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는 의사소통의 도구인 동시에 인식과 사유의 도구이기도 하다. 그래서 우리가 사용하는 용어의 의미가 왜곡되면, 그 용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의 인식과 사상, 그리고 그에 기반한 행동도 왜곡되고 사회적 혼란이 초래된다. 그래서, 공자(孔子)도 '이름이 바로 서지 않으면 일이 이루어지지 않고 백성은 손발을 둘 곳이 없다’고 하지 않았던가.
경제와 관련해서 가장 대표적으로 그 의미가 변질되어 사용되고 있는 용어 가운데 하나는 '인플레이션(inflation)’이다. 현재 인플레이션은 통상 전반적인 가격 상승 내지는 고물가를 의미하는 용어로 사용된다. 최근 물가가 많이 올라 살기 어렵다는 이야기를 할 때, 인플레이션이 경제를 덮쳤다는 표현을 쓰기도 한다. 지난 총선에서 '대파값’이 이슈로 등장했던 것도 물가 상승을 인플레이션으로 이해하고 있는 사례 중 하나이다. 이렇듯, 인플레이션을 물가 상승으로 이해하면서, 인플레이션의 원인으로 여러 가지 요인들이 언급되기도 한다. 예를 들어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원자재 가격이 상승하면서 인플레이션이 초래되었다고 하고, 또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인한 원자재 및 부품 수급에 차질이 생기면서 비용이 상승해 인플레이션이 초래되었다고도 한다. 그러다 보니, 인플레이션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경제 전반에 대한 종합적인 분석이 필요하다는 정책적 제언도 나온다. 인플레이션을 이렇게 이해하게 되면, 사실상 그 원인이 무엇인지, 그것을 일으킨 주체가 누구인지 막연하고 알 수가 없게 된다. 대체로 탐욕스러운 기업이 이윤만을 생각해서 가격을 올린다고 비난받는다.
인플레이션이란 용어는 본래 통화량의 팽창 자체를 의미했다. 옛날 금화를 사용할 당시, 왕이 그 금화를 걷어 들여 녹여서 새 동전을 만들면서 금이 아닌 다른 금속을 섞거나 무게를 속여 주조해서는 돌려주었다. 이렇게 함으로써 왕은 더 많은 숫자의 금화를 주조할 수 있었고, 이렇게 만들어진 여분의 동전은 왕의 금고로 들어갔다. 이런 식으로 통화량을 팽창시킨 것을 다름 아닌 인플레이션이라고 불렀다. 즉, 통화량의 팽창이 곧 인플레이션이었다. 그리고, 이렇게 늘어난 통화량으로 인해, 즉 인플레이션의 결과 물가가 상승한 것이다. 과거 금화를 사용할 때에는 금화를 걷어 들여 새로 주조하면서 통화량을 팽창시켰지만, 지폐를 사용하는 현재는 지폐 인쇄기를 돌리면 통화량을 얼마든지 팽창시킬 수 있다.
인플레이션은 일종의 횡령이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왕은 동전의 숫자를 늘려 여분의 동전으로 자신의 주머니를 채웠다. 그 과정에서 자원은 백성의 주머니에서 나와 왕의 주머니로 넘어갔다. 금화가 아닌 지폐를 사용하는 현대에도 인플레이션이 일종의 횡령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고물가에 국민이 살기 어렵다고 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통화량의 팽창이 곧 인플레이션이라고 하는 인플레이션 본래의 의미를 되찾게 되면 인플레이션을 일으킨 주체가 분명해지고, 그리고 이에 따라 물가 상승을 초래한 주체가 누구인지, 책임의 소재가 어디에 있는 것인지 명확하게 드러난다. 그것은 다름아닌 정부와 중앙은행이다. 당연히 정부는 이러한 사실을 감추고 싶어 한다. 이와 관련해 경제학자 미제스(Mises)는 이렇게 말했다. “인플레이션이 불러오는 나쁜 결과들에 대한 비난을 피하기 위해 정부는 의미론적(semantic) 속임수를 이용한다. 그들은 인플레이션이라는 용어의 의미를 바꾸어 버리려고 한다. 그들은 인플레이션의 필연적인 결과, 즉 가격의 상승을 '인플레이션’이라 부른다. 그들은 가격의 상승이 화폐의 양적 증가에 기인한다는 사실을 잊혀지게 만들려고 전전긍긍한다. 그들은 결코 이 양적 증가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는다. 그들은 생활비 상승의 책임을 기업에게로 돌린다.”
최근 뉴스에서 보듯이,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실질 임금이 낮아졌다는 이유로 기업을 상대로 임금 인상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알고 보면, 노동자나 기업이나 정부가 만든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다 같이 피해를 보고 있는 피해자들이다. 가해자는 숨어버리고, 피해자들끼리 다툼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기업에게 달려갈 것이 아니라 정부에게 달려가 인플레이션 정책을 당장 중단하라고, 통화량 팽창을 당장 중단하라고 요구해야 할 일이다.
권혁철 자유시장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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