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세 피네라는 1950년 칠레 산티아고에서 태어났습니다. 주 UN 대사였던 아버지와 다양한 분야에서 종사하는 친척들 덕분에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자랐죠. 피네라는 칠레 카톨릭 대학에서 경제학을 공부했습니다. 자유주의 경제학으로 유명한 미국 시카고 대학과 교류했던 학교죠. 미국 하버드 유학시절, 피네라는 미국의 건국 이념인 자유주의 사상에 심취했고, 밀턴 프리드먼의 영향을 받아 사회보장제도의 민영화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칠레는 1970년 사회주의자 아옌데가 권력을 잡으면서 경제가 파탄 났어요. 물가가 급속히 상승했고 물건을 사려고 새벽부터 줄 서는 일이 허다했죠. 국민들의 불만은 이루 말할 수 없었어요. 1973년 육군참모총장이었던 피노체트가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았습니다. 그는 정치적으로는 정적들을 숙청하는 독재자였지만 경제적으로는 과감한 자유주의 정책을 실행해 칠레의 경제를 살리려고 애썼어요. 1974년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20대 피네라의 강연을 들은 피노체트는 그를 노동복지부 장관에 전격 발탁했습니다.
피네라는 비록 군사독재정권이었지만 경제가 발전해야 자유도 있다고 생각해서 자유시장경제를 추진하는 피노체트 정권에 협력했어요. 평소 사회보장제도의 민영화를 생각했던 피네라는 칠레 경제의 시한폭탄과도 같았던 공적연금제도의 개혁을 추진합니다. 1924년 칠레는 남반구 국가 최초로 '국가가 개인의 노후를 책임진다’’는 공적연금보험제도를 실시했죠. 하지만 1970년 연간 국민 소득의 18%를 연금으로 지출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어요. 더 심각한 것은 가난한 노동자는 소액의 연금을 받는 반면, 기득권이나 노조가 강력한 집단은 엄청난 특혜를 받는 것이었습니다.
피네라는 자유주의 원칙에 따라 국민들이 선택하는 연금제도를 만들었어요. 첫째, 공적연금을 민간회사들이 운영하는 사적연금으로 바꾸었어요. 둘째, 국민들은 연금수익률을 매일 체크하면서 자유롭게 회사를 이전할 수 있었어요. 셋째, 사용자측의 기여분을 폐지하고 근로자의 급여 10%만 원천징수했죠. 넷째, 은퇴희망 연도에 따라 연금급여 금액을 설정해 보험료를 조정하는 '맞춤식 설계’가 가능했어요. 다섯째, 퇴직 후 연금급여 지급방식도 선택할 수 있었고, 사망 시 잔여 기금은 상속도 가능했어요. 마지막으로 국가는 민간회사의 투자 분야와 포트폴리오 총 합계의 최고 한도 규모만을 규정하고, 운영 실적이 최저액에 미달할 때만 차액을 보상해 주는 것입니다.
기득권층, 소위 복지 전문가들, 노조 지도부, 연금공단 관련자들은 이런 연금제도는 역사상 없었다면서 거세게 반발했어요. 하지만 피네라는 역사적 사례가 없고 사람들이 반대한다 해도 원칙을 따라야 한다며 강력하게 설득했죠. 1981년 칠레는 세계 역사상 최초로 공적연금제도 개혁을 단행했습니다. 몇 개월이 지나지 않아 총 근로자의 80%가 새로운 연급제도에 가입했을 때, 피네라는 '국민에게 선택의 자유를 제공할 때 국민들이 어떤 선택을 하는지 보여 주는 살아 있는 증거’라며 감격했어요. 칠레의 연금개혁은 국가의 체제가 좌익이든 우익이든 중도이든 관계 없이 자유의 원칙에 입각하여 사회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사실을 여실히 증명했다는 평을 받고 있으며 많은 나라들에게 좋은 본보기가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