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혁명의 발상지 영국에서는 정작 자동차 산업이 발달하지 못했다. 그 이유는 일자리 보호 때문이었다. 자동차가 발전하게 되면 기존의 마차 사업이 타격을 입을 것이고 이는 마부들의 일자리를 위협할 것이라는 여론이 확산됐다. 정치인들은 마부들의 일자리를 지키기 위해 규제를 만들었다. 바로 ‘적기조례’라 부르는 ‘붉은 깃발법(Red Flag Act)’이다.
1865년 만들어진 붉은 깃발법의 내용은 이렇다. 첫째, 1대의 자동차에 운전수·기관원·기수 3명의 운전수가 있어야 한다. 기수는 낮에 붉은 깃발을, 밤에 붉은 등을 들고 55m 앞에서 자동차를 선도해야 한다. 둘째, 최고 속도는 시내에서 시속 3.2km/h, 시외에서 시속 6.4km/h로 제한한다.
기수가 앞에서 마차를 타고 뒤에 자동차가 온다고 그 위험성을 알리기 위해 깃발을 흔들면서 가는 모습은 상상만 해도 웃음이 나올 풍경이다. 마차보다 천천히 가야 하는 자동차를 타라고 강제한 정치인들의 억지가 놀랍다.
당시 증기자동차의 주행가능속도가 시속 30km/h 이상이었다고 하니 철저히 마차를 보호하기 위한 대책이었다. 혁신이 일어나 산업의 패러다임이 바뀌면 이를 수용하고 따라야 하는 것이 정상이다. 하지만 기존사업을 보호하고 그 일자리를 지키려는 규제는 이익집단의 요구를 법으로 받아들인 것일 뿐이다. 자동차를 마차 시대의 기준으로 규제했으니 그 현실적 부작용은 컸다.
영국 의회는 1878년 개정법을 내놨다. 전방 18m 앞에서 알리라고 규제를 완화했다. 그러면서 말을 놀라게 하는 연기나 증기를 내뿜지 말라는 조항을 추가했다. 말과 사람의 안전을 위하고 환경까지 고려한 규제였다. 요즘 상용화된 전기차 수준을 요구한 것이라 환경친화적 규제라 할 수 있다. 안전과 환경을 앞세우는 것은 과거에도 규제의 명분으로 삼는데 효과적이었던 듯하다. 규제를 완화한다고 했지만, 사실은 자동차를 완전히 봉쇄한 것이다.
외국의 자동차들은 점차 편리해졌고 영국은 뒤처지고 불편한 현실을 더는 방치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결국 규제를 풀고 새로운 혁신 방식을 받아들였지만 시기를 놓친 뒤였다.
마부들이 일자리를 잃을 것을 염려해 만든 붉은 깃발법은 1896년 폐지된다. 더 이상 보호할 마부들의 이익이 없게 돼서야 법도 사라졌다. 남은 것은 영국에 없었다. 마부의 일자리도 사라지고 자동차 산업도 다른 나라를 뒤쫓아 가기에는 이미 늦었다.
영국은 최초로 자동차를 상용화한 나라였지만, 산업혁명의 핵심인 자동차 산업을 스스로 포기한 나라가 되고 말았다. 프랑스·독일·미국에서 자동차 산업은 꽃을 피웠고 영국은 점차 산업 쇠퇴의 길을 걸었다.
붉은 깃발법을 지지한 사람들은 일자리를 지키려는 좋은 의도였지만 이익만을 좇는 기업들 때문에 실패했다고 억울해 했을 것이다. 또 다른 나라들이 함께 붉은 깃발법을 실행했다면 급격히 몰아친 자동차로 인해 마무들의 일자리가 한순간 사라지는 일도 없었을 것이고 마부들의 일자리를 상당 기간 지키는 데 성공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누군가의 이익은 누군가의 손해라는 제로섬 사고방식에 빠져서는 열린 세상을 이해할 수 없다. 소비자들을 규제 안에 가두어 희생시키면서 자신들의 밥그릇을 지키려는 시도는 장기적으로 성공할 수 없다. 조만간 울타리는 무너지고 황폐해진 현실만 남게 된다.
혁신을 통해 산업을 선점하는 노력이 우선이다. 누군가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규제부터 만들겠다는 정치인들이 있다면 그 나라의 미래는 밝지 않다.
최승노 자유경제원 부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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