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통일의 주체: 동독주민
독일이 통일되기까지의 과정은 다음과 같은 세 단계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동독주민들의 저항이다.
동독주민들의 저항은 탈출과 월요데모(Montagsdemonstration)로 요약된다. 공산정권의 이중성과 서독에 비해 참담한 생활상을 체험해온 동독주민들은 소련과 주변국들의 변화를 보며 탈출을 감행하기 시작했다. 동베를린 서독 대표부에 진입해 서독행을 요구하는가 하면 체코나 폴란드 주재 서독대사관으로 탈출해 인산인해를 이룬 동독인들은 공산정권의 억압을 폭로하며 자유를 외쳐댔다.
헝가리 정부는 1989년 9월 11일 오스트리아로 탈출하려는 동독인을 위해 국경을 개방한다는 결정을 내렸고 서독정부는 탈출자 전원을 안전하게 서독으로 이주시켰다. 동독인들은 헝가리 정부의 국경개방 이후 10월말까지 채 두 달이 안되는 짧은 기간 동안 2만4천여명이 이 루트를 통해 서독에 안착했다. 그리고 이 사건은 베를린 장벽붕괴의 가장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둘째, 공산권력의 자정노력이다.
동독주민들의 지속적인 저항, 서독정부의 적극적인 보호, 그리고 국제사회의 개혁개방은 동독 공산당을 궁지에 몰아넣었다. 체코, 폴란드에 불어 닥친 개혁과 개방의 파고는 동독인에게 용기가 되었고 헝가리의 충격적인 국경개방은 동독 공산당의 마지막 자존심까지 뭉게 버렸다.
1989년 10월 7일 동독 건국 40주년 기념행사에 참석차 동베를린을 방문했던 고르바초프는 "Wer zu spat kommt, den bestraft das Leben" (인생은 늦게 동참하는 자를 벌할 것이다)라는 기념연설을 통해 호네커에게 개혁ㆍ개방의 필요성을 역설하기도 했다. 고르바초프의 예상은 적중했고 실제로 동독 건국 41주년은 독일통일 제1주년의 축제일이 되었다. 이렇듯 헝가리에 이어 고르바초프마저도 호네커에게 등을 돌리자 동독 사통당은 스스로 자정노력을 기울이게 되었다. 권력욕에 사로잡힌 호네커를 출당시키고 해외여행 자유화 조치를 취하는 등 주민들의 요구를 수용해 가기 시작했다. 1989년 11월 9일 베를린 장벽을 개방한 조치도 동독 공산당이 스스로 결정한 사항이었다.
셋째, 동독사회의 능동적 결정이다.
호네커의 실권과 베를린 장벽붕괴는 동독 내 시민사회에도 커다란 영향력을 끼쳤다. 다양한 시민운동이 전개되기 시작했고 공산당에 대항하는 정당도 만들어졌다. 시민단체들은 원탁회의를 구성해 동독의 미래를 위해 시민들의 의지를 결집해 나갔다. 독일통일은 바로 이런 시민운동의 결과이다. 동독주민이 원했고 서독정부가 수용한 결과일 뿐이다.
이런 일련의 과정 속에서 동독의 인민의회는 1990년 8월 23일 임시회의를 열어 10월 3일을 기해 서독의 기본법(헌법)의 효력범위로 편입(Beitritt)된다고 의결했다.
편입(Eintritt)과 흡수(Absorption)
독일통일을 흡수(Absorption)라고 부르게 된 것은 통일 후 일정시간이 지나서였다. 통일로 인한 부작용과 혼란이 예상외로 크게 나타나게 되자 언론은 특종 경쟁이라도 하듯 이를 들춰내 보도하기 시작했다. 흡수라는 개념의 등장과 함께 동서독 통일이 잘못되었다는 시각에 초점이 맞추어 지기 시작했다. 구 동독 공산권력의 불만이 터져 나왔고 비판적 좌파 지식인들의 날카로운 비판이 이어졌다. 강자인 서독이 약자인 동독을 남김없이 흡수해 지배해 버렸다는 시각이다.
통일방안을 둘러싸고도 여야 간 논쟁은 불가피했다. 기독통합당(CDU/CSU)을 중심으로 한 정부 여당이 기본법 23조를 근거로 한 방안을 주장했던 반면, 야당이었던 사민당(SPD)은 당내에서도 146조에 의한 통일을 주장했다.
23조가 기본법의 유효범위를 규정하는 조항으로 서독연방에 소속되지 않는 독일영토 내의 州들은 연방에 편입됨과 동시에 법의 관할 하에 놓인다는 조항으로 동독이 서독연방체제로 편입됨과 동시에 기본법의 효력범위에 들어가게 된다는 통일방안이다. 동독의 인민의회는 스스로 23조에 따라 서독연방에 편입할 것을 결의한 바 있다. 반대로 146조는 기본법의 효력 상실을 규정하는 조항으로 독일국민이 새로운 헌법을 채택할 경우 기존의 기본법은 자동적으로 무효가 된다는 내용이다. 즉 동서독은 통일헌법을 확정해 이 헌법에 따라 통일을 추진한다는 내용이었다.
이 두 방안을 놓고 독일사회에는 치열한 논쟁이 오갔다. 하지만 독일민족은 23조에 의한 통일을 원했다. 서독에 자유와 풍요로움을 가져다 준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체제는 선택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며 23조의 대안으로서 146조를 근거로 한 통일은 통일의 기회를 무산시키고 오히려 더 큰 사회적 갈등과 반목을 야기할 수 있다는 판단이었다.
결국 독일사회는 기본법 23조에 따라 동독을 5개주로 나누고 서독연방체제로 편입시켰다. 하지만 통일된 사회는 예상보다 훨씬 심각한 부작용이 드러났다. 실업자가 폭증하고 과다한 재정의 동독이전으로 국민들의 고통이 극에 달했다. 언론들은 특종경쟁이라도 하듯 혼란과 부작용을 다투어 보도했고 서독으로의 편입을 반대했던 구 공산세력과 일부 좌파세력들은 정부의 실정을 비판하기 시작했다. 이 와중에 흡수라는 개념이 생겨났고 독일통일을 흡수통일이라며 동독인의 열등감을 자극했다. 동독 공산당 사통당도 이런 상황 속에서 그 명맥을 유지하게 되었고 민사당(PDS)으로 변신할 수 있었다. 과거의 공산당이 아닌 새로운 당, 즉 민주적 사회주의를 표방하며 정부와 여당의 정책의 오류들을 물고 늘어졌다.
독일통일에 대한 우리사회의 일방적이고 부정적인 인식은 이런 언론의 특성 속에서 이해할 수 있다.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근다”는 속담처럼 독일통일과 관련해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주로 구더기에 관한 것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비판적이고 예외적인 것에 집착하는 언론의 특성을 이해한다면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하지만 독일의 현장 속에는 구더기 보다 훨씬 가치를 지니고 있는 장맛 이야기가 기대이상으로 풍성하다. 이것은 독일통일 15주년을 맞아 독일의 공영방송 ZDF가 조사한 여론 조사에서도 잘 드러난다. 서독인의 82%, 동독인의 91%가 동서독 통일에 대해 긍정적인 답변을 내놓았다.
통일과 관련해 우리 모두에게 던져지는 질문은 “왜, 통일인가?”라는 근본적인 물음이다. 더 이상 굶어죽는 동포들이 없도록, 탈북자가 없도록, 자유롭게 여행하고 부도덕한 권력을 비판할 수도 있도록, 북한동포도 정치지도자를 스스로 결정할 수 있도록, 정치범으로 몰려 수용소에 갇히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 등등이다. 즉 통일을 이루어 남북한 7천만 민족 전체가 평화롭고 풍요롭게 살기 위해서다.
동독인이 서독연방체제로의 편입을 결정한 이유는 간단했다. 서독사회가 이루어낸 경제적 풍요로움과 정치적 자유 그리고 사회적 평안을 공유하기 싶었기 때문이었다.
민족공조의 허구
우리나라 통일정책의 기조는 민족공조에 뿌리를 두고 있다. 외세의 영향을 배제하고 민족끼리 통일을 이루자는 취지이다. 하지만 붕어빵에 붕어가 없듯이 민족공조에 민족은 보이지 않는다. 붕어 대신에 세습독재자가 가부좌를 틀고 있다.
권력에 중독된 독재자는 주민은 굶어죽어도 권력은 포기 못한다. 핵을 개발하고 탈북자를 방치하는 것도 권력욕 때문이다. 이제 그 피해는 한반도를 넘어 국제사회로 까지 확산되고 있다. 미국, 일본, 독일이 대북인권결의안을 채택한 데 이어 최근에는 유엔총회에서도 대북인권결의안을 가결해 김정일 정권의 무자비한 박해와 인권탄압에 제동을 걸 태세다. 또한 북핵에 대한 국제사회의 우려도 심화되고 있다. 6자회담에 이어 PSI라고 하는 대량살상무기 확산방지를 위한 국제공조체제도 가동되고 있다.
그동안 우리나라는 민족공조라는 명분을 내세워 여러 사안에 대해 국제공조를 회피해왔다. 유엔인권위원회의 대북결의안에도 기권과 불참을 반복해왔고 유엔총회의 결의안에도 기권했다. 한미동맹에 대해서도 이혼만 하지 않았지 남남과 같다는 우려의 목소리도 들릴 정도다.
통일한국은 국제사회와의 협력이 절대적이다. 통일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통일한국의 미래가 더욱 중요하기 때문이다. 통일된 한국이 어떻게 2천2백만 북한주민과 더불어 경제를 일으키고 이루고 국제경쟁력을 확보할 것인가가 관건이다.
낙후할 대로 낙후한 북한경제를 재건해내느냐, 아니냐에 따라 우리의 미래는 축복이 될 수도 있고 고통이 될 수도 있다. 굳이 우리가 국제공조를 강조하는 것도 이렇듯 통일 이후를 염두에 둔 것이다. 북한경제 재건의 핵심은 얼마나 많은 투자를 유치해 고용을 창출하고 산업을 일으키느냐에 달려있다. 물론 우리 힘으로 북한경제를 일으켜 세워 막강한 통일한국을 이룰 수 있다면 굳이 아쉬운 소리하며 한미공조니 국제공조니 내세울 필요도 없다. 미래 통일한국을 생각하니 한미동맹도 중요하고 한일관계도 방치할 수 없다. 또한 중국과 러시아와도 선린우호관계를 유지해야 한다.
독일통일은 우리에게 너무나 많은 것들을 교훈하고 있다. 적어도 통일은 국제사회의 협력과 공조가 절대적이다. 독일은 우리와 다르다는 막연한 주장으로 얻을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북한을 홍콩이나 싱가포르와 같은 전 세계 투자자들의 낙원으로 만든다는 구상도 민족의 힘만으로는 역부족이다. 행여 일부 정치인들의 정치적 의도와 대중인기영합주의 때문에 통일한국의 미래를 담보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맺는 말
독일의 통일은 동독인이 선택하고 서독인이 응답한 것이다. 동독인은 서독의 자유와 인권 그리고 풍요로움을 원했고 서독인은 통일이라는 역사적 과제를 풀어냈다. 이 일만으로도 독일통일은 역사적 업적이요 행복이다.
독일통일의 최대 피해자는 구 동독 공산권력들이다. 인민 위에 군림하며 절대권력을 누리던 자들이 평범한 시민으로 돌아가 구구한 연금을 타며 생활하고 있다. 동독주민들은 그들에 대한 가혹한 처벌을 요구했지만 민주주의 사회의 법정은 그들로부터 권력만을 압수했다.
독일통일의 또 하나의 피해자는 서독주민들이다. 경제적으로 빈곤한 1천8백만 동독인을 품고 피폐한 동독경제를 재건해야 하기 때문이다. 통일세를 부담하고 실업자, 노약자, 과부, 고아 등 사회적 약자를 서독의 사회보장제도로 흡수해 그 비용을 부담하고 있다. 해외로 여름휴가를 떠나던 서독인들이 여행지를 동독으로 바꾸고 전기, 수도까지도 절약해 동독인들을 돕고 있다. 이런 가운데 서독의 사회적 약자들의 불만도 커지고 있다.
소수이긴 하지만 좌파적 지식인들도 통일의 피해자이다. 사회주의의 최후 승리를 신봉하고 있는 일부 학자나 지식인들은 소련, 동유럽 및 동독의 붕괴를 수용하려 하지 않는다. 진정한 사회주의 체제가 아니었기 때문에 붕괴했다고 주장하며 결국 사회주의가 승리할 것이라고 믿는다. 독일통일을 흡수통일이라는 이름으로 폄하하고 통일 이후 정책적 오류와 시행착오에 초점을 맞추어 지도자들을 비난하고 있다.
이런 좌파적 지식인들과 구 동독의 엘리트 공산권력은 구체적인 대안은 제시하지 못한 채 통일 이후 추진된 정책들의 잘못된 것들만 드러내 알리는데 혈안이 되어있다. 혹 이 과정에서 정치자금과 같은 호재나 서독인의 고압적인 자세를 발견하기라도 하면 난리다. 동독 공산당의 후신인 민사당(PDS)의 득표전략이기도 하다.
하지만 독일통일은 20세기 최대의 사건이며 독일민족이 이루어낸 역사적 과업임을 누구도 부인하지 않는다. 무혈혁명을 통해 1천8백만 동독인들에게 자유와 경제적 풍요로움 그리고 새로운 기회와 희망을 주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위대하다. 이런 위대한 통일을 단순히 흡수통일이라며 폄하하는 교만은 사라져야 한다. 통일의 진면목을 겸손하게 배우고 어떤 시행착오와 실수를 범했는지 우리의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독일통일은 우리에게 너무도 귀중한 모델이다. 통일의 과정, 주변국들의 태도, 통일을 둘러싼 국제적 갈등과 마찰, 통일의 후유증을 치유해가는 독일의 노력 등 우리가 배워야할 것들이 너무도 많다.
대북대화는 섣부른 통일을 주제로 하기보다는 분단으로 인해 발생하는 문제점을 해결하는 데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현재 북한의 권력은 통일을 논할 자격이 없다. 통일은 7천만 민족의 미래를 좌우하는 중요한 사안이기 때문이다. 물론 현재 북한을 통치하는 실세를 무시할 수만은 없다. 어떤 형태로든 만나 대화하고 문제를 하나하나 풀어나가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분단으로 야기된 고통과 문제에 대해 대화하고 해결책을 만들어야 한다. 이산가족, 납북자, 탈북자, 식량난과 같은 문제들이 논의되어야 하고 이를 위해 돈도 주고 비료도 주고, 쌀도 주고 정상회담도 해야 마땅하다. 통일은 이런 과정 속에서 자연스럽게 논의되는 것이지 가공의 이야기가 아니다.
박상봉 / 독일통일정보연구소(IUED) 대표, 서울장신대학교 외래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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