당시 유럽, 특히 오스트리아의 정치적, 경제적, 이념적 상황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수세기 동안, 유럽인들은 자유를 갈망했으며, 전제정치를 끝내고 대의정부를 세우고자 노력했다. 모든 합리적인 사람은 절대군주제를 대체할 법치주의를 요구했다. 자유주의 정치원리에 대한 일반적 여론이 너무 확고했기 때문에,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표방하는 마르크스주의자들도 어느 정도 양보할 수 밖에 없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정당을 사회민주당이라고 칭했다.
물론 마르크스주의자들 역시 사회주의는 개인의 자유가 아니라 정부당국에 대한 인민의 완전한 복종을 의미함을 충분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민주주의를 꺼려했음은 명백하다. 그러나 수백만 명의 유권자가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는 용어를 필두로 한 사회주의의 수사법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정확히 알지 못한 상태에서 사회주의 정당에 표를 던졌다. 그렇게 유럽은 나폴레옹 이후 세워진 민주적 의회제를 전복할 새로운 독재정권의 탄생할 위기를 마주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모든 나라의 자칭 지식인 수천 명은 사회주의자들의 주장을 열렬히 지지하고 있었다.
러시아 제정의 몰락과 중앙유럽 경제의 총체적 파탄을 직접 경험한 당대의 젊은이가 사회주의에 매료되지 않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프리드리히 하이에크는 사회주의에 동참하기를 거부한 소수의 반대자 중 한 명이었다. 비엔나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그는 미국에서 몇 년을 체류한 후 오스트리아 경기변동 연구소의 중책으로 채용되었다. 그는 경제학자로서뿐만 아니라 통계학자와 행정가로서도 경기변동이론의 형성에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비엔나 대학에서 주기적으로 열린 나의 세미나에서도, 하이에크 박사는 화폐, 가격, 그리고 무역에 대한 수 많은 훌륭한 에세이를 발표한 바 있다.
사회주의로 가득 찬 오스트리아의 정치적 상황을 고려했을 때, 그가 오스트리아에서 대학 전임교수로 임용될 가능성은 드물었다. 그러나 당시 영국은 자유시장경제에 대한 악의적 편견으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웠고, 그리하여 1931년 하이에크 박사는 런던정경대의 교수로 임용될 수 있었다. 비엔나에서 그는 연구소의 행정가로서 학문 연구에 전념할 수 없었지만, 교수가 됨으로써 이제 경제이론과 정책처방에 대해 오로지 시간을 투자할 여유를 갖게 되었다. 그리고 곧 하이에크 교수는 우리 시대 최고의 경제학자중 한 사람으로 자리잡았다.
하이에크 교수는 많은 중요한 책과 에세이를 발표했다. 그러나 그에게 전세계적인 명성을 안겨준 것은 바로 1944년에 출판된 "노예의 길"이었다. 당시 서구의 국가들은 자유의 인권을 근거로 하여 독일과 이탈리아의 독재정권에 맞서 싸우고 있었다. 그들은 스스로를 개인주의의 위대한 이상을 지키는 수호자라고 보았으며, 적들을 악랄한 노예주인으로 간주했다. 그러나 하이에크 교수는 이런 자부심이 일종의 환상에 불과함을 밝혀냈다. 그는 영국인들이 비난하는 나치 경제체제의 모든 특징이, 서구의 좌파, 즉 자칭 진보주의자, 사회주의자, 그리고 뉴딜주의자들이 목표로 하는 정책과 완전히 일치함을 보여주었다. 역설적이게도, 전체주의와 싸우는 동안, 영국과 그 동맹국들 역시 전체주의적 전시계획에 열광했고, '노예의 길'을 걷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다.
몇 주도 지나지 않아 이 책은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거의 모든 언어로 번역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고맙게도 나를 19세기 자유주의 사상을 복권한 대부라고 칭송한다. 나는 그들의 과찬이 정말 타당한지 종종 의심이 된다. 그러나 하이에크 교수가 "노예의 길"을 통해 자유주의의 새 기원을 열어준 것은 정말 의심할 여지가 없다. 1947년, 서구의 모든 저명한 자유주의자들이 협력하는 몽 펠르렝 협회의 설립을 이끈 것 역시 바로 하이에크 교수였다.
하이에크 교수는 경제과학의 문제와 사회과학 인식론 연구에 30년 이상을 헌신했고, 그 이후 자유주의의 일반이론을 건설하는 방향으로 눈을 돌렸다. 그 연구의 결과가 지난 1960년에 발표된 "자유헌정론"이라는 기념비적인 논문이다. 그것은 그가 시카고 대학의 교수로서 미국에서 보낸 세월의 결실이다.
번역: 김경훈
NO. | 제 목 | 글쓴이 | 등록일자 | |
---|---|---|---|---|
898 | 바이든과 트럼프 경제에서의 실업률 차이 D.W. MacKenzie / 2024-11-14 |
|||
897 | 소비자가 구글의 미래를 결정한다 Art Carden / 2024-11-06 |
|||
896 | 고객들의 적은 과연 누구일까? Raushan Gross / 2024-10-30 |
|||
895 | 베네수엘라의 마두로가 프리드먼을 증명하다 Benjamin Powell / 2024-10-22 |
|||
894 | 기술 지식만이 경제 성장으로 이어질까 Frank Shostak / 2024-10-16 |
|||
893 | 세금 없는 국가로 가는 길 Laurence M. Vance / 2024-10-08 |
|||
892 | 납세자를 위한 길은 무엇인가 Madison Marino / 2024-09-30 |
|||
891 | 2025년, 미국 경제성장을 위한 핵심은? Jams Pethokoukis / 2024-09-23 |
|||
890 | 미국 의료 정책이 늘 제자리인 이유 John C. Goodman / 2024-09-12 |
|||
889 | 우리를 구한 경제적 자유, 실패한 사회주의 Johan Norberg / 2024-09-03 |
|||
888 | 100년만에 찾아온 기회, 美 의회 조세개혁 방안 Adam N. Michel / 2024-08-28 |
|||
887 | 사회보장제도: 미래 세대에 남긴 부담 Romina Boccia / 2024-08-22 |
|||
886 | 또 다른 부동산 붕괴 위기에 놓여있는 우리 EJ Antoni / 2024-08-09 |
|||
885 | 지역 산업을 망쳐달라고 세금을 내는 사람들 Saxon Davidson / 2024-07-31 |
|||
884 | 저가 항공사의 합병 블루스 Walter Block / 2024-07-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