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치병 같았던 영국병을 치유한 것이 바로 #대처리즘 이었어요. 마가릿 대처 여사를 만나볼까요?
대처는 1925년 영국의 시골 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 신앙심이 깊었던 대처의 아버지는 비록 일찍 학교를 그만두었지만 성실하게 일하고 끊임없이 공부했어요. 대처는 어린 시절 아버지가 마을의 시의원과 시장 선거에 나갔을 때부터 정치활동을 시작했어요. 옥스퍼드 대학 시절에는 당시 급진적인 대학의 분위기와 반대되는 '옥스퍼드 보수주의 학생 연합회’ 회장을 맡아 연합회를 크게 키웠죠. 졸업 후, 연구원으로 일하면서도 지역 보수당 활동에 적극 참여하여 20대 초반부터 주목을 받았습니다. 1959년 34세에 국회의원으로 선출되자마자 차관으로 임명되었어요.
1970년대 영국은 과도한 물가 상승, 경기 침체, 과도한 복지 정책, 파업을 반복하는 노동조합 때문에 '영국병’에 시름했어요. 번번이 노동조합에 막혀 구조조정에 실패하고 오일쇼크까지 겹쳐 IMF 구조조정을 받으면서 영국인들은 패배주의에 빠졌죠. 그러나 강력한 노동조합은 더욱더 많은 것을 요구하면서 정부를 무력화 시켰어요. 1979년 강력한 리더십을 갈망하는 국민의 표로 총리가 된 대처는 1970년대 정책을 영국식 사회주의로 간주하고 강력한 대처리즘을 내세워 영국식 대중적 자본주의를 단행했어요.
첫 번째 개혁은 물가 상승을 잡기 위한 긴축재정이었습니다. 당시 정치인들은 표를 의식해서 선심성 복지에 돈을 퍼부었죠. 한 번 시작한 복지는 커져만 갔어요. 하지만 대처는 심지어 여당도 반대하는 긴축재정을 밀어붙였습니다. 그 결과, 물가 상승률이 낮아졌고, 복지 의존이 아닌 자립성을 고취시켰죠. 두 번째, 주요 산업의 공기업들을 민영화시켰어요. 공기업은 기업가 정신이 없어 세금을 낭비하고 혁신이 없다고 생각했어요. 또한 공공임대 주택을 저렴한 가격으로 서민들에게 불하하여, 서민들이 집을 소유할 수 있게 했어요. 세 번째, 자산을 활용할 수 있는 기업과 국민이 자유롭게 부를 축적할 수 있도록 감세정책을 실행했어요.
개혁의 정점은 가장 큰 걸림돌이었던 노동조합과의 결전이었습니다. 당시 노동조합은 이미 이전 정부를 무력화시킨 경험으로 기고만장했죠. 대처는 노조에게만 유리한 불합리한 법률을 개정했고, 석탄을 비롯한 대체 에너지를 준비했으며, 공권력 투입이 항상 가능하도록 조직화했어요. 가장 강력했던 석탄 노조가 파업하자 엄청난 물질적, 사회적, 인적 손실 및 피해가 발생했지만 대처는 결코 물러서지 않고, 법대로 공권력을 투입했죠. 파업 363일 만에 백기를 든 노조. 고질적인 영국병이 꺾이는 순간이었어요.
자유주의 및 자본주의 정책들을 강행했을 때, 대처는 때로 경제적, 사회적 상황이 악화되어 지지율이 낮아지는 위기도 맞았고, 격렬한 반대세력도 만나 고군분투해야 했죠. 하지만 항상 개인의 자유와 자립을 귀하게 여기는 보수주의 및 반사회주의 정신을 따라 결단했어요. 그리고 정치적 생명에 연연하지 않고 국민들을 설득하며 끈질기게 추진했어요. 그래서 '철의 여인’이라 불렸죠. 그리고 쓰러져 가는 영국을 다시 한번 일으켰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