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의 미래를 불안정하게 하는 요소는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북한 핵과 더불어 광범위하고 조직적으로 자행되고 있는 북한의 인권침해이고 다른 하나는 한반도를 둘러싼 주변국들에 의해 왜곡되고 있는 역사적 실체이다.
오늘날 이런 한반도의 상황에 하나의 기준을 마련해주고 있는 사건이 있다. 지난 5월 10일 독일의 베를린에 나치 대학살 홀로코스트(Holocaust) 추모관이 건립되어 제막식이 열린 사건이다. 나치 몰락 60년이 지나고 있는 이 시점에 건립된 추모관은 인권에 대한 망각과 역사왜곡이 결코 당사국은 물론이고 주변국들의 이해조정과 인류 평화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강력하게 시사하고 있다.
홀로코스트 추모관 건립은 지난 1989년 한 시민단체에 의해 제안되었고 오랜 논쟁을 거쳐 10년이 지난 1999년 연방의회에서 의결됐다. 국제인권단체들은 홀로코스트 추모관 설립이 연방의회에서 의결된 것을 기념하고 추모관 건립을 축하하는 자리에서 “반세기 나치의 만행을 막지 못한 것이 인류의 수치였다. 이제 이 나치의 범죄를 규탄하는 이 자리에 오늘날 현존하는 나치에 버금가는 북한 김정일의 인권유린에 침묵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기도 했다.
통일과 인권
독일은 통일 후 여러 통일 후유증을 겪고 있다. 급작스런 통일로 충분한 준비 없이 즉흥적인 정책들이 만들어낸 정책적 오류로 인한 것도 있지만 독일민족의 역사 속에 흐르는 배타적 민족성에 기인한 것도 있다. 네오 나치가 그것인데 통일 후 호이어스베르더(Hoyerswerder), 로슈톡(Rostock) 등 작센을 중심으로 한 동독지역으로 부터 강하게 되살아나는 스킨헤즈들의 등장이다.
되살아나는 네오나치의 망령에 독일은 다시 한 번 분명하게 “No"를 외치고 있다. 과거 나치 비밀경찰 게슈타포(Gestapo) 건물이 있던 그 자리에 추모관을 세우고 독일 역사에 다시는 나치와 같은 치욕의 역사가 반복되지 않기를 염원하고 있다.
이것은 그동안 일부 극우파들로 흘러나왔던 주장에 쐐기를 박는 것이기도 하다. 이들은 이제 나치가 멸망한 지 반세기가 흘렀고 독일은 이미 반세기 동안 나치 범죄에 대한 충분한 대가를 치렀다고 하는 주장을 암암리에 독일사회에 전파해왔다. 분단이야말로 나치 범죄에 대한 죄값이었고 이제 그 분단도 끝났으니 이제 더 이상 나치의 과거역사에 볼모가 되지 말자는 논리였다.
이와 같은 혼돈의 시대에 세워진 홀로코스트 추모관은 무엇보다도 인권은 타협의 대상이 아님을 시사하고 있고 인권을 방치한 통일은 물거품임을 대변하고 있다.
통일후유증과 네오나치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며 찾아온 독일통일은 독일사회에 뜻하지 않는 문제에 어려움을 겪었다. 그것은 독일민족 속에 뿌리박혀 있는 배타성으로 당시 동독지역에 거주하고 있던 베트남, 폴란드, 유고, 루마니아 그리고 아프리카로부터 온 외국인들에 대한 테러와 폭력이었다.
독일통일은 궁핍 속에 살아온 동독인들에게 외국인에 대한 증오심을 불러일으켰다. 서독에 대한 상대적 박탈감과 침체된 동독경제로 인한 불만을 외국인의 탓으로 돌렸다. 동독의 작센 주는 통일 후 네오나치의 온상이 되었고 작센 주에 속한 호이어스베르더에서는 1991년 9월 20일 나치 추종자들이 외국인 숙소에 반대해 폭동을 일으켰다. 23명의 부상자가 발생하고 83명이 체포되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반 외국인 정서는 극에 달하게 되었다. 동독 북부지역에 위치한 메클렌부르그 포어폼머른 주 수도 로슈톡에서는 네오나치 청년들이 외국인 망명자 숙소에 방화를 하는 사건이 발생했으나 경찰의 소극적인 진압과 주민들의 소리 없는 응원으로 통일 후 독일사회에 커다란 문제를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이 외에도 거리에서 루마니아 청년이 테러로 사망하는 일도 있었고 니더작센 주의 북스후데라는 도시에서는 네오나치 2명이 히틀러를 욕했다는 이유로 한 남자를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동독 남부에 위치한 튀링겐 주에서도 일자리를 찾아왔던 폴란드인 등이 살해되는 일이 있었다.
독일의 지식인 사회가 이에 대해 적극 대응하기 시작했고 뮌헨을 중심으로 과거 히틀러 시절 지하운동이었던 흰장미운동을 펼쳐나가며 독일사회의 민족주의를 경고하고 나섰고 이제 홀로코스트 추모관이 통일독일의 수도 베를린 중앙에 건립되게 된 것이다. 통일을 이루었으나 인류의 보편적 가치인 인권을 방치하는 한 통일된 독일은 국제사회로 부터 외면당하고 선진 리더국가로서의 위치를 상실하게 된다는 우려를 불식시키려는 시민사회의 노력이었다.
국제사회와 남북한 고립
북한의 인권문제에 가장 민감한 나라는 유럽 국가들이다. 과거 나치의 역사를 통해 인권의 중요성을 현실로 경험하며 인권을 지키지 못한 인류의 참담한 모습을 직접 눈으로 경험했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사회사평론 편집장인 피에르 리굴로 씨는 1999년 3월 10일 유럽의 지식인 21명과 함께 "북한의 기아는 김정일을 비롯한 지도층의 책임“이라며 북한 인권에 대한 공동선언을 주도했다. 강철환 씨의 북한 수용소 10년간의 생활을 수기로 쓴 '평양의 수족관’도 리굴로 씨의 도움으로 영문번역 출판되었고 미국에서 스테디 셀러가 되기도 했다.
지난 99년에 북한에 대한 문외한이었던 노베르트 폴러첸 씨는 북한의 참상을 전해 듣고 방북길에 올랐다. 독일의 구호단체 캅 아나무어(Cap Anamur)의 일원으로 질병과 기아로 고통 받는 북한인들을 돕겠다는 것이 유일한 방북 이유였다. 하지만 이제 그는 북한인권운동가로 변신해 2000년 12월 31일 북한에서 쫓겨난 후부터 북한의 인권개선을 위해 한국에 머물며 활동하고 있다.
그가 구호단체의 의사에서 북한인권운동가로 변신한 이유는 북한에서 체험한 북한사회의 현실 때문이다. 북한의 화상환자에게 자신의 허벅지 살을 떼어서 이식해 준 공로를 인정받아 북한으로부터 외국인으로서 최초의 영웅훈장을 받은 폴러첸은 그 덕분에 북한의 구석구석을 찾아다니며 북한의 실상을 정확히 알게 되었다. 그리고 방북 첫해 7월 8일 김일성의 사망 5주기의 광경은 하나의 충격이었다. 그곳에서 그는 상상치도 못했던 독일의 메르체데스 벤츠를 수백 대를 목격했다. 대부분이 북한 고위 지도층들이 타고 왔던 차들이었고 폴러첸의 관심을 북한의 실상으로 불러일으켰다.
이제 그는 북한인들은 나치에 버금가는 독재 권력에 아무런 저항도 못하고 공개총살 당하며 굶주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북한사람들은 인권의 사각지대에 놓여있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구호활동이 아니라 김정일 독재 권력의 만행을 온 세상에 알려야 한다고 믿고 있다. 그리고 직접 북한주민을 구하기 위해 몸으로 투쟁하고 있다. 그는 과거 나치의 역사 속에서 배운 것은 인권은 침묵으로 결코 지켜지지 않는다는 사실이라고 말하고 있다.
나치의 만행에 타협하고 낙관만 하고 있던 유럽인이 그로 인해 치른 대가가 너무 컸던 것이다. 유럽인들은 이제 더 이상 인권문제를 방관할 수 없으며 인류의 문제로 인식하게 된 것이다. 유엔인권위원회가 벌써 3년째 유럽 국가들의 주도로 북한 인권문제를 거론하고 있으며 대북결의안을 채택하고 있는 것도 이런 이유에 기인하고 있다.
이런 국제사회의 움직임에 남북한 모두 고립되어 있다. 핵을 개발해 독재체제를 공고히 하는 한편 인민들의 굶주림과 고통에는 무관심한 북한이 국제사회로부터 고립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남한도 스스로 왕따를 자처하고 있다.
해마다 열리는 제네바 유엔인권위원회에서 보여주는 외교부나 일부 시민단체들의 행태가 너무도 국제사회의 가치와 동떨어져 있다. 그들은 지난 4년간 국제사회의 북한인권 대북결의안 채택을 방해하는 일에 앞장 서왔다. 첫해 우리 외교부의 역할은 대북인권결의안 상정을 막는 데 노력해왔고 2003년도에는 아예 인권위원회 표결에 불참했다. 그리고 작년과 올해에는 대북결의안에 참석은 했으나 기권표를 던지고 말았다.
국제사회가 인권이야말로 인류 보편적 가치이고 어떤 정치적 명분으로도 제한할 수 없다는 인식을 공유하고 있는 반면, 우리정부는 김정일의 인권침해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는 주장이다. 송두율을 중심으로 확산되어 왔던 북한 내재적 접근론과 같은 맥락이다. 과거 박정희 정권의 독재에 맞서 국적까지 버리며 국제사회의 인권의식을 내세우며 저항했던 송두율 씨가 어째 북한에 대해서는 이런 국제적 잣대가 불필요하다고 강변하는지 앞뒤가 맞지 않는다.
북한은 인권침해국으로 주목의 대상이 되고 있고 남한은 정치권력의 이해에 따라 인권침해를 방관하는 후진성을 보이므로 한반도 전체가 왕따로 자초하고 있다. 게다가 북한에 의해 납북된 피랍자나 국군포로에 대해서도 우리사회의 반응은 냉담하다. 국민을 국가가 보호하지 않고 있으니 국제사회의 대응도 한계에 부딪칠 수밖에 없다.
역사왜곡은 불행
홀로코스트 추모관의 또 하나의 의미는 과거 역사를 미화하고 왜곡하는 민족이야말로 인류의 평화를 파괴하는 행위라는 지적이다. 역사에 대한 왜곡은 반대급부로의 침해당한 역사를 다른 민족에게 전가하는 행위다.
대표적인 사례가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과 일본의 침략행위에 대한 왜곡된 역사다. 중국은 역사적으로 우리민족과 끊임없는 경쟁 속에서 지내왔다. 진시황제가 중원을 통일하고 만리장성을 쌓아 중원의 태평성대를 원했던 것도 그렇고 한 나라의 멸망 후 중국의 소용돌이 속에서 고구려가 융성할 수 있었고 수와 당은 고구려를 침공했으나 패하고 비참한 최후를 맡기도 했다.
이제 중국이 고구려사를 중국 변방민족의 역사로 왜곡하며 한반도를 넘보고 있다. 이런 역사왜곡은 우리민족에게는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사건이며 미래 동북아의 평화를 깨는 씨앗을 지금 심고 있는 파렴치한 행위이다.
일본의 역사왜곡 또한 우리민족으로서는 참을 수 없다. 임나일본부설이라고 하는 존재도 없는 역사를 왜곡해 민족감정을 자극하고 있으나 이 또한 양국 간의 반복과 대립의 씨앗을 파종하는 일에 불과하다. 향후 우리의 힘이 강해졌을 때 우리는 아마도 잃어버린 고대사까지도 일본으로부터 얻어낼 것임은 충분히 예견될 일이다.
따라서 통일 후 독일이 확인해 준 폴란드와의 오더 나이스 국경과 홀로코스트 추모관 건립은 독일의 역사바로세우기가 인류평화를 위해서도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다시 한 번 깨닫게 된다.
홀로코스트 추모관은 총19,000 평방미터에 2,711개의 콘크리트 기둥의 추모비로 구성되어 있다. 사면이 개방되어 있고 입구도 출구도 없고 시작도 끝도 없다. 추모비의 크기는 동일하지만 그 높이는 모두 다르다. 0.2미터의 추모비에서 부터 무려 4미터에 달하는 추모비도 있다. 그리고 추모관 지하에는 당시 나치의 만행과 폭행, 유대인들의 수용소 등 관련 자료들을 전시하는 전시관이 마련되어 있다. 독일 정부는 이 시설을 위해 2천750만 유로를 들였다.
이제 베를린은 국가원수들이 방문해 헌화하는 장소가 되었고 학생들의 수학여행의 단골 메뉴가 되었다. 또한 많은 관광객들이 베를린 중심에 놓여있는 2,711개의 추모비를 보기 위해 베를린을 찾고 있다.
추모관에 대한 논의가 시작된 것은 지난 1989년의 일이다. 당시 일간지 프랑크후르트 룬드샤우(Frankfurter Rundschau) 1월 30일자에는 시민단체인 '전망 베를린 Perspektive Berlin’이 베를린시, 연방 그리고 각 주 정부를 수신자로 한 다음과 같은 호소문이 실렸다.
“나치가 권력을 거머쥐고 유럽의 유대인을 학살한 지 반세기가 흘렀다. 그러나 독일 땅, 범죄자의 나라 어디에도 오늘날까지 이런 민족학살과 희생자를 상기시키는 어떤 추모관도 없다. 수치스런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수백만의 학살된 유대인을 위해 베를린에 대규모 추모관을 설립할 것을 요구한다. 나치 제국의 수도에 위치했던 비밀경찰 게슈타포가 있었던 바로 그 위치에 추모관을 설립할 것을 요구하는 바이다. 이런 추모관의 설립이야 말로 동서독 독일인 모두의 의무이다.“
홀로코스트 추모비와 역사적 교훈
: “분단은 나치범죄의 죄값, 통일이 됐으니 죄값은 다 치른 셈”(?)
통일을 이룬 후 15년 만에 만들어져 세상에 공개된 홀로코스트 추모관은 전쟁을 일으키고 6백만의 유대인과 수백만 민간인들을 학살한 나치의 만행을 영원히 잊어서는 안 된다는 의미는 물론이고 전 인류를 향해 독재 권력의 비극을 상기시킨다.
볼프강 티에르제 연방의회 의장은 기념사에서 홀로코스트 추모비는 과거 나치 만행을 의식 속에 깨어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라며 그 의미를 되새겼으며 쾰러 대통령은 나치 멸망 반세기가 지난 시점에서 사회 일각에서 수면 위로 서서히 부상하고 있는 “죄값을 치렀다”는 여론을 경계하기 위해서도 홀로코스트 추모관은 매우 중요하다고 말했다. 이제 통일도 됐으니 과거반성은 끝났다고 하는 잊혀져 가는 역사반성을 영원히 현재의 것으로 만드는 계기가 될 것이라는 것이다.
나치의 역사가 이미 반세기를 넘겼고 나치 범죄에 대한 죄값인 분단도 이제는 극복했다. 하지만 21세기에도 기회 있을 때마다 고개를 쳐들고 있는 나치의 유산인 스킨헤즈에 대해 독일사회는 다시 한 번 반대의사를 분명히 하고 있다. 역사를 미화하고 왜곡해서라도 남의 땅을 빼앗고 침략을 정당화하려는 중국과 일본과는 판이하다.
추모관을 설계한 미국의 피터 아이젠만(Peter Eisenman)은 자신은 나치 희생자들의 공동묘지를 건립하지 않았고 이 추모관은 희생자들의 희망이고 이곳을 방문한 방문객들은 2,711개의 추모비로 부터 희생자들의 절규를 듣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0.2 미터의 낮은 추모비에서 부터 무려 4미터에 달하는 추모비가 희생자들의 다양한 고통과 절규라고 그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이미 반세기나 지난 나치의 만행이지만 그 의미는 지금 이 순간까지도 생생하다.
북한에서 벌어지는 정치범 수용소와 탈북자들의 인권침해는 지금 이 순간은 은폐되고 가려지고 있다하더라도 언젠가 드러나게 될 것이고 그 실체는 영원히 우리의 역사와 인류사 속에서 남아있을 것이다. 또한 임나일본부설이나 동북공정과 같은 주변국들의 역사왜곡도 결코 성공할 수 없음을 홀로코스트 추모관은 웅변하고 있다.
박상봉 / 통일ㆍ북한학, 서울장신대학교 외래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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