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 문제의 본질과 대책

복거일 / 2002-04-15 / 조회: 7,469
No.005

1. 영어 문제의 심각성

지난 몇 해 동안에 '영어 문제'가 갑자기 심각한 사회 문제로 떠올랐다. 이제 그것은 나이, 학력, 직업 그리고 지역을 뛰어넘는 모든 시민들의 문제가 됐다. 그것이 그런 개인적 차원에 국한된 것도 아니다. 우리 사회 전체의 차원에서도 영어와 관련하여 시급히 대처해야 될 사안들은 많다.
영어 문제의 심각성은 그것이 우리 사회만의 문제가 아니라 세계 대부분의 나라들이 맞은 문제라는 점에서도 드러난다. 영어 문제는 본질적으로 영어가 국제어로 자리잡았다는 사실에서 나온다. 자연히, 영어가 국어가 아닌 나라들은 모두 영어 문제를 맞았다.

2. 망 경제(network)와 국제어

국제어가 나오는 것은 언어가 망 (network)을 이룬다는 사실 때문이다. 망은 사람들이 특정한 매체를 통해 서로 연결된 상태를 가리킨다.
망의 가장 두드러진 특질은 그것의 사용자는 자신의 사용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사용으로부터도 혜택을 본다는 사실이다. 채택 외부효과(adoption externality)라고 불리는 이런 현상은 정보 전달 수단들에서 잘 드러난다. 사용자가 한 사람일 때, 정보 전달 수단들은 쓸모가 별로 없다. 말이든, 전보든, 전화든, 팩스든, 사용자가 적어도 둘은 되어야, 비로소 쓸모가 생긴다. 그리고 사용자가 늘어날수록, 가치가 커진다. 게다가 그것의 가치는 그것을 쓰는 사람들의 수보다 훨씬 빠르게 늘어나니, '메트카프의 법칙(Metcalfe's Law)'에 따르면, 사용자에 대한 효용으로 정의되는 망의 가치는 대체로 사용자 수의 제곱에 비례한다.
언어는 그런 사정을 또렷이 보여준다. 아주 적은 사람들만이 쓸 때, 한 언어의 가치는 그리 크지 않다. 그러나 점점 많은 사람들이 쓰게 되면서, 그것의 가치는 폭발적으로 늘어난다. 아울러 그런 과정에서 그것은 점점 정보 전달에 좋은 상태로 진화한다. 어휘는 빠르게 늘어나고, 복잡하고 섬세한 생각을 표현할 만큼 정교하고 세련된 표현들이 나타난다.
그러나 이 세상엔 여러 언어들이 공존한다. 그것들 가운데 어느 것이 표준 언어가 되는가? '메트가프의 법칙'에 따라, 어떤 망의 사용자들이 다른 망들의 사용자들보다 많으면, 그 망의 가치는 크게 부각된다. 그리고 그렇게 큰 가치는 사람들로 하여금 그 망을 쓰도록 만든다. 그래서 어떤 이유로 한번 표준으로 선택된 망은 그런 선순환 덕분에 다른 망들보다 점점 더 우세해진다. 경제학자들은 이런 현상을 '망 경제(network economy)'라고 부른다.
언어에서도 사정은 같으니, 어떤 언어가 한번 망 경제를 누리게 되면, 그것의 경쟁력은 갈수록 커진다. 역사적으로 국제어들은 모두 제국의 출현에 힘을 입어서 그 자리를 차지했다. 제국의 출현은 잠재적 망 경제의 크기를 단숨에 늘리며, 제국은 그런 잠재적 이익을 실현할 의욕과 능력을 갖춘 정치 체제다. 그런 상황에서 제국의 건설을 주도한 민족의 언어는 쉽고 빠르게 망 경제의 혜택을 얻는다. 아람어, 한문, 그리스어, 라틴어, 아랍어는 그렇게 제국의 성립에 힘입어 국제어가 된 대표적 예들이다.

3. 영어의 득세와 민족어의 쇠멸

근대에 세계가 점차 하나의 문명권을 이루자, 국제어의 필요성은 부쩍 커졌다. 마침내 19세기의 '영국 중심의 평화 (Pax Britannica)'와 20세기의 '미국 중심의 평화 (Pax Americana)' 덕분에 영어가 국제어가 되는 데 필요한 임계 질량을 얻었다. 이제 영어는 망 경제의 이익을 제대로 누리고 있으며, 그런 이익은 앞으로 점점 커질 것이다.
이런 영어의 득세는 당연히 나머지 민족어들의 운명에 결정적 영향을 미칠 터이다. 민족어들은 영어에 점점 깊이 침윤될 것이고, 곧 두 언어들이 공존해서 시민들이 그 둘을 함께 쓰는 이중 언어(bilingual) 상황이 나올 것이다. 궁극적으로는 영어가 단 하나의 국제어로서 세계의 모든 사회들에서 거의 모든 부면들에 쓰일 것이다.
물론 이런 사정이 민족어들의 완전한 쇠멸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쉽게 사라지기엔 민족어들은 민족의 역사와 지적 자산들을 담고 있다. 그래서 민족어들은 대중들의 외면을 받지만 전문가들에 의해 쓰이고 보존되고 이어질 것이다. 그런 상태에선 민족어들은 거의 진화하지 않고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박물관 언어'로 남을 것이다.

4. 언어 학습의 생물학적 측면

국제어의 보급과 민족어의 쇠멸이란 현상을 이해하려면, 생물학적 측면에 주목해야 한다. 먼저 지적되어야 할 것은 사람들이 지닌 언어 능력은 특정한 언어에 매인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언어를 쓸 수 있으려면, 뇌와 발성 기관에 근본적 변화가 일어나야 하는데, 이것은 물론 무척 힘들고 더딘 과정이다. 그리고 언어는 완성되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간단하고 거친 원시적 형태에서 복잡하고 세련된 모습으로 진화한다. 그런 상태에서 사람의 언어 능력이 어떻게 특정한 언어에 매일 수 있겠는가?
다음엔, 사람이 첫 언어를 배울 때 쓰는 뇌의 부분과 차후 언어들을 배울 때 쓰는 뇌의 부분이 다르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첫 언어를, 곧 모국어를, 배우는 것과 차후의 언어들을 배우는 것 사이엔 생물학적 차이가 있다. 사람들이 모두 모국어는 아주 잘 쓰지만 커서 배운 외국어들을 쓰는 데는 근본적 한계를 지녔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졌다.
이 사실은 국제어를 모국어로 갖지 않는 사람들이 겹으로 불리하다는 점을 가리킨다. 그들은 모국어말고도 국제어라는 언어를 하나 더 배워야 할 뿐 아니라, 그 국제어를 제대로 배워서 쓸 수도 없다. 이 불행한 소식에 대해 합리적으로 대응하는 단 하나의 길은 국제어를 모국어로 갖는 것이다. 다른 길은 없다. 그리고 아이들의 언어 능력이 부모들의 언어에 매인 것이 아니므로, 그렇게 하는 데 장애가 될 것도 없다. 자연히, 사람들은 차츰 국제어를 모국어로 삼을 것이다.

5. 영어 문제에 대한 근본적 대책

그러면 영어 문제에 대한 근본적 대책은 무엇인가? 국제어가 된 영어가 가까운 미래에 세계어가 되어 온 세계가 영어만을 쓰고 다른 민족어들은 모두 쇠멸하리라는 전망, 영어가 이미 누리는 큰 망 경제, 영어를 잘 쓰지 못해서 우리 시민들과 사회가 보는 엄청난 손해, 사람의 뇌에서 첫 언어를 배우는 부분과 차후 언어들을 배우는 부분이 다르므로 국제어를 모국어로 갖지 않은 사람들은 아무리 열심히 배워도 국제어를 모국어처럼 능숙하게 쓸 수 없다는 사실, 그리고 한 사람의 모국어는 그가 태어날 때 본인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결정된다는 사정 따위 조건들을 고려하면, 우리가 고를 수 있는 단 하나의 대책은 우리의 모국어인 한국어를 버리고 영어를 우리 말로 삼는 것이다.
이것은 선뜻 받아들이기 어려울 만큼 충격적인 결론이다. 아무리 영어가 중요하다고 하더라도, 모국어를 버리다니! 그러나 움직일 수 없는 사실들과 엄격한 논리는, 한국어를 쓰는 한, 우리는 국제어를 제대로 쓸 수 없고 그래서 큰 핸디캡을 안고 영어를 잘 하는 사람들과 경쟁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말해준다.

6. 현실적 대책

그러나 국제어인 영어를 우리 말로 삼는 일은 큰 투자와 긴 시간이 소요되는 사업이다. 당장 영어를 우리 말로 삼는다 하더라도, 우리 시민들은 모두 한국어를 모국어로 가졌으므로, 실제로 영어를 모국어로 가진 우리 후손들이 나타나는 데는 적어도 세 세대는 걸릴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고를 수 있는 가장 현실적 방안은 영어를 우리 말과 함께 공용어로 삼는 것이다. 그렇게 두 가지 공용어들이 쓰이면, 우리 시민들은 자식들에게 영어와 조선어 가운데 하나를 골라 모국어로 가르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 사회에서의 영어의 확산 과정이 시민들이 바라는 속도로 자연스럽게 진행될 것이다. 이 방안은 국제어를 유일한 공용어로 삼는 일의 첫 단계이면서도, 한국어의 습득에 큰 투자를 했고 한국어에 큰 애착을 지닌 시민들의 저항을 크게 받지 않을 것이다. 근년에 '영어 공용화'라는 이름 아래 논의되어온 방안은 바로 이것을 뜻한다.
영어 공용화는 당장 우리 시민들이 영어 공부에 들이는 투자를 보다 효율적으로 만들 것이다. 영어가 일상적으로 쓰이는 환경은 영어의 효율적 학습에 필수적이다.
또 하나의 장점은 그것이 기회의 평등에 이바지한다는 점이다. 지금 많은 사람들이 비싼 수업료를 내면서 영어 학원에 자식들을 보내고, 적잖은 사람들이 자식들을 해외로 유학을 보낸다. 물론 그들은 재산이 넉넉한 계층이다. 영어가 이미 생존에 결정적으로 중요한 기술이 된 터라, 그런 사정은 부의 세습을 뜻한다. 영어를 공용어로 삼으면, 학생들이 자연스럽게 영어를 배우는 기회는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정부도 영어 교육에 투자를 더 많이 하게 되어, 교육 기회의 불평등은 그만큼 줄어들 것이다.
셋째, 영어 공용화는 우리 사회를 보다 활기차게 만들 것이다. 우리의 전통을 제대로 가꾸려면, 우리 자식들은 영어를 잘 써서 영어로 전통을 만들어내야 한다. 그러면 그것은 지금 조선어로 구체화된 것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향유할 것이고, 자연히, 훨씬 큰 활력을 지닐 것이다. 반면에, 긴 세월이 지나 조선어가 '박물관 언어'가 되더라도, 우리 민족어를 배우고 연구하는 학자들은 늘 나올 터이므로, 조선어로 구체화된 우리 전통과 문화에 우리 후손들이 접근하지 못할 위험은 거의 없다.

7. 전술적 대응

우리가 영어를 공용어로 삼기로 결정한다면, 당연히 긴 준비 기간이 필요하다. 따라서, 아무리 적극적으로 추진하더라도, 영어의 본격적 도입을 위한 준비 기간은 한 세대는 되어야 할 터이다. 자연히, 합리적인 전술적 대응은 영어 공용화에 관한 시민들의 합의가 없어도 할 수 있는 일들과 영어 공용화와는 관계없이 어차피 하게 될 일들을 먼저 하는 것이다. 그런 일들 가운데 가장 시급하고 중요한 것은 우리 사회를 영어에 호의적인 사회로 만드는 일이다.
당장 할 수 있는 일은 정부의 법령, 문서, 양식과 같은 것들을 우리 말과 영어로 병기해서 외국인들이 이내 이해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다음 단계는 외국인들이 찾을 만한 정보들을 한글과 영어로 병기하는 것이다. 특히 금융 기관들, 숙박 시설들, 상점들의 표지들과 안내문들, 여행 안내서들, 식당의 식단들, 그리고 상품들의 포장에 적힌 정보들의 국영문 병기는 시급하다. 영어를 공용어로 삼았을 때 나올 현상들에 대한 연구를 정색하고 추진하는 것도 필요하다. 이중언어 사회는 개인들에게나 사회 전체로나 여러 모로 긴장된 사회다. 따라서 그런 긴장을 늦추어 예상되는 부작용들을 줄이는 조치들이 꼭 필요하다.

8. 우리 후손들을 위한 투자

여기서 강조되어야 할 것은 영어의 공용화는 초장기적 투자라는 사실이다. 따라서 그것에서 나올 혜택은 단기적으로는 그리 크지 않을 것이고, 혜택의 대부분은 아직 태어나지 않은 우리 후손들의 몫이다. 따라서 이 문제는 후손들의 처지에서 그들의 이익을 최대화하는 방식으로 결정되어야 옳다.
말을 바꾸면, 영어의 공용화는 우리에겐 주어지지 않았던 모국어의 선택권을 우리 후손들에게 주는 것이다. 국제어인 영어와 민족어인 조선어 가운데 자신들의 삶에 나은 것을 모국어로 고를 수 있는 기회를 그들에게 주는 것이다. 그것은 조선어에 이미 물질적으로나 심리적으로 많은 투자를 한 세대들에겐 무척 어려운 결단이다. 그러나 그것만큼 우리 후손들을 위해서 실질적으로 큰 뜻을 지닌 투자도 드물 것이다.

9. 온 인류의 재산으로서의 국제어

위에서 펼친 주장은 많은 사람들에게 낯설 것이고 이단적으로 들릴 것이다. 실은 적잖은 이들에게 신성모독적 발언으로 들릴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이 세상의 여러 문명들이 하나로 통합되어 점점 촘촘한 유기체로 짜여지고 있다. 그런 '지구 제국'의 출현과 발전은 당연히 모든 것들에서 하나의 표준을 만들어내고 있다. 그런 상황에서 국제적 표준이 된 영어를 앵글로색슨족의 민족어로 여기는 것은 비합리적이다. 무릇 국제어는 그것을 쓰는 모든 사람들의 자산이다. 그리고 그들 모두에 의해 다듬어진다. 이제 우리는 영어라는 국제어를 우리의 자산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고 선언해야 한다, 우리도 그것을 다듬어 발전시키는 일에서 우리 몫을 하겠노라고.
1998년 영어 공용화 주장이 처음 나오자, 거센 비난이 일었다. 그런 비난은 물론 예상된 일이었다. 예상 밖이었던 것은 영어 공용화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뜻밖으로 많았다는 사실이었다. 인터넷을 통한 찬반 토론에서 영어 공용화에 찬성하는 사람들은 약 45%였고 반대하는 사람들은 약 55%였다. 요즈음의 여론 조사들은 찬성하는 사람들이 반대하는 사람들보다 오히려 많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런 역전은 그 동안에도 세상은 끊임없이 바뀌고 있었음을 우리에게 일깨워준다. 세상이 바뀌는 것을 우리가 거부해도, 세상은 아랑곳하지 않고 바뀐다. 그래서 세상이 바뀌는 것에 맞추어 사회를 바꾸어 나가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은 나중에 필요한 변화의 크기를 늘려서 변화에 드는 비용과 고통의 총량을 늘릴 따름이다.

복거일 (소설가·경제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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