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APEC의 출범
1993년 아시아-태평양 경제협력체(APEC: Asia-Pacific Economic Cooperation) 정상회의가 미국 시애틀에서 개최된 이후 벌써 12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회의가 매년 개최되었으니 금번 부산 회합은 13번째인 셈이다. APEC의 나이를 들먹이는 이유는 APEC에 대한 비판 때문이다. 즉 그동안 한 일이 무어냐는 것이다. APEC에 대한 혹평을 소개하면 다양하지만, '공허한 말잔치,’ '정상들의 어설픈 전통 의상 쇼’ 등이 가장 신랄한 것이 아닌가 싶다. 하지만 그러한 비판은 APEC의 전략적 배경에 대한 몰이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APEC을 단순히 경제적인 시각으로 보았을 때 그렇다는 말이다.
APEC 정상회의를 주도한 국가는 미국이었다. 한국과 호주가 앞장서 APEC을 조직하고 이를 활성화시키려고 노력하던 초기 시절, 아태지역 최강국인 미국과 일본은 APEC에 대해 미온적이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상황은 급변했는데, 1993년 미국 주도로 APEC이 장관급 회담에서 정상회의로 돌연 승격되었던 것이다. 초강대국 미국은 세계를 대상으로 그들의 대외관계를 설정한다. 그렇다면 APEC에 대한 미국의 돌연한 관심 표명이 단순히 경제적 이해에서 비롯된 것이었을까? 역사는 강대국들의 대외정책이 항시 전략적 함의를 내포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미국의 APEC에 대한 利害도 예외일 수는 없는데, 아래의 설명을 통해 그러한 사실이 보다 분명해진다.
2. APEC과 전략적 利害
APEC을 알기 위해서는 먼저 지역주의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한다. 지역주의는 세계무역기구(WTO)의 전신인 관세와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 출범 시부터 다루어진 문제였다. 유럽연합(EU: European Union)의 초기 모델인 유럽철강공동체(ECSC: European Coal and Steel Community)라는 지역주의를 GATT가 예외적으로 인정한 바 있기 때문이다. 냉전 초기에는 공산주의에 대항하는 서유럽의 단합이 서방의 핵심 이해였음으로 미국도 그 정도의 예외는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다. 유럽통합이 몰고 올 파장은 염두에도 없었다.
그러나 1960년대 들어 통합에 가시적인 성과가 도출되자 미국의 태도는 변하기 시작한다. 1971년 닉슨 대통령의 대의회 보고서는 유럽의 단합된 행동이 미국의 이해에 反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적시하고 있다. 아마 미국의 대유럽 경계심이 공식적으로 처음 표출된 사례일 것이다. 미국은 유럽의 단합이 경제적 공동 이해 창출을 넘어 대외적 영향력의 확장으로 이어질 가능성을 우려했다. 유럽이 경제통합을 디딤돌로 삼아 국제무대에서 하나의 목소리를 내게 되면 정치적 영향력의 증대 또한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 되기 때문이다.
이후 미국은 유럽의 집단 움직임을 주시하여 왔는데, 1980년대 통합이 구체화되자 과거와는 달리 적극적인 대응에 나서게 된다. 유럽통합의 전기로 간주되는 유럽단일의정서(European Single Act)가 1985년 12월 채택되자, 다음 해 미국은 캐나다와 자유무역협정(FTA) 교섭을 시작한다. 얼마나 서둘렀으면, 교섭 개시 후 불과 1년여 후인 1987년 10월 미-캐나다 FTA가 가조인되었다. 경제통합의 완성을 의미하는 마스트리히트(Maastricht) 조약이 1992년 2월 조인되자, 같은 해 12월 미국, 캐나다 그리고 멕시코를 한데 묶는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 North American Free Trade Agreement)이 체결되었다. 이쯤 되면 미국이 얼마나 신속히 대응했는지를 알 수 있다.
북미 경제통합이 실현되자 미국의 관심은 세계경제의 또 다른 중심축인 동아시아로 쏠릴 수밖에 없었다. 유럽통합이 동아시아에도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시기적으로 유럽 통합이 가시권에 들어온 1990년 2월 말레이시아의 마하티르(Mahathir) 수상이 동아시아만의 지역주의인 동아시아경제협력체(EAEC: East Asian Economic Caucus)을 제안한 것은 새로운 움직임의 분명한 징후였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동아시아에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미국이 배제된 사실이었다. 결국 미국이 반대하고 역내 경제강국인 한국과 일본이 미온적인 태도를 취하자 EAEC는 성공할 수 없었다.
미국의 반대는 전략적으로 다음의 계산에 기초하고 있다. 세계 경제의 3대 중심축인 동아시아 국가들만의 움직임이 유럽과 같이 성공하는 경우 이는 곧 동아시아에 대한 미국 영향력의 감소를 의미한다. 더욱 심각한 것은 그것이 미국의 세계패권을 부식시킬 수도 있다는 사실이었다. 나아가 동아시아에 대한 유럽의 침투가 있는 경우 미국의 기득권은 어떤 형태로든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결국 APEC 정상회의는 그러한 고민의 산물이었던 셈이다.
우선 동아시아 국가들을 EAEC보다 큰 규모의 지역체에 묶어둠으로써 미국이 배제된 동아시아만의 지역주의를 막는 수단이 창출될 수 있었고, 나아가 APEC을 통해 아태지역, 특히 전략 요충지인 동아시아가 미국의 영향권에 있다는 사실을 유럽에 알리는 효과도 기대할 수 있었다. 통합에 자신이 붙자, 유럽은 1993년 7월 “유럽연합의 새로운 아시아 전략”이라는 대담한 첫 공동 외교전략 보고서를 발표하게 된다. 통합유럽의 첫 외교공략 대상이 동아시아이고, 경제는 물론 안보분야에서도 양 대륙의 협력이 자신들의 핵심 이해임을 유럽은 감추려하지 않았다. 아무튼 같은 해 12월 미국의 주도로 APEC 첫 정상회의가 미국 시애틀 옆의 블레이크 섬(Blake Island)에서 열린 점은 당시 유럽의 야심이 미국을 자극한 사실을 부인할 수 없게 만든다.
3. APEC의 전략적 운용
동아시아 외환위기의 극복이라는 명분하에 아시아통화기금(AMF: Asain Monetary Fund)의 창설이라는 또 다른 형태의 지역주의 움직임이 없었던 것은 아니나, APEC 정상회의 출범 이후 동아시아 지역주의는 사실상 수면 밑으로 들어가게 된다. 반면 유럽의 동아시아 공략은 결실을 맺어 1996년 ASEM(Asia-Europe Meeting)이 성사되었다. 격년제로 정상회담이 개최되어 왔으나 현재까지 협력의 가시적인 성과가 도출된 적은 없다. 결국 미국이 APEC을 통해 추구했던 전략적 이해는 이미 상당부분 충족된 셈이다.
따라서 미국은 현재의 APEC 수준에 만족하고 있다는 추론이 가능해진다. 다시 말해 APEC이라는 집단 모임을 지속적으로 유지하며 한 다리 걸치는 것으로 족한 것이다. 그렇다면 논리상 미국이 APEC을 또 다른 방향으로 움직일 가능성은 크게 보아 두 가지 경우 이외에는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즉 동아시아 지역주의가 다시 불붙거나, 유럽의 동아시아 공략에 가시적인 성과가 도출되면 사정이 달라질 것이다. 최근 통합헌법 제정의 실패로 어려움을 다시 겪고 있는 유럽, 그리고 지역주의 움직임이 살아날 기미를 보이고 있지 않는 동아시아를 고려하면, 현 상황에서 미국이 APEC을 또 다른 방향으로 적극 활용할 동인은 사실상 없는 셈이다.
미국의 그러한 이해는 APEC의 핵심 운영원칙에서도 잘 드러난다. APEC은 여타 지역주의와는 달리 이른바 열린 지역주의(open regionalism)를 표방하고 있다. 흥미롭게도 이 신조어는 논리상 불가능한 가정에 기초하고 있다. '지역주의’와 '열린’이라는 용어는 논리적으로 병립이 불가능하기(terminological incompatibility) 때문이다. 지역주의는 대외적으로 배타성을 그 생명으로 한다. 따라서 대외적으로 개방적이라면 그런 것은 지역주의가 될 수 없다. APEC 내에서 무역자유화와 같은 구체적 과실이 생성되는 경우 이를 역외 국가들에 적용하는 것은 회원국들의 자유라는 것이 열린 지역주의의 구체적인 내용인데, 그렇다면 무슨 이유로 역내의 경제적 과실을 역외 국가들에 무료로 제공할 가능성을 열어두느냐는 비판이 가능해진다. 나아가 APEC 회원국들보다 훨씬 잘사는 서유럽 국가들이 그렇게 하지 않는데 왜 아태지역 국가들이 그런 일을 솔선해야 하는가라는 비아냥 또한 피할 수 없다.
여기서 미국의 의중을 짚어 볼 필요가 있다. APEC이 EU나 NAFTA와 같이 배타적인 지역주의로 발전하는 경우 세계경제는 불록화된다. 그렇게 되면 WTO는 힘을 잃게 될 것이고, 경제블록에 기초한 '너 죽기식’의 제로섬 경쟁이 강대국 간에 치열하게 전개될 것이다. 따라서 현 수준의 APEC만으로도 이미 이해를 충족시킨 미국의 입장에서 격랑을 일으킬 필요는 없는 것이다. 파괴력이 있는 카드는 과거 EU의 탄생과 같이 미국의 이해에 반하는 또 다른 큰 흐름이 향후 조성되는 경우를 대비해 남겨두는 것이 유리하다는 전략적 계산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APEC의 의사결정 방식 또한 EU의 질적 다수결과는 달리, 자발적 전원합의제를 원칙으로 하고 있다. 그러므로 APEC에서의 의사결정은 더디고, 협력의 성과 또한 부진할 수밖에 없다. 결국 이 모든 것이 상당 부분 전략적 판단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4. 부산 APEC 회의
2005년 11월 19일에 끝난 부산 APEC 회의에서 합의된 내용은 APEC의 전략적 배경과 그 기본 성격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우선 과거 APEC 회의의 최고 업적으로 꼽히는 이른바 보고르 목표(1994년 인도네시아 회의)를 달성하기 위한 부산 로드맵이 채택되었다. 선진국은 2010년, 개도국은 2020년까지 무역ㆍ투자를 자유화시킨다는 약속을 구체적으로 실행하자는 것이다. 별도로 채택된 WTO DDA협상 특별 선언은 이미 약속된 협상 시한을 넘긴 DDA 협상이 2006년까지는 완료되어야 한다고 촉구하고 있다. 또한 DDA 협상의 주요 장애물로 간주되어 온 선진국들의 농업 수출보조금을 2010년까지 폐지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흥미로운 점은 이 요구가 사실상 유럽을 겨냥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물론 DDA의 진전이라는 명목하에 이루어진 것이지만 APEC이 공식적으로 유럽과 대립각을 세운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닌가 싶다. 유럽의 대응이 주목된다. 하지만 상기의 합의들은 강제적이기 보다는 선언적 의미가 강하다. 금번 부산 회의도 경제협력의 획기적인 진전을 애초부터 어렵게 하는 APEC의 기본 성격을 상당 부분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 셈이다. 그렇지만 APEC의 부진한 성과에 대한 비판과 APEC의 전략적 배경은 전혀 별개의 문제이다. 왜냐하면 APEC은 향후에도 지속될 것이고, 어젠가 전략적 이해가 맞아 떨어지면 거대한 영향권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한국이 APEC의 주도국이라는 사실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APEC의 전략적 배경을 이해하고 국제정치 및 경제의 큰 흐름을 예의 주시하면서 APEC의 주도권을 어느 정도 쥔 채 적절한 외교 보조를 맞추면 되는 것이다.
김기수/ 세종연구소 수석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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