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는 불안의 시대다.
공동체주의 철학의 석학 찰스 테일러(Charles Tayler)는 현대 사회가 안고 있는 세 가지 불안요인으로, 삶의 의미의 상실(도덕적 지평들의 실종), 만연하는 도구적 이성 앞에서 소멸하는 삶의 목표들, 자유․자결권의 상실을 든다.
현대인이 갖는 이러한 불안의 특징은 가치 상대주의에서 비롯되는 면이 있다. 절대적 진리가 없다면, 그리고 서로의 다름이 동등하게 인정된다면 우리는 무엇에 기초해 ‘정당성’을 주장할 수 있을까. 신(神)의 뜻으로 해결할 수 있었던 문제들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우리가 신(神)이고, 신(神)이 우리인 시대에 각각의 개인들은 자기 운명의 주체이자 담지자인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선언은 너무 가혹하다. 우리는 여전히 성인이 되어도 유아적 심인성을 갖고 있다. 타인에게 의지하고 싶고 무언가 우리를 보호해 줄 만한 대상이 있을 때 편안함을 느낀다. 어디 그 뿐인가. 우리는 인정받고 싶다. 내 능력이 부족하고 가진 것이 부족해도 우리는 타인들로부터 배제되거나 차별받고 싶지 않다. 이러한 욕구들로부터 우리는 집단 소속감을 갈망하게 된다. 개인들은 어딘 가에 속하고 싶고 자기가 속한 공동체에서 인정받으며 살고 싶은 것이다.
이로부터 우리는 근대 자유주의가 주창한 ‘자유권’ 개념에서 ‘사회권’이라는 개념을 수용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하나의 정치 공동체에서 더불어 살아가야 하는 개인들의 운명이란 근대 계몽주의가 설파한 것처럼 ‘원자적’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한 원자적 개인주의는 ‘자연은 개체로 이루어져 있다’는 명제를 바탕으로 사회를 자연이 모방된 질서로 이해하는 방법론에 지나지 않는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러한 문제에 대해 ‘우리가 자연으로부터 모방해야 할 것은 썩는 것들 중에서도 썩지 않는 소금’이라고 주장했다. 당위가 규범으로부터 도출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적 명제에는 하자가 없다.
합리주의 사회의 위험
여기까지 우리가 동의할 수 있다면 이제 자유주의자들의 오디세이는 만만치 않은 괴물을 만나게 된다. 누구나 자신의 행복한 삶에 대해 자신이 결정할 자유가 있다면 이는 도덕적 상대주의를 말하는 것이고, 그 결과 우리는 타인의 곤궁함과 불행에 대해 관심이나 조력의 의무를 가져야 할 이유가 없다. 그러한 태도가 ‘옳은 것’일 수는 있다. 하지만 ‘좋은 것’인가라는 질문에는 어떻게 답해야 할까. 자유주의자가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할 때 ‘옳은 것’과 ‘좋은 것’이 경합한다면 우선순위는 어떤 것이어야 할까. 흥미로운 것은 우리가 ‘옳은 것’을 판단하려면 이성이 아니라 믿음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러한 믿음은 ‘자명한 원리’에 대한 것이다. 자명한 이치에 대한 믿음이 정의로 등장한다. 십자군과 이슬람군은 자신들이 믿는 신의 자명함 때문에 싸웠다. 제1차 세계대전은 각 나라가 가진 국민주권의 자명함 때문에 벌어졌다. 과거 일본은 조선을 병합한 이유가 그들에게는 자명하게 옳았고, 조선의 독립을 희구했던 이들에게는 자명하게 그른 것이었다. 자명하다는 것은 결국 ‘증명이 필요 없는 믿음’에 바탕하며, 믿음에 기초한다는 것은 세계관과 가치의 문제라는 이야기가 된다.
이와 달리 ‘좋은 것’의 판별은 믿음이 아니라 합리적 판단에 따른다. ‘죄수들의 딜레마’에서 두 명의 죄수에게 좋은 것은 합리적 게임이론으로 얻어진다. 우리는 어떤 상황을 좋게 만들기 위해 따져 보고 테스트해 본다. 선(good)이 우리에게 행복을 주고, 악(bad)이 우리에게 고통을 주는 것이라면 무엇이 선이고 악인가는 믿음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따져봐야 알 수 있게 된다. 어떤 방법으로 고통을 덜 수 있는지, 어떤 방법으로 행복을 증진시킬 수 있는 지는 이성적 해결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우리는 잠정적인 결론을 얻을 수 있다. 우리는 무엇이 옳다고 주장할 때, 그렇게 함으로써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고 전제하는 것이고, 그러한 옳음은 좋음을 담보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만일 우리가 서로 다른 가치와 이념을 가진 이들과 더불어 살아야 한다면 이들과 조화롭게 사는 길은 ‘옳음’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좋음’을 입증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 배제되고 싶지 않고 인정받고 싶은 개인들이 모인 사회와 그런 개인들의 정치 공동체에서 자유주의자들이 추구해야 하는 사회는 어쩌면 ‘바른 사회(Righteous Society)’가 아니라, ‘좋은 사회(Good Society)'여야 할지도 모른다. 그런 좋은 사회는 사람들의 인정욕구를 배제하지 않고 통합하려는 사회다.
‘모든 무질서의 기원은 관용이 아니라 비관용이며, 최고의 도덕적 이상은 이를 지지하였던 사람들의 비관용에 의해 현저히 손상되었다’고 한 법철학자 켈젠(Hans Kelsen)의 말은 여전히 유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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