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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익의 추구가 정말로 공익을 창출할까?

한정석 / 2020-12-16 / 조회: 1,533

'사람들은 누구나 다른 사람이 아닌, 자기 자신을 위해 일한다.’


우리는 이 명제에 동감한다. 누구도 자신의 삶을 다른 이들이 대신 살아 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렇게 자신을 위해 사는 삶이 자기뿐만 아니라, 모두를 위해 좋다고 주장한다면 어떨까. 선뜻 동의하기 어려울 수 있다. 이 주제가 이번 오디세이에서 만나는 역경이다.


200여 년 전, 애덤 스미스는 <국부론>을 통해 '개인의 자유로운 사익 추구가 자신이 의도하지 않은 공익을 만든다’고 주장했다. 스미스의 이러한 주장은 아마도 자유주의자들로서는 곤혹스러운 문제일 수 있다. 사실 자유주의를 비판하는 비()자유주의 진영에서도 개인의 사익이 공익으로 이어진다는 애덤 스미스의 주장은 철저하게 자본가 계급을 옹호하는 논리로 지목된다. 여기에 우리의 상식도 그런 비판을 지지하는 것 같다.


개인들이 저마다의 사익을 추구한다면 홉스가 말한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상태가 되는 것이 아닐까.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공동선이 유지될 수 있다는 말일까. 애덤 스미스는 세상을 너무 낙관적으로 본 것이 아닐까.


하지만 좀 더 깊이 생각해 보면 개인의 사익이 공익을 만든다는 스미스의 주장은 그것이 인간 본성과 관련해서 진실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애덤 스미스는 개인들이 다른 사람들이 아닌 자신의 관심과 문제에 집중하는 본성을 'self interest’(自利心)라고 명명했다. 우리가 이러한 자리심을 갖게 되는 이유는 다른 사람의 목적이나 의도, 가치들을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고속도로위의 운전자들이 그렇다. 이들은 다른 사람의 차들이 어디로 가는지, 그 목적지가 어디인지에 관심 없이 오직 자신이 가고자하는 목적지에 대해서만 관심이 있다.


이러한 운전자들의 본성은 이기적(selfish)인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사고가 나지 않는 이유는 self interest를 가진 운전자들이 신중하기 때문이다. 이들은 다른 차량들의 방향이나 속도에 주의하면서 방어 운전을 한다. 이렇듯 자리심을 가진 개인들은 자기를 보존하려는 마음도 가지고 있다. 스피노자는 이를 '코나투스’라고 명명했다. 우주의 모든 만물은 존재의 이유를 갖고 있으며 그렇기에 자신을 보존하려는 본성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만일 누군가가 자기를 이롭게 하려고 나를 해치려 하면 우리는 당연히 이를 불의하다고 여기게 된다.


애덤 스미스는 이러한 불의에 대한 감정이 자신만이 아니라 타인의 불행이나 피해에도 공감을 통해 이뤄진다고 말한다. 우리가 사회적 약자에 대한 강자의 폭력과 갑질에 분노하는 이유가 바로 이 '공감’의 본성 때문이다. 애덤 스미스는 형식적인 논리들의 결합이 아니라, 사람들이 가진 이러한 공감의 연대가 정의의 본질이라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 사람들의 내면에는 '공정한 제3의 관찰자’가 존재하기 때문에 우리는 각자가 자기를 이롭게 하려들면서도 스스로 도덕적 판단과 행위를 하게 된다는 이야기다.


self interest(自利心)는 그런 점에서 각자가 서로를 서로에게 비추는 거울과 같다. 우리는 이 거울을 통해 다른 사람의 눈으로 자신을 보게 되는 것이다. 결국 누구나 자신을 이롭게 하기 위해 행동한다면 누구도 자신만을 이롭게 하기 위해 행동할 수 없게 된다. 여기에서 우리는 공익(public interest)의 룰을 어떻게 만들 것인가라는 문제와 마주하게 된다. 사익이 공익을 만들게 된다는 애덤 스미스의 self interest는 단지 경제 원리만이 아니라, 정치 원리도 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이 공익의 룰, 즉 정의로운 규칙이 적용되는 공동선은 어떻게 만들어지는 것일까. 이 대답은 애덤 스미스와는 반대편에 서 있다고 생각한 또 다른 자유주의자 루소가 했다. 인민의 일반의지라는 것이 그 개념이다. 루소는 이러한 문제를 다루기 위해 자신의 <사회계약>에서 '사슴 사냥꾼’ 이야기로 풀어낸다. 


루소의 사슴 사냥꾼들       

        

루소는 자신의 저서 <사회계약>에서 어느 부족의 사슴 사냥 이야기를 비유로 인민의 일반의지에 대해 설명한다. 그 이야기는 대략 이렇다. 한 원시 부족은 토끼를 사냥해서 먹고 살았다. 그런 토끼는 개인 각자의 노력으로 사냥이 충분했기에 부족원들이 협동해야 할 일이 없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토끼의 수가 적어졌고 부족은 대신 사슴을 잡기로 했다. 문제는 토끼 사냥과 달리, 사슴 사냥은 개인 혼자 할 수가 없는 것이어서 협동이 필요했다. 사슴을 발견하는 역할, 모는 역할, 잡는 역할 등이 필요했다.


부족민들은 그렇게 역할을 정하고 사슴 사냥에 나섰다. 그런데 사슴 몰이꾼 하나가 토끼를 발견하고는 그만 유혹에 빠졌다. 솔직히 사슴 사냥은 나 혼자 잘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차라리 저 토끼를 잡으면 오늘 한 끼 가족 식사는 해결될 수 있다. 그렇게 유혹에 빠진 그는 사슴몰이 역할을 포기하고 토끼를 잡으려다 결국 그가 몰아야 할 곳으로 달려온 사슴을 도망치게 만들었다. 사슴 사냥꾼들은 모두 허탕을 쳤고 빈 손으로 돌아가야 했다.


루소는 사슴 사냥 이야기를 통해 우리에게 묻는다. 이 개인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 짧지만 강렬한 루소의 사슴 사냥꾼 이야기는 개인의 사익과 공익의 문제를 본질적으로 다루고 있다. 루소는 이 이야기를 통해 자신의 사회계약설과 인민의 일반의지라는 개념을 선명하게 제시한다. 우리가 만일 어떤 공동선(common good)에 동의했다면 우리에게는 개인의 자유의지를 넘어서는 그 무엇에 복종해야 할 책임과 의무 같은 것이 등장한다. 사슴사냥 부족에게 공동선은 사슴을 잡아서 부족원들이 나눈다는 것이고, 이때 참여하기로 한 이들에게는 이 공동선에 부합하는 행위 의무가 부여된다. 그러한 공동선에 대한 행위 규범은 마치 헌법의 기본권처럼 구체적으로 열거해서 기록하지 않더라도 참여자 모두에게 '공감적’으로 제시되어 있다. 이것이 바로 루소의 '일반의지’다. 


이러한 사슴 사냥꾼들의 일반의지는 단지 '사냥꾼 전체의 의지’가 아니다. 현재의 사슴 사냥꾼의 수가 줄거나 는다고 해서 변화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미래의 어떤 시점에서 사슴 사냥에 참여할 이라면 누구라도, 가령 새로 들어오는 이들이라도 동의되어 질 수 있는 규범이기에 전체의지가 아니라 일반의지가 된다. 루소가 일반의지를 전체의지와 구별한 이유다.


루소에 의하면 이러한 일반의지는 항상 옳다. 일반의지는 다름 아닌 개인들이 각자에게 '옳음’과 함께 '좋음’으로 만장일치된 것이고 그렇기에 모두가 스스로 복종할 의사가 있기 때문이다. 복종할 의사가 없는 이는 공동선에 참여할 필요가 없으며, 동시에 그러한 공동선으로부터 이익을 향유할 권리도 없게 된다. 루소는 일반의지를 거부하는 이들에 대해 그런 이들은 '자유롭도록 강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루소의 이 주장은 자유주의자들로부터 심한 반발을 불러왔다. 하지만 루소의 이러한 주장에는 이유가 있다.


루소에 의하면 인간은 문명을 통해 자연에서 사회로 들어 온 존재다. 그러한 사회는 자연 안에서 자유롭던 인간을 지배와 피지배라는 억압의 사슬로 묶었다. 그렇다고 문명화된 인간은 사회를 떠나 다시 자연으로 돌아갈 수 없기에 우리는 사회 안에서 이 지배와 피지배를 정의로운 규칙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것이 제2의 자연인 문명화된 사회 안에서 인간이 자연에서 그러했던 것처럼 자유롭고 평등한 존재로 살아가는 길이 된다. 지배와 피지배의 정의로운 규칙. 루소는 그것을 만드는 원리를 인민의 일반의지에서 찾은 것이다. 그러한 루소의 일반의지는 군주와 같은 이나 특수한 지배계층의 일방적 명령이 아니다. 인민 모두가 모두를 지배하고 또 모두가 모두에게 복종하는 공화주의의 원리로 성립된다. 루소는 그러한 일반의지를 '법’이라고 표현했다. 따라서 법은 모두가 지켜야 하며 그것을 지키는 모두에게 이익을 주어야 한다. 만일 그 법이 특별한 이들의 자유와 이익을 위해 다른 이들의 자유와 이익을 훼손하는 것이라면 루소는 과감하게 그 법의 제정 권력을 타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면 의문이 든다. 도대체 '사회계약’이라는 것이 정말 있어서 그렇다는건가 말이다. 이제 이 의문에 답하는 여정을 시작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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