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덕적 인간, 윤리적 인간

김회연 / 2024-08-27 / 조회: 238

영화 <서울의 봄>(김성수, 2023)은 '전두광’에게 다음과 같은 대사를 부여하면서 그를 단순하지 않은 악역으로 만들었다. “인간이라는 동물은 안있나, 강력한 누군가가 자기를 리드해 주기를 바란다니까.” 이 말을 뱉는 순간부터 그는 추상적인 악, 어느 날 하늘에서 뚝 떨어진 악의 화신이 아니라, 그것의 탄생에 우리가 어떤 식으로든 일조한 바 있음을 상기시키는 필연적 악이자 보편적 악의 형상을 띈다. 인간이 자유를 기꺼이 반납하고 '강력한 누군가’에 대한 복종을 은연중 욕망하는 존재라는 저 무서운 통찰. 이와 정확히 동일한 맥락을 나는 전역한 친구들과의 대화에서도 종종 발견한다. “군대에 있을 때가 차라리 좋았지……” 왜 아니겠는가. 시키는 일만 재깍 해내면 되는 곳, 삶의 온갖 골치 아픈 고민들을 무효화해 주는 곳, 조직의 명령을 충실히 따르기만 한다면 하루하루가 안정적으로 살아지는 그곳이, 사회라는 무시무시한 무한 경쟁의 살얼음판보다는 차라리 살 만한 곳이 아닐까. 전두광의 저 대사가 우리를 소름 끼치게 만들었던 것은 그것이 평범한 사람으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끔찍한 악마성의 분출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평범한 우리가 겉으로는 경멸하면서도 속으로는 동의할 수밖에 없는 잔혹한 진실이었기 때문이다.


자유는 부담스럽다. 자신의 삶을 오직 스스로 갱신해 나가야 하는 주체는 고독과 불안을 느끼게 되고, 그것이 참을 수 없는 지경으로 치달을 때 차라리 누군가에게 안정적으로 예속되기를 바라며 '자유로부터의 도피’(에리히 프롬)를 택한다고 사회 심리학은 설명한다. 자유로부터 도피한 자들이 꿈꾸는 세계, 어떤 인간도 고독과 불안 속에 홀로 두지 않는 정치적/경제적/사회적 총체성의 유토피아, 다른 말로 '사회주의’는 그렇게 탄생했다. 사회주의가 꾸는 꿈에서는 모두가 거대한 '하나’의 일부다. 개인은 없고 집단만이 있으며 그로부터 진정한 평등이 실현될 거라는 약속이 선포된다. 자유를 주고 미래를 보장받기, 어쩌면 이것은 해 볼 만한 거래가 아니었을까? 꿈은 급속도로 퍼져 나갔고, “이제 '우리 모두 사회주의자들이다’라고 새삼 강조할 필요가 없어진”(39면) 시대가 다가오고 있었다. 1944년, 하이에크가 '노예’라는 과격한 어사를 동원해야만 했던 것은, 너무 달콤해 도무지 깨고 싶지 않은 꿈에서 사람을 깨우려면 다정하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아니라 거칠고 날카로운 경고음이 필요하기 때문이었을까. 서론에서부터 그는 거침없다. “사람들은 나치즘이 사회주의의 필연적 결과라는 사실을 기꺼이 직시하려 하지 않는다.”(38면) 출간 이후 80년간, 이 책은 꾸준한 경보(警報)가 될 것이었다.


나치. 고유 명사인 동시에 악의 보통 명사가 된 이 이름은 시간이 지나며 퇴색되기는커녕 세계인의 기억 속에서 되레 강화되어 왔다. 그 기억 중 하나를 우리는 한나 아렌트에게 빚지고 있는데, 그것은 그녀가 '악의 평범성’이라는 유명한 개념으로 정식화한바 악이 인간의 특수한 사악함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무비판적/무사유적 맹목 상태에서 탄생한다는 생각이었다. 아렌트는 나치 전범 아이히만을 잔인한 '악마’가 아닌 전형적인 '공무원’으로 평가하면서, 그를 제 행동에 대한 몰이해 속에서 그저 상관의 명령을 충실히 따르기만 한 존재로 파악한다. 아무런 양심도 윤리도 없이 주어진 일을 시키는 대로 이행하기만 하는 존재, 어쩌다 그는 이러한 권위주의의 노예가 되었을까.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행동하기를 포기한 시점부터, 당을 위해 자신의 자유를 기권한 순간부터 그는 진정한 나치스였다. 나치의 발생학과 전두광의 인간론과 자유 도피의 메커니즘은 모두 하나다. 말하자면 우리가 자유를 포기하기 쉬운 인간일수록, 우리에게 악은 보다 평범한 무엇이 된다. 그래서 하이에크는 이렇게 쓴다. “독일과 이탈리아에서 나치스와 파시스트들은 정말 별로 발명할 것이 없었다.”(176면) 그들은 고독과 불안에 떨며 언제든 자유를 상납할 준비를 해 두고 있는 사람들을 향해 손을 내밀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나는 악의 반대말이 선이 아니라 자유라는 생각을 해 본다. 자유로운 인간들만으로는 어떤 전체주의적 집단의 창조도 불가능하기 때문이고, 모든 인간이 '개인’인 한에서 누구도 다른 이의 우위에 설 수 없기 때문이다. “개인주의 입장의 본질은 바로 개인을 자기 자신의 목적에 대한 최종적 재판관으로 인식하는 것, 즉 가능한 한 자신의 견해가 자신의 행동을 지배해야 한다는 믿음이다.”(107면) 이 단순하고 정확한 문장 속에 이 책의 심장이 있다고 느낀다. 나의 말과 생각과 행동의 최종 심급이 나 자신 외에 다른 무엇일 수 없다는 것, 오직 나만이 나의 주인이며 누군가의 노예로 살 수 없다는 것. 이것은 '도덕’과 구분되는 '윤리’의 차원을 개시한다. 푸코에 따르면 도덕이 사회가 개인에게 부과하는 규율이자 법이라면, 그 규율을 나의 내면으로 가져와 성찰과 반성의 대상으로 전유할 때 윤리가 발생한다. 외부에서 주어진 규칙을 의심 없이 받아들이고 무조건적으로 따를 때 인간은 '도덕적’이다. 그러나 그 규칙을 자아의 양심에 비추어 보고, 내면으로부터 성찰해 보고, 비판적으로 사유하며 반성적으로 곱씹을 때 인간은 '윤리적’이다. 하이에크는 “이런 점에서 나치나 혹은 여타 집단주의 국가는 '도덕적’인 반면, 자유주의 국가는 '도덕적’이지 않다”(130면)고 쓰고 있다. 말인즉 아이히만은 역사상 가장 도덕적이었던 사람 중 하나인 셈이다. 도덕이 그 자체로 반드시 악하다는 말이 아니다. 개개인의 윤리를 통과하지 않은 공동체의 도덕은 악과 그렇지 않은 것을 구별할 줄 모른다는 뜻이다. 우리는 사회가 내리는 명령에 기계적으로 복무하지 않고 나 자신의 가치와 신념에 따라 삶의 행로를 스스로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 윤리적 인간들이 꿈꾸는 세계, “개인들이 자신의 삶을 자신의 뜻에 따라 점진적으로 만들어 가는 시도가 허용되는 체제”(52면), 다른 말로 '자유주의’는 그렇게 탄생했다. 자유는 영원한 약속이 아니라 엄중한 책임이다. 누리는 것이 아니고 부담하는 것이다. 그 부담이 너무 무거워 그만 내려놓고 싶어질 때마다, 나는 언제든 이 책으로 다시 돌아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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