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 제목이 '오해’라면 기겁할 사람들이 많다. 그럼 그동안 모든 유행이 대중 취향과는 무관하게 생성됐단 얘기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하다못해 방탄소년단도 소녀시대도 트와이스도 모두 대중이 좋아해 뜬 게 아니라 '알 수 없는 세력’에 의해 억지로 그렇게 만들어졌단 얘기처럼도 들린다.
그런데 그런 얘기가 아니다. 대중의 '취향’, 즉 대중이 마음에 들어 좋아해준다는 것 자체만으론 아무 것도 변하지 않는단 얘기다. 그 '취향’이 '돈’을 만들어내야 그 상품이 생명력을 갖고 유행을 탄다. 이렇게 놓고 보면 오히려 하나마나 한 얘기처럼 들린다. 트와이스를 좋아하는데 트와이스를 '소비’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느냔 말이다. CD를 사줄 정도까진 안 돼도 스트리밍 정돈 누구나 듣고 그 스트리밍은 광고수익으로 이어진다. 그렇게 대중적으로 인기를 얻으면 광고모델 섭외가 이뤄져 추가수익도 얻는다. 인기 있는 아티스트가 '돈’을 벌어들일 방법은 무궁무진하다.
그런데 '안 그런’ 상황도 많다. 특히 과거로 거슬러 올라갈수록 '안 그런’ 상황이 더 많아진다. 1930년대를 양분한 양대 대중음악장르, 신(新)민요와 트로트의 경쟁구도 역시 바로 그런 예다. 하나씩 살펴보자.
불과 4년 만에 크게 바뀐 1930년대 대중음악시장 중심, 대중 선택이 맞았나?
대부분 트로트는 많이 들어봤어도 신민요란 대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이 많을 것 같다. 간략히 줄이자면, 트로트는 일본 엔카(戀歌)와 거의 유사하거나 사실상 같은 '수입음악’이고, 신민요는 전통 경기민요 기반으로 여러 해외음악 경향과 악기 등을 가미한 '혼종음악’이다. 그리고 1930년대 중반, 즉 한일합방으로부터 사반세기가 지난 시점까지도 한국대중음악계 중심은 신민요가 차지하고 있었다.
대중월간지 삼천리가 1935년 10월호에서 집계한 '레코드 가수 인기투표 결선 발표’를 참고해 봐도 그렇다. 인기투표 남자 1위가 채규엽, 그 뒤로 김용환, 고복수로 이어진다. 여자 1위는 왕수복이고 그 뒤로 선우일선과 이난영이 등장한다. 이중 성악가 출신으로 예술가곡 등을 불렀던 채규엽과 특이하게 재즈풍 대중가요를 불렀던 이난영 정도를 제외하면 전반적으로 신민요 기반 가수들이다. 1~3위를 넘어 삼천리에 거론된 인기가수 19명 면면을 모두 살펴보면 더 그렇다. 최소한도 1935년 시기까지는 신민요 비중이 높던 가수들이다.
특히 여자부문 1, 2위 왕수복과 선우일선은 기생 출신이며, 그들 특기는 언제나 민요 기반이었다. 1위 왕수복은 신민요에 엄청난 애착을 갖고 있던 인물로, 1939년 일본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최승희 씨가 조선무용을 살린 것처럼 나는 조선의 민요를 많이 노래하고 싶다”고까지 밝힌 적 있다.
그런데 왕수복이 위 코멘트를 전한 시점이 1939년이란 점이 중요하다. 신민요가 실제로 유행하던 1935년 부근이라면 별 의미 없는 발언이었겠지만, 불과 4년 뒤인 1939년만 돼도 분위기가 전혀 달라졌기 때문이다. 이때만 해도 이미 시장 중심은 트로트-엔카로 완전히 바뀌어가고 있었다. 왕수복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신민요를 지키겠다’는 뉘앙스로 답변한 셈이다.
또 다른 대중월간지 신세기 1939년 9월호에서 뽑은 '레코드 가수 인물론’에서도 분위기를 알 수 있다. 당시 인기 있던 가수 27명에 대한 인상을 적은 기사인데, 1935년 당시 인기가수들이 상당부분 '물갈이’됐음을 알 수 있다. 박단마, 황금심, 남일연, 김영춘 그리고 누구보다 남인수와 김정구가 이때 이름이 거론된다. 1935년에 삼천리에서 거론된 19명 중 1939년 신세기의 27명에 속한 인물은 10명뿐이다. 절반이 물갈이된 것이다. '살아남은’ 10명도 대부분 신민요 기반에서 트로트-엔카로의 전향을 시도한 경우들이다.
이게 과연 가능한 일일까. 20여년에 걸쳐 진행된 일이라면 그럴싸하다 여겨질 수 있지만, 불과 4년 만에 벌어진 일이다. 어찌됐건 오랫동안 들어온 전통 민요 기반으로 좀 더 세련된 맛만 가해 대중적 인기를 끌었던 신민요다. 이처럼 대중친화적인 장르가 사실상 '낯선’ 장르인 트로트-엔카로 갑자기 대체된다는 게 그리 쉬운 일일까.
지금처럼 TV, 케이블TV, 웹 기반 등 수많은 미디어가 존재하는 시기에도 이렇게 빠른 장르 중심이동은 보기 드문 일이다. 유행속도가 지금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느렸던 1930년대에 이런 대대적 이동이 어떻게 가능했던 걸까. 일제가 억지로 트로트-엔카를 들으라고 정책적으로 강제하기라도 했단 말인가?
대중음악시장 중심은 소수더라도 '실제로 소비해줄 계층’ 취향대로 움직여간다
사정은 단순하다. '돈이 되는 방향’이 실제 다수 대중 취향과는 달랐기 때문이다. 1930년대 후반까지 조선의 라디오 보급률은 이상스러울 정도로 낮았다. 대략 10만 대 정도 보급된 것으로 알려진다. 반면 축음기 보급률이 높았다. 30만 대 정도 보급됐다고 기록된다.
이는 이상한 일이다. 어찌됐건 당시만 해도 라디오는 음악방송이 대다수였다. 그러니 실제적으로 '같은 음악기기’로서 라디오보다 훨씬 고가의 축음기가 3배나 많이 보급됐단 얘기다. 거기다 축음기는 그 자체로 소비가 끝나는 것도 아니다. 계속 음반을 사들여야만 새로운 음악을 꾸준히 접할 수 있다. 장기적으로 추가소비가 오히려 더 커질 수 있다.
그런데 이렇게 된 사연은 단순하다. 축음기는 너무 비싸니 대신 라디오를 사갈 '중산층’이 극히 적었던 시절이란 점이다. 30만 대 축음기는 대부분 당시 상류층, 사회 엘리트층에 국한해 보급됐었다.
문제는 바로 이 당시 사회 엘리트층에선 신민요가 '촌스러운 옛 음악형태’로 여겨지고 있었단 점이다. 비싼 입장료를 받는 극장공연 등이 대부분 신민요를 거의 취급하지 않았단 점으로 잘 알 수 있다. 1935년 당시에도 극장공연 시 신민요 가수들은 이른바 '막간가수’ 정도로만 활동해왔단 점을 확인할 수 있다.
당시 사회 엘리트층 유행은 엄연히 트로트-엔카였다. 일제시대 엘리트로서 자연스럽게 일본문물을 동경하는 경향을 일단 예상해볼 수 있다. 또한 엔카 특유의 비장미와 염세적 가사 등이 어디까지나 흥겨움과 국토사랑 등을 들려주는 신민요보다 세련되게 느껴졌으리란 점도 예상해볼 수 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서구문화권의 전반적 분위기와도 일치한다. 일종의 염세성과 자기연민 등이 각종 문화상품들을 통해 배어나오던 시기다. 서구문화에도 상당부분 관심이 깊었을 당시 사회 엘리트층 취향과 맞닿는 구석이 많았다.
결국 '실제로 소비해줄 계층’ 유행이 절대다수 대중, 그러나 '실제로 소비해줄 능력은 떨어지는 계층’ 유행과 크게 달랐다는 것. 아닌 게 아니라 1936년 1년간 조선에서 팔려나간 전체 축음기 음반이 약 100만장으로 집계된 가운데, 그중 조선어 음반은 30만 장에 불과했던 것으로 드러난다. '실제 소비해줄 계층’이 원하는 음악이 조선가수 노래 중엔 별로 없었단 얘기다. 당시 서양음악이 딱히 지배적 위상도 아니었단 점으로 미뤄, 대부분 일본 엔카 가수들 음반이었으리라 짐작해볼 수 있다.
바로 이 같은 상황에서 일본 엔카 가수들이 차지하는 커다란 '파이’를 조선 가수들이 조선어 곡으로 더 살갑게 대체하려는 시도로서 신민요 가수들의 트로트-엔카 전향이 일거에 이뤄졌던 셈이다. 매우 상식적인 과정이다.
그런데 여기서 궁금해지는 부분이 있다. 그럼 절대다수 대중은 대체 어떤 식으로 음악을 들었을까 말이다. 대체 어떻게 대중음악을 소비하고 있었기에 '돈’이 되질 않아 대중이 선호함에도 불구하고 트로트-엔카로의 중심이동이 이뤄졌느냐는 의문이다. 일단 지금 TV사극 등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형태, 즉 장터에 찾아오는 소리꾼들 노래를 마당무대에서 듣다가 중간에 돈 걷는 이에게 몇 푼씩 내는 형태가 많았다. 서민들 대상으로 자릿세 정도를 걷는단 개념이라 당연히 수입은 극장공연에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적었다. 또 있다. 좀 더 희한한 형태다.
“그러나 이미 민속학자 송석하가 쓴 1930년대의 글을 보면, 장터를 돌아다녔던 소리꾼들 대신 축음기를 가지고 다니며 노래를 들려주고 돈을 버는 사람이 생겼다는 기록이 있으며(...)” (이영미, '대중가요’)
저작권 개념이 있던 때도 아니고, 당연히 여기서 벌어들이는 돈은 가수와 음반제작사에 돌아가질 않는다. 중간업자 한 명이 수백, 수천 명에게 돈을 거둬들여도 실제 팔려나간 음반은 단 한 장이다.
이는 실제적으로 2000년대 초반 국내 만화업계와 도서대여점 간 관계와 유사하다. IMF 외환위기 직후 만화와 각종 잡지가 잘 안 팔려나가는 분위기에서 보다 싼값에 만화와 잡지 등을 빌려볼 수 있는 도서대여점이 유행했다. 당장 사정이 급한 만화업계에선 아예 판매구조를 도서대여점 중심으로 재편했다가 결국 사멸 흐름을 타게 됐다. 똑같이, 만화를 보는 이들은 많지만 실제 팔려나가는 만화는 기껏 도서대여점 숫자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신민요도 정확히 같은 몰락의 길을 걷게 된 셈이다.
참고로, 당시 장터문화에 대한 각종 문헌들을 찾아보면, 장터에서 소리꾼이나 축음기를 통해 대중이 즐겨 듣던 음악은 신민요 중심이었다. 아무리 대중 '취향’이 그렇더라도 실제 '시장’이 건실히 성립돼 '거래’가 활발해지지 않으면, 그리고 그에 따른 '이익’이 실제 실연자와 저작권 소유 측에 돌아가지 않으면, 그 업계는 패망해버리고 만다는 방증이다.
'트로트’ '포크’ '아이돌’...결국은 모두 '실제로 소비해줄 계층’을 따라 이동된 유행
그 이후 상황도 흥미롭다. 신민요 가수들은 1940년대 이르러 대부분 트로트-엔카로 전향했다. 그러다보니 기존 신민요를 즐기던 절대다수 민중도 어쩔 수 없이 트로트를 들어야했다. 돈과 인기가 같은 선상에서 만나지 못했기에 벌어진 현상이다. 그렇게 시장이 흘러가면서 대중음악시장 중심은 자연스럽게 트로트가 차지하게 됐다.
그리고 그렇게 트로트에 익숙해진 세대가 해방과 6.25를 거쳐 중장년 '기성세대’가 됐고, 전쟁이 싹쓸이해간 폐허 위에서 1960년대 수출입국 천명으로 경제 부흥이 찾아오기 전까지 신세대들은 이렇다 할 자본을 쌓기 힘든 분위기가 이어졌다. 결과적으로 기성세대는 상당히 오랜 기간 신세대들에 비해 더 탄탄한 경제적 기반을 갖춘 세대로 남게 됐다. 그래서 1960년대까지만 해도 트로트 중심 대중음악 판엔 딱히 변화가 없었던 것이다. 음악상품에 실제로 돈을 지불해가며 소비해줄 여력을 갖춘 계층이 바로 일제시대 트로트 유행을 겪은 기성세대들이었기 때문이다. 엘비스 프레슬리도 비틀즈도 롤링스톤즈도 모두 공짜로 듣는 라디오에서나 인기 있는 뮤지션들이었을 뿐, 그에 영향 받은 신세대 뮤지션들이 인기를 끌 수 있는 환경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다 분위기가 달라진 건 고도성장기인 1970년대 즈음 되고부터다. 국가경제 사정이 확연히 나아지자 일자리도 늘어나고 대학생 등 젊은 층도 수입을 얻을 수 있는 일자리가 크게 늘어났다. 그러자 비로소 '젊은이들의 유행’이라 볼 수 있는 포크음악이 대중음악시장에서 처음으로 트로트를 대체하기 시작한다. 젊은 층에 '소비해줄 수 있는 능력’이 갖춰지면서 벌어진 현상이다. 분위기를 타고 TV 방송사에서도 포크음악 중심 대학가요제, 강변가요제 등을 기획해 붐을 전파하기 시작했다.
이후는 더 흥미롭다. 1980년대야말로 고도성장의 열매를 막 따먹기 시작하던 때다. 88올림픽을 거쳐 중산층이 확고히 자리 잡으면서 이제 가정의 10대 자녀들도 부모로부터 풍족하게 용돈을 받는 분위기가 마련됐다. 그러자 이번엔 10대들이 선호하는 문화상품들마저 불티나듯 팔려나가 이른바 '용돈시장’ 스타들이 새롭게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 '용돈시장’ 스타의 초기 대표주자로 1992년 데뷔해 현상적 인기를 모은 서태지와 아이들을 들 수 있다.
그리고 지금이다. 서두에 말한 것처럼, 지금은 대중이 좋아해주기만 하면 '어떤 식으로든’ 수익을 얻어낼 수 있는 다양한 수익모델이 개발된 상황이다.
IMF 외환위기 직후 전체 문화소비가 위축된 상황에서, 강한 충성도를 지닌 소비층을 기반으로 한 아이돌음악만이 판 치고 있단 비판이 일기도 했지만, 음원판매 사이트와 스트리밍 서비스 등이 새롭게 개발되면서 이런 문제도 사라졌다. 아예 '공짜로’ 음악을 들어도 광고수익이 해당 뮤지션에게 돌아가는 구조가 마련되자 곧 음원사이트에선 발라드와 힙합 뮤지션들이 중심을 차지하게 됐고, 그렇게 시장 다양화가 이뤄질 수 있었다. 점차 '다수 대중’의 취향이 시장에 전달돼 그 취향이 보상받을 수 있는 환경으로 진화해가고 있는 셈이다.
어쩌면 '그래서’ 요즘 세대들일수록 대중 '취향’과 실제 대중문화 '유행’ 및 '흐름’이 일치하지 않을 수 있단 점이 와 닿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환경이 조성되지 않으면 언제라도 불일치는 돌아올 수 있고, 대중이 원해도 반영되지 않는 분위기가 만들어질 수 있다.
단순히 '보고 즐기는 것’만으로 시장이 형성되고 거래가 이뤄지며 그 이익을 실제 저작 측에 돌아갈 수 있는 환경. 만약 이런 환경이 1930년대에 마련됐었더라면 당연히 신민요도 사멸되지 않았고, 비록 지금까지 유행의 중심에 있진 않았을지언정 그 흔적과 영향을 여기저기서 찾아볼 수 있는 분위기도 마련됐을지 모른다. 최소한도 지금처럼 '트로트는 알아도 신민요가 뭔지는 당최 알 수 없는’ 분위기까진 아니었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지난 대중문화사를 통해 '대중문화 유행은 대중의 ’취향'에 따라 움직인다’는 명제 자체는 틀린 것으로 확인된다. 그러나 거기서 모든 게 끝나는 것 역시 아니란 점도 발견된다. '시장’ '거래’ '이익’의 문제를 새로운 미디어의 개발을 통해 극복해내는 노력들을 통해서다. 그러나 이는 반대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그 구조를 만들어내지 못하는 콘텐츠의 경우, 같은 결론을 강화시켜주는 또 다른 사례로 남게 된단 점도 동시에 증명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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