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9년, 비엔나에서 태어난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폰 하이에크는 학구적인 환경 속에서 어린 나날을 보냈습니다. 프리드리히와 그의 두 동생은 부모의 간섭 없이 산속을 자유롭게 산책하며 사색을 즐기곤 했어요. 권위 있는 식물학자였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하이에크는 식물학에 관심을 보이다가 진화론에도 흥미를 보이기 시작했고, 한동안은 정신분석학자가 되려는 꿈을 갖기도 했어요. 경제학은 사회주의자들의 경제 서적을 읽으며 처음 접했다고 합니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하이에크는 이탈리아 전선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포병중대 장교로 복무했어요. 전쟁의 폐허를 보며 신세계를 꿈꾸었던 다른 청년들과 마찬가지로 19세의 하이에크는 '페이비언 사회주의’에 강한 매력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빈곤 문제나 노동 문제, 전쟁 등의 문제를 사회주의가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했고, 하이에크도 그중 하나였어요. 전쟁의 참상을 보며 그는 경제학자가 되기로 다짐했습니다.
1918년, 하이에크는 19세의 나이로 비엔나 대학에 들어가서 철학과 법학, 경제학을 공부했어요. 프리드리히 폰 비저 등에게 가르침을 받으면서 하이에크는 경제적 자유주의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는 21세에는 법학에서, 23세에는 정치경제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어요. 1921년에는 오스트리아학파의 지도자 루드비히 폰 미제스가 근무하던 임시정부부처, 회계부에서 법률전문가로 일하게 되었습니다. 미제스와의 교분은 이때부터 시작되었죠. 미제스는 그의 학습능력과 풍부한 지식, 외국어 능력에 놀랐고 그는 미제스의 통찰력과 지식, 덕망에 감동받았어요. 미제스의 가르침으로 하이에크는 사회주의가 실현 불가능한 것이라는 점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1927년, 하이에크는 미제스와 함께 비엔나에서 경기순환연구소를 설립했습니다. 하이에크는 미국에 대공황이 오기 전, <화폐이론과 경기순환>을 출판했습니다. 책에서 그는 당시의 통설을 거부하고 경기순환과 화폐공급의 긴밀한 관계를 설명해 명성을 얻었어요. 1928년에는 런던에서 개최된 경제통계학 관련 회의에 초대되었는데, 여기서 하이에크는 당시 국제적인 명성을 떨치고 있던 케인스를 처음 만나게 되었습니다. 케인스는 하이에크와 이자율에 관해 격렬하고도 친밀한 토론을 했어요. 이 둘은 케인스가 1946년 작고하기 전까지 친구이자 학문적 적수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하이에크는 1929년 비엔나 대학에 강사로 취임했는데, 취임 강의에서 LSE의 신임 경제학 과장이었던 라이오넬 로빈스의 주목을 끌게 되었습니다. 이미 오스트리아학파의 저작에 친숙했던 로빈스는 하이에크가 당시 케인스를 숭배하고 있던 케임브리지 교수들의 적수가 될 만하다고 보았어요. 하이에크는 로빈스의 제안으로 런던에서 강의를 시작하게 되었고, 수많은 저작들을 남기게 됩니다. 당시 로빈스와 하이에크는 런던정경대를 경제학 토론의 중심지로 부상시켰고, 로널드 코스를 비롯한 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어요. 이처럼 하이에크는 경제학계에 데뷔했던 그날부터 이자율과 경기순환 문제에 대해 치열한 논쟁을 불러일으켜 온 인물이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