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영상 보기▶ https://youtu.be/aJRTfh_gWak
오늘은 반도체 이야기입니다. 스마트폰, 컴퓨터, 인터넷, TV 등 가전제품. 반도체가 없다면 존재할 수 없는 것들이죠. 심지어 이제는 자동차까지도 반도체의 덩어리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우리나라가 그 반도체 산업의 최강국이 되었으니 자랑스럽기 그지없죠. 오늘은 그 반도체 산업의 역사에 대해서 알아보려고 합니다. 세계 반도체 산업의 역사입니다.
스마트폰, 컴퓨터, 인터넷, 자동차, 초고층 건축 등 현대 산업의 대부분이 미국에서 만들어졌는데 반도체 역시 그랬습니다. 반도체의 기원은 진공관입니다. 진공관은 전기신호를 증폭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진공관 덕분에 진공관 라디오도 만들 수 있고 장거리 전화도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의 전화회사에서 많이 사용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군사용으로도 유용하게 쓰였습니다. 적국인 일본과 독일의 전투기, 잠수함을 찾아내기 위해 레이더가 필요했고 여기에 진공관이 쓰였습니다. 또 원자폭탄 개발을 위해 1943~1945년에 걸쳐 최초의 컴퓨터가 제작되었는데요. 진공관 18,000개가 연결된 기계였습니다.
그런데 진공관은 큰 문제를 안고 있었습니다. 부피가 너무 큰 데다가 쉽게 뜨거워진다는 것입니다. 최초의 컴퓨터인 ENIAC의 경우 진공관 18,000개로 만들어졌습니다. 무게가 30톤이었고 22평(가로 6m x 세로 12m)짜리 방을 가득 채울 정도로 컸습니다. 너무 열이 많이 나서 컴퓨터실의 온도가 섭씨 50도(화씨 120도)를 넘나 들었다고 합니다.1
사정이 이렇다 보니 진공관 기능을 하면서도 크기와 전력소모에서 무엇인가가 절실하게 필요해졌습니다. 그것이 바로 반도체입니다. 반도체란 어떤 때는 도체, 즉 전기가 통하기도 했다가 부도체가 되기도 하는 물질을 말합니다. 그 성질 때문에 전기를 흘렸다 끊었다 하면서 0과 1의 신호를 만들어내는 겁니다. 그것으로 계산, 기억, 사진 찍기, 음악 재생 등 온갖 일들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이죠.
반도체를 찾는 일에 가장 많은 공을 들인 곳이 전화회사 'AT&T’였습니다. 장거리 통신을 원활히 하기 위해 그런 물질이 반드시 필요했던 거죠. AT&T는 'Bell Lab’이라는 연구소를 만들고 많은 과학자들을 뽑아 연구를 시켰습니다. 1947년 Shockley 박사와 존 바딘, 윌리엄 브라테인 세 명의 벨 랩 소속 과학자들이 드디어 트랜지스터라고 불리는 물질을 발명했습니다. Transistor는 일시적이라는 뜻의 Transient와 저항을 뜻하는 Resistor의 합성어인데요. 일시적으로 저항을 만들어 전기가 통하지 않게 하는 물질을 말합니다. 바로 반도체인 것이죠. 쇼클리를 비롯한 세사람은 트랜지스터를 발명한 공으로 1956년에 노벨 물리학상을 받게 됩니다.
이 트랜지스터는 처음에는 주로 군사용이었습니다. 특히 김일성의 6·25 남침으로 시작된 한국전쟁에서 실력 발휘를 했죠. 미공군이 제공권을 장악할 수 있었던 데에는 트랜지스터도 한몫을 했습니다. 그 한국전에서 군사장비를 납품해서 큰 돈을 번 미국 기업이 'Texas Instrument’, TI입니다. 군사용 전자장비들을 제작해 납품하는 과정에서 일반 소비자용 전자 제품의 가능성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1952년에 AT&T로부터 트랜지스터의 특허 사용권을 사들입니다. 1954년에 벨 랩의 연구원이었던 고든 틸 박사를 채용하는데 이 사람이 얼마 지나지 않아서 트랜지스터 라디오를 만들어내는 데 성공합니다. 그 이전까지 라디오는 진공관식이었기 때문에 엄청나게 컸죠. 트랜지스터 라디오는 주머니 속에 들어갈 정도로 작은 크기였습니다. TI의 트런지스터 라디오는 락앤롤 열풍을 타고 엄청난 특수를 누리게 되죠. 여러분 락앤롤의 황제, 엘비스 프레슬리라고 들어보셨어요? 바로 그 시대에 최초의 트랜지스터 라디오가 등장한 겁니다. 1958년까지 TI는 가장 성공적인 반도체 기업이었습니다. TI의 트랜지스터는 상업용으로도 경쟁력이 있는 최초의 실리콘 트랜지스터였습니다. 군사용으로만 쓰이던 반도체가 본격적으로 시장에 진출을 시작한 것입니다.
그런데 TI의 성공을 보면서 배가 아픈 사람이 있었습니다. 반도체의 발명자, 윌리엄 쇼클리 박사였습니다. 트랜지스터를 발명한 장본인은 바로 자기인데 돈은 자기 밑에 있던 고든 틸이 벌고 있으니 그렇게 생각할 만도 하죠. 게다가 쇼클리는 성격이 워낙 괴팍해서 동료들이 같이 일을 하지 않으려고 했고 연구소에서 승진도 어려웠습니다.
결국 쇼클리 박사는 자기도 사업을 해서 돈을 벌겠다며 벨 랩을 떠나게 됩니다. 베캠이라는 사업가로부터 투자를 받아서 Shockley Lab을 설립했습니다. 쇼클리가 일하던 벨 랩은 소재지가 뉴욕이었는데요. 쇼클리는 자기의 새로운 실험실을 노모가 살고 있는 마운틴 뷰에 자리를 잡습니다. 그것이 바로 전자산업의 메카, 실리콘밸리의 출발입니다. 반도체의 기반 물질이 실리콘이라서 차츰 그렇게 불리게 되었습니다.
쇼클리 랩은 새로운 산업의 출발이기도 했습니다. 그전까지 반도체 부품들은 전화회사인 AT&T와 컴퓨터 회사인 IBM이 직접 만들어서 조달했습니다.2 쇼클리 랩은 반도체 생산만 전념하는 최초의 기업이 된 겁니다.
쇼클리는 같이 일할 연구원들도 많이 채용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실력은 있었지만 괴팍한 성격 때문에 직원들이 도저히 견딜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결국 1957년 쇼클리가 뽑아 놓은 8명의 연구원들이 뛰쳐나갑니다. 이들이 새로운 반도체 기업을 세웠는데 이름이 페어차일드 반도체(Fairchild Semiconductor)였습니다. 기존의 페어차일드 회사로부터 투자를 받았기 때문에 그런 이름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페어차일드는 사실상 최초의 제대로 된 반도체 기업인 셈입니다. 우리나라에도 1967년에 페어차일드의 조립 공장이 설립되었습니다. 자기가 길러낸 부하들이 한날 한시에 사표를 내고 나가서 경쟁사가 되어 버렸으니 쇼클리는 그야말로 쇼크를 받았죠. 그래서 이들을 8인의 배신자라고 부르며 원망했지만 어쨌든 성공한 것은 페어차일드였습니다. 페어차일드는 진공관을 반도체로 대체하는 데에 큰 역할을 해냅니다.3
쇼클리의 반도체 연구소는 제대로 제품을 만들지 못하고 결국 문을 닫았습니다. 그나마 쇼클리는 인근 스탠포드 대학에 교수를 갈 수 있었지만 쇼클리에게 투자를 했던 베크만은 큰 손해를 감수해야 했습니다. 그 8명의 직원들을 붙잡지 못한 것을 그렇게 아쉬워했다고 합니다.
시작이 그래서인지 실리콘밸리에서는 퇴사 후 창업이 유행처럼 자리를 잡게 됩니다. 1980년까지 페어차일드에서 일하다가 자기 회사를 창업한 회사가 수백개에 이릅니다. 이처럼 페어차일드에서 떨어져 나온 기업을 페어칠드런이라고 불렀는데요. 차일드가 칠드런이 된 거죠. 페어칠드런 중 우리도 잘 알고 있는 기업이 인텔입니다. 인텔은 1968년 노이스와 고든 무어가 페어차일드를 나와 만들었습니다. 무어는 그 유명한 무어의 법칙을 만든 사람입니다. Intel에 이어 CPU의 2인자가 된 AMD도 페어칠드런의 하나입니다.
노이스와 무어가 페어차일드를 퇴사해서 자기 사업을 시작한 이유는 메모리 반도체의 가능성을 봤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 컴퓨터의 기억 장치는 펀치카드, 마그네틱 테이프 같은 것들이었죠. 그 후로도 플로피 디스크, 하드 디스크 같은 것이 개발되었습니다. 대부분 IBM이 발명한 것들인데요. 부피도 큰 데다가 무엇보다 데이터를 불러다 쓰는 데 시간이 많이 걸렸습니다.
이들이 베팅을 한 것은 반도체를 메모리로 사용할 수 있는 가능성이었습니다. 요즈음 우리가 DRAM, SRAM이라고 부르는 것들인데 그 당시에는 이런 것이 없었습니다. 컴퓨터 회사인 IBM이 이미 DRAM이라는 것을 개발해 놓긴 했지만 원가가 워낙 비싸서 경쟁력이 없는 상태였습니다. Intel은 반도체 기억소자 연구를 계속했고 1970년 드디어 원가가 충분히 낮은 DRAM을 개발하는 데 성공합니다. Intel 1103이라는 바로 이 칩이 최초의 시장경쟁력을 갖춘 DRAM입니다.
인텔의 디램은 엄청난 매출과 이익을 가져다줬고, 인텔은 최고의 반도체 회사가 되었죠. 하지만 영광은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도시바, 후지쓰, NEC 등 일본 기업들의 강력한 경쟁에 직면하게 되었고 매출도 급격히 줄었습니다. 1974년 90%에 달하던 시장점유율이 1980년에 들어오면 5% 대로 떨어지게 되죠. 디램 사업을 지속할 수 있는지가 문제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원래는 계획에 없었던 제품의 매출이 늘기 시작했습니다. 메모리가 아니라 마이크로프로세서 칩입니다. 컴퓨터에서는 CPU라고 부르는 그 반도체입니다. DRAM은 데이터를 저장하는 장치인 반면 프로세서는 데이터를 더하고 곱하고 지우는 등 연산을 하는 장치입니다. 인텔이 마이크로프로세서 생산을 시작하게 된 것은 일본 기업인 비지콤이 전자계산기용 칩셋을 만들어달라고 요청을 하면서부터입니다. 구체적 아이디어를 낸 사람은 비지콤의 엔지니어인 마사토시 시마 Masatoshi Shima인데요. 인텔에 상주하면서 인텔 직원과 공동작업으로 Intel 4004라는 계산기용 칩셋을 개발하게 됩니다. 제품의 유용성을 깨달은 인텔이 곧 그 제품에 대한 권리를 인텔이 다시 사들입니다. 나중에 PC에 사용되는 8088, 80286 등으로 발전하게 되죠. 제품 개발의 주역인 마사토시 시마도 인텔로 직장을 옮깁니다.
인텔이 출시한 마이크로프로세서는 퍼스널 컴퓨터의 시대를 여는 촉매제가 됩니다. 1975년에 Altair 8800이라는 최초의 PC가 나왔고, 다음 해인 1976년에는 스티브 잡스가 Apple I을 내놓습니다. 모두 인텔의 CPU를 채택한 제품입니다. 1981년에는 컴퓨터의 본산인 IBM이 IBM PC를 내놓습니다. 본격적으로 PC 시대가 열린 것입니다. 당연히 Intel CPU에 대한 수요도 폭발하게 됩니다.
이처럼 CPU 매출은 폭발하는 데 디램의 매출은 오히려 최악의 상태로 치닫습니다. 일본의 디램 가격 인하 경쟁을 견딜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1984년, 당시 인텔의 CEO였던 앤디 그로브는 디램 사업의 완전 포기 결정을 내리게 됩니다. 메모리 반도체를 만들겠다며 시작한 기업이 메모리를 포기했으니 정말 보통일이 아니었죠.
일본이 반도체 연구를 시작한 것은 패전 직후인 1948년부터였습니다. 1954년에 TI가 인류 최초로 트랜지스터 라디오를 출시하자 소니는 바로 다음 해인 1955년에 소니 트랜지스터 라디오를 출시할 정도였습니다. 일본의 메모리 반도체 기술은 미국을 능가했습니다. 1980년대에는 미국을 누리고 세계 디램 시장을 완전히 석권하게 됩니다. 1984년에는 급기야 디램의 원조인 인텔의 디램 사업을 침몰시키게 된 것입니다.
사정이 여기에 이르자 미국 기업과 정부가 정치적으로 반격에 나서게 됩니다. 인텔의 창업자인 로버트 노이스가 미국 무역대표부에 일본 반도체 산업 정책의 불공정성을 조사해달라고 나섰습니다.4 또 다른 미국 반도체 기업 마이크론은 NEC, 히타치, 미쓰비시, 도시바 등 일본 반도체 기업들을 반덤핑 혐의로 제소했습니다. 보복관세가 부과되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일본은 1986년 미일 반도체 협정에 서명해야 했습니다. 미국 반도체의 일본 수입을 늘리고 수출을 자제한다는 내용입니다. 전 해인 1985년에는 플라자합의를 통해 엔화의 급격한 평가절상이 이뤄졌습니다. 반도체협정은 엎친 데 덮친 격이었습니다.
다음 그래프가 보여주듯이 이때부터 일본 메모리 반도체의 성장세가 꺾이기 시작했습니다. 시장점유율은 1988년부터 정체를 보이다가 1993년부터 급감하기 시작합니다.5 2000년대에는 10%대를 겨우 유지하는 지경으로 추락을 하게 됩니다.
일본 반도체의 성공이 덤핑 같은 불공정 무역 때문이었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습니다. 일본 반도체가 인텔과의 가격 경쟁에서 이길 수 있었던 것은 수율의 차이 때문이었습니다. 미국 기업의 수율이 50%였던데 반해 일본 기업은 80%였다고 합니다.6 그러면 당연히 엄청난 원가 경쟁력이 생깁니다. 사정이 어찌 되었던 일본 반도체 기업들은 미국의 무역제재를 견디지 못하고 서서히 무너져 갔습니다.
그 사이에 한국, 특히 삼성반도체는 승승장구하게 됩니다. 1986년 당시 거의 0이던 시장점유율이 1988년에는 10%에 이르게 되고 10년 후인 1998년에는 40%로 올라섭니다. 메모리 반도체라면 대부분 DRAM이었는데요. 2010년 이후부터는 또 다른 메모리 반도체인 낸드 플래시 메모리 시장도 삼성과 SK하이닉스의 독무대가 되었습니다.7 한국은 명실상부 메모리 반도체의 최강자가 된 것입니다.
한국 반도체의 성공을 미일 반도체 협정에 대한 반사이익으로 보는 견해가 많지만 저는 그렇게만 보지 않습니다. 저가 PC의 보급이라는 시장 상황의 변화, 한국과 일본 기업의 경영 스타일의 차이가 더욱 크게 작용했다고 봅니다. 한국과 일본 반도체 산업의 흥망에 대해서는 이어지는 글에서 다루겠습니다.
지금까지 이야기한 인텔, 삼성전자, SK하이닉스 같은 기업들은 IDM, 즉 종합반도체 기업이라고 부릅니다. Integrated Device Manufacturing의 약자입니다. R&D와 설계 부서, 공장, 영업부서를 모두 갖춘 기업을 말하죠. 그런데 퀄콤이나 AMD 등도 대단한 반도체 기업이지만 설계만 하고 공장이 없습니다. 이런 곳을 팹리스라고 부릅니다. fab은 공장, less는 없다는 뜻이죠. 팹리스가 있다는 것은 그들의 설계도를 받아서 반도체를 제조해주는 곳이 있다는 말이겠죠. 그런 곳을 파운드리라고 부릅니다. 파운드리는 원래 주물공장을 뜻하는 단어인데 반도체 위탁 생산하는 기업을 가리키는 말이 됐습니다. 대만의 TSMC가 가장 유명하고요. 삼성전자도 본격적으로 파운드리 비즈니스에 착수한 상태입니다.
자료: https://apiems2016.conf.tw/site/userdata/1087/Keynotes/Trend%20of%20Semiconductor.pdf
원래 반도체 기업들은 모두 IDM이었습니다. 그러던 것이 어떻게 오늘날처럼 분업화된 체제가 되었을까요? 1980년대부터 실리콘밸리 소재 데이터제너럴에서 근무했던 다네엘 네니 박사가 잘 설명해 줍니다. 1980년대 제조설비를 갖춘 IDM들끼의 경쟁이 치열해졌습니다. 과잉 설비와 인력 문제가 발생했고 이것을 해소하고자 새로 시작한 스타트업들에게 설계, 제조, 패키지 서비스 제공하는 곳이 생겨났습니다.8 그 결과 차츰 아이디어와 설계 능력만으로 창업하는 기업들이 늘어났죠. 이들을 팹리스라고 부르게 된 겁니다. 반도체 제조 설비까지 갖추려면 5천만 달러내지 1억 달러가 필요한데 설계만으로 창업하는 데에는 500만~1천만 달러면 됐습니다. 창업 비용이 줄어들면서 팹리스의 창업이 잇따랐습니다.
하지만 IDM으로서는 남에게 제조 설비를 빌려주는 것이 그리 달가울 리가 없었습니다. 팹리스의 입장에서도 약간 구걸하는 느낌도 들었을 겁니다. 설비 제공을 전문으로 하는 비즈니스가 필요해진 거죠. 그 시장을 개척한 주역이 TSMC의 창업자이자 대만인인 모리스 창입니다. 1958년부터 1983년까지 TI에서 25년 동안 근무했는데요. 4개의 반도체 개발 프로젝트를 하면서 제조는 IBM에 맡겼습니다. 그 때 파운드리 경험을 하게 된 것이죠. 회사를 나와 1987년에 파운드리 전문 기업인 TSMC를 설립합니다. 그리고 이제 파운드리 분야에서 독보적인 위상을 점하게 되었죠.
파운드리가 자리를 잡다 보니 이제는 대표적 IDM인 Intel까지도 제조를 외부로 맡길까 궁리를 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삼성전자도 파운드리에 도전하고 있습니다. 성공의 관건은 고객으로부터 신뢰를 얻는 것이라고 합니다.9 애플, 퀄콤, 엔비디아 같은 큰 고객들이 삼성전자의 파운드리를 신뢰하게 될까요. 두고 볼 일입니다.
오늘은 반도체 시리즈 첫번째 이야기, 글로벌 반도체 시장의 역사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한국, 일본, 중국의 반도체 산업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가겠습니다.
김정호 / 김정호의 경제TV 크리에이터, 서강대학교 경제대학원 겸임교수
1 https://www.corecompass.com/articles/traitorous-8-and-birth-silicon-valley
2 Jeffrey T. Macher, David C. Mowery, and Timothy S. Simcoe, E-BUSINESS AND THE SEMICONDUCTOR INDUSTRY VALUE CHAIN: IMPLICATIONS FOR VERTICAL SPECIALIZATION AND INTEGRATED SEMICONDUCTOR MANUFACTURERS, East-West Center Working Papers, Economics Series, 2002.
4 미·일 반도체 협정과 삼성전자의 기회, https://biz.chosun.com/site/data/html_dir/2019/05/26/2019052600274.html
5 http://www.monolithic3d.com/blog/how-korea-became-the-hub-of-the-memory-industry
6 [이재구코너]미·일 반도체전쟁 시작, https://zdnet.co.kr/view/?no=20100610185218, 2010.06.20
7 https://en.wikipedia.org/wiki/Flash_memory#Timeline
8 https://semiwiki.com/semiconductor-manufacturers/1535-a-brief-history-of-the-fabless-industry/
9 Daniel Nenni, Can Samsung Foundry Really Compete with TSMC?, 2020.11.20
NO. | 제 목 | 글쓴이 | 등록일자 | |
---|---|---|---|---|
68 | 중국 공산당, 기업 장악을 위해 미국 돈도 버리다! 디디추싱 사태를 보는 시각 김정호 / 2021-07-20 |
|||
67 | 수소경제, 신의 한 수 또는 악수? 김정호 / 2021-07-13 |
|||
66 | 신안 해상풍력발전 투자 48조 원, 어떻게 볼 것인가? 김정호 / 2021-07-06 |
|||
65 | 중국 고립은 심화되는데, 위안화는 왜 강세인가? 김정호 / 2021-06-29 |
|||
64 | 글로벌 최저한세, 증세 경쟁의 시작인가? 김정호 / 2021-06-22 |
|||
63 | 엘살바도르는 왜 비트코인에 승부를 걸었나? 김정호 / 2021-06-15 |
|||
62 | 미-중 사이에 끼인 한국 배터리 산업, 괜찮을까? 김정호 / 2021-06-08 |
|||
61 | 탈원전으로 위험 고조되는 한국 전기 사정 김정호 / 2021-05-25 |
|||
60 | 이미 시작된 인플레이션, 내 투자는 어쩌나? 김정호 / 2021-05-18 |
|||
59 | 에너지 혁명: 과거, 현재, 미래 김정호 / 2021-05-11 |
|||
58 | 이건희 상속세 한국은 12조, 영국은 4조, 스웨덴은 0원 김정호 / 2021-05-04 |
|||
57 | 전문경영의 민낯: 미국형은 비정, 일본형은 무능, 한국형은 부패 김정호 / 2021-04-27 |
|||
56 | ESG 거품론, 왜 나오나? 김정호 / 2021-04-20 |
|||
55 | 오세훈의 재건축 정상화가 넘어야 할 산 김정호 / 2021-04-13 |
|||
54 | LH 대책에 대해서 김정호 / 2021-04-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