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드리히 하이에크와의 인터뷰

도서명 프리드리히 하이에크와의 인터뷰
저 자 토머스 W. 해즐릿 (Reason편집장)
페이지수 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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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 소개

하이에크(Friedrich August von Hayek : 1899~1992) 교수는 오스트리아 태생, 1974년 노벨 경제학상 수상, 25권의 저서와 250편의 논문을 남긴 20세기 최고의 지성입니다. 제가 1977년 5월 로스앤젤레스에서 인터뷰할 당시 하이에크는 분명 낌새를 채고 있었습니다. 1930년대와 40년대, 하이에크는 세계에서 두 번째로 유명한 경제학자였으며 가장 유명했던 경제학자인 존 M.케인즈(John Maynard Keynes)의 지성적 스파링 파트너였습니다.


상세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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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정책의 기본적 문제에 대해서 벌인 당시 런던경제대학교 교수였던 하이에크와 캠브리지 대학교 교수였던 케인즈 간의 불꽃튀는 논쟁은 `고전경제학`과 새로 유행한 케인즈의 일반이론(1936년)을 앞세운 `거시경제학`과의 기억에 남을 일대 대결이었습니다.


케인즈학파는 학문적 주장을 사실상 휩쓸었습니다. 1945년 케인즈가 죽은 후, 하이에크와 그의 고전적 경기순환이론은 대중적인 견해에서 빠르게 퇴조되어갔습니다. 경제정책은 `수요관리`의 황금시대로 진입했고 경기순환이론과 하이에크는 경제이론 밖으로 사라져갔습니다. 그는 1950년 시카고 대학교 사회사상위원회(Committee on Social Thought)의 위원장으로 부임했고 프라이부르크 대학교(1962-1968)와 잘스부르크 대학교(1968-1977)에서 그의 경력을 마감했습니다. 그는 새로운 분야인 심리학(지각명령:The Sensory Order, 1952)과 정책학(자유헌법론:The Constitution of Liberty, 1960), 법률학(법, 입법 그리고 자유 1-3권:Law, Legislation & Liberty Volumes 1-3, 1973-1979)에서 주로 공헌했습니다.


그는 경제학의 방향을 명석하게 짚어냈습니다. 그의 케인즈에 대한 독설은 그가 겪었던 이론적 강연에 대한 모욕만은 아니었습니다. 유명한 `사회주의 예측 논쟁`은 오스트리아의 중앙계획에 대한 비평에 의해 시작되었습니다. 1920년대부터 1940년대까지 하이에크와 그와 동향인 루드비히 폰 미제스(Ludwig von Mises:1881-1973, 비엔나 대학교 교수, 하이에크의 스승)는 사회주의를 필연적으로 실패할 경제제도라고 주장했습니다. 개인적 동기와 개인적 이익을 추구하는 데서 힘을 가지는 자유시장만이 사회적 행동을 지성적으로 조화시키는 데 꼭 필요한 정보를 만들어낼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자유는 번영된 사회를 이루는 필수요소라는 것입니다. 하이에크가 쓴 이성적인 경제제도의 표현인 시장가격을 찬양한 세련된 논문이 1945년 `미국경제리뷰`의 출간에 기여하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기민한 사회주의 이론가들은 하이에크가 조심스럽게 표현한 정보문제에 대해서 거대한 컴퓨터에 의해 효율적으로 중앙계획의 설계가 가능하다며 동료들과 만족해했습니다.


학문적 토론의 장을 하나둘 잃는 것은 재능이 있는 사람에게는 최악의 재난이 아니었고 따라서 하이에크는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해마다 빛나는 연구결과들을 출판했습니다. 그러나 경제학계에서는 하이에크가 학문적으로 배척되고 있고 퇴보되고 있으며 그의 이론은 부적절한 성격으로 과학 잡지의 모든 양식있는 사람들로부터 반박되고 있다는 사실이 공공연한 비밀이었습니다.


그러나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20세기 후반 학문적 저술가들은 사실성의 재확인을 받게 되었습니다. 1960년대와 70년대, 2차대전 후의 번영은 케인즈 이론을 선호하던 여러 나라에서(주로 미국과 영국) 인플레이션의 악순환을 야기시켰습니다. 충격을 받은 학자들의 연구를 통해 많은 사례들이 엄격히 검증되어 완전고용의 개념은 버려졌고 케인즈학파의 사진은 선반 위에서 치워지게 되었습니다. 현실세계를 중재하고 있는 전통적인 치료방법, 정부재정의 초과지출과 소비를 장려하고 저축을 억제하는 정책의 결과는 `불건전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캠브리지, 하버드, 버클리, MIT학파들은 무너졌고, 1980년대에는 케인즈학파 이론이 모든 문제의 명백한 근원이라는 결론이 내려져 호된 질책을 받게 되었습니다. 갑자기 옛날의 고전적인 저축, 투자, 균형예산, 경쟁, 생산성 향상 방식이 폭넓게 대두되고 훌륭한 정부의 경제정책의 목표가 되었습니다. 그동안 케인즈의 정부재정 운용에 대한 처방이 허약한 경제를 살리는 마법의 만병통치약이라고 여기던 정치가들조차 케인즈 이론을 포기한다고 공표하게 되었습니다.


사회주의 체제 아래서 합리적 경제계획의 가능성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이제 우리는 그 실험을 다 했습니다. 제3세계는 이를 시도한 후, 소득수준이 급속도로 하락했고 결국 원시시대 수준으로 떨어졌습니다. 제2세계(공산권)는 거대한 경찰국가를 만들어 이를 시도했지만 공중분해되어버렸습니다.


1974년, 즉 30년 동안 경제학 전문가의 위치로부터 밀려나 있었던 하이에크가 갑작스럽게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하던 해는 서방세계에서 케인즈 이론이 퇴조되고 세계 도처에서 사회주의가 몰락해가기 시작하던 시기였습니다. 그는 갑자기 무능력자에서 정신적 지도자로 바뀌었고 정당화되었습니다. 1970년대 말, 즉 노동당, 민주당, 사회민주당(그들이 어땠는지 기억해 보십시오!)이 런던과 워싱턴, 그리고 본에서 아직 힘을 가지고 있었던 시기에, 하이에크의 선견지명은 이미 세계적 정치운동으로 떠오르고 있었습니다. 1980년대의 세계 정책의 냉엄한 흐름이 하이에크와의 인터뷰에서 조심스럽게 예견되고 있습니다. 그는 곧 아담 스미스 이후 가장 위대한 자본주의 철학자라고 불리는 것이 더 이상 불명예스러운 호칭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때로는 자신이 옳다는 것이 증명되기까지 오래 살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폰 하이에크(Friedrich August von Hayek)는 1899년에 태어나 1992년 3월 23일 독일의 프라이부르크에서 영면했습니다. 그는 케인즈나 마르크스보다 오래 살았습니다. 다행히 인류는 그의 사상을 소유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