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 정책과 관련한 문제점들에서 주요한 것만을 몇 가지 간추려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재벌이 생산구조의 하나임에도 불구하고 일부 지식인과 국민은 그것을 생산구조로 인정치 않고 있다. 생산구조란 생산이나 거래를 위하여 만들어지는 제도를 의미한다. 경제세계에는 시장, 하도급, 장기계약, 기업과 같은 많은 생산구조가 있고 재벌로 지칭되는 생산구조는 그 중의 하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까지 재벌을 하나의 생산구조로 여기는 경우는 거의 없다.
둘째, 생산구조로서 재벌이 발생하는 경제적 이유를 모른다는 것이다. 세상에 장기간 존재하는 모든 것은 그 존재 이유가 있다. 재벌도 예외는 아니다. 그러나 재벌 발생의 합리적 원인을 규명하지 못하고 있다. 그렇게 된 데에는 재벌을 생산구조로 인정치 않는 지식인을 포함한 일반인의 인식이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셋째, 재벌의 생산성이 독립기업에 비하면 매우 크다는 것이다. 이재형과 유승민은 1988년의 제조업을 기준으로 할 때, 복합통합기업의 1인당 연간 매출액은 8천6백만 원인데 비해 독립기업의 1인당 매출액은 3천4백만 원에 불과함을 보이고 있다. 이 연구는 재벌 산하의 기업들은 다른 독립기업에 비해 두 배 이상의 높은 생산성을 실현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상당수의 다른 연구도 이와 유사한 결과를 보여주고 있다. 재벌 기업의 생산성이 높은 이유를 규명하는 일도 이론에 의하여야 하나 그렇지 못한 것이 현실이다.
넷째, 많은 신흥시장에서 재벌이나 이와 유사한 경제조직이 경제에서 큰 비중을 점하고 있다. 일본을 포함하여 홍콩, 대만, 싱가포르, 태국,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필리핀, 니카라과, 파키스탄, 인도 등에서 재벌은 비록 그 구조가 조금씩 다르지만 광범하게 존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독 한국에서만 반재벌 정서가 강하고 그 결과 재벌을 억제 내지는 통제하는 광범위한 정책이 입안되어 시행되고 있다. 출자총액제한, 은행의 소유한도 제한 등 명시적인 규제도 있고 일반인의 반재벌 의식 등과 같은 묵시적인 제약도 있다.
다섯째, 외환위기 이후에는 정부는 재벌을 경제위기의 주범으로 지목하여 재벌의 인위적인 해체 또는 ‘빅딜’ 등을 단행하였다. 외환위기를 극복한다는 명분으로 단행된 재벌간 빅딜은 자산의 사적 소유권을 부정하는 정책이라는 점에서 가장 나쁜 영향을 미치는 정책 가운데 하나이다.
마지막으로, 앞에서 열거한 재벌정책의 문제점보다 더 근본적인 것은 재벌정책이 합리주의보다는 대중주의에 의하여 결정된다는 것이다. 그러한 정책은 당연히 많은 폐해를 낳고 있다.
2. 부정적인 재벌정책의 원인
재벌을 억제하거나 통제하는 규제 중심의 재벌정책은 많은 부정적 영향을 초래하고 있다. 투자의 위축, 은행 소유의 제한으로 인한 각종 비효율, 반재벌 정서를 불식시키기 위하여 재벌이 지출하는 비용, 재벌이 보유한 각종 제도적 장점을 손쉽게 이용할 수 없는 일 등이 대표적인 예라고 하겠다. 여기에서는 통제 일변도의 재벌 정책의 원인을 간단히 짚어보기로 한다.
첫째, 국민과 지식인의 반재벌 의식이 그것이다. 일부 지식인과 국민이 어떻게 반재벌 의식을 가지게 되었는지는 쉽게 풀 수 있는 수수께끼가 아니다. 어느 사회에서나 일반적으로 지식인은 사회주의적 성향을 강하게 지닌다. 그러한 지식인의 반시장적, 친사회주의적 성향이 국민의 의식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여겨진다. 이것은 장기적으로 가장 지속적인 영향을 미치는 요인이다.
둘째, 공정거래법에는 재벌의 행위를 규제하는 많은 관련 조항이 있다. 예를 들면, 채무보증제한, 기업집단의 지주회사 설립제한, 상호출자의 금지, 출자총액의 제한, 계열회사에 대한 채무보증의 금지, 금융회사 또는 보험회사의 의결권 제한 등이 그것이다. 공정거래법의 이러한 조항들은 재벌의 각종 경제 행위를 규제하고 통제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궁극적으로는 공정거래법의 재벌 관련 조항은 앞에서 지적한 지식인과 국민의 의식과 산업조직이론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다.
셋째,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정부는 재벌의 경제행위를 통제 또는 억제하는 정책을 취한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외환위기가 닥쳤을 때 그 해결책의 일환으로 반도체의 빅딜을 정부가 강제한 것이다. 이러한 정부의 행위는 위기의 원인을 손쉽게 재벌에게 돌리게 하고 있다. 그러나 정부의 이러한 행위는 위기의 해결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 제도의 핵심인 사적 소유권을 부정하는 결과를 낳았다. 이러한 정책은 일부 지식인과 국민의 지지와 찬성이 없었다면 시행될 수 없는 성질의 것이었다.
3. 반재벌론에 대한 비판
재벌에 대한 비판은 너무 많아 모두 열거할 수는 없다. 여기에서는 많은 반재벌론중에서 몇 가지 중요한 것만을 간추려 비판하고자 한다. 첫째, 재벌은 너무 광범위한 영역에서 업종 다각화를 하여 선단식 경영을 하고 있고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업종다각화보다는 업종전문화가 필요하다고 반재벌론자는 주장한다. 기업이 얼마나 다각화와 전문화를 할 것인가는 시장에서 기업가만이 결정할 수 있다. 물론 그 결정에 따른 책임도 기업가 자신이 져야 할 것이다. 경제학자를 포함한 외부 관찰자가 해줄 수 있는 조언은 없다. 왜냐하면 기업의 경영에 필수적인 장소와 시간에 구체적인 정보는 기업가만이 입수 가능하기 때문이다. 가정컨대 정보가 입수 가능하더라도, 기업 경영과 관련한 권리와 책임은 기업가만의 것이다. 그리고 시장의 변화에 대처하는 것도 기업가의 몫이다. 언제나 전문화가 다각화보다 더 좋다거나 또는 다각화가 전문화보다 더 좋다는 주장은 성립하지 않는다.
둘째, 반재벌론자는 재벌의 소유와 경영은 분리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재벌이 소유와 경영이 분리되어 있지 않고 그 결과 경영에 있어서 전횡과 권력집중으로 인한 폐해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소유와 경영의 분리에 의한 전문경영인 제도는 주인-대리인 문제와 전문경영인의 도덕적 해이 문제가 존재한다. 소유와 경영이 일치되어 있는 경우나 분리되어 있는 경우, 두 제도 모두 장점과 단점을 가지고 있다. 경제 환경에 따라 기업가가 선택해야 할 문제이지만 소유와 경영이 일치되어 있는 경우가 자본주의 원리에 더 충실한 제도이다. 역사적으로 소유와 경영이 분리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득세하기 시작한 것은 앞에서 보는 것과 같은 경제적인 이유 때문이 아니다. 경제와 기업 경영의 세계에 정부의 개입이 늘어나면서 득세하기 시작한 주장이다.
셋째, 재벌에 대한 비판으로 중소기업이 대기업보다 고용 창출 등 여러 가지 측면에서 유리하다는 주장을 한다. 일률적으로 대기업이 중소기업보다 좋다거나 반대로 중소기업이 대기업보다 좋다는 주장은 성립하지 않는다. 기업의 크기는 기술조건, 수요의 크기, 생산요소의 가격 등 경제환경에 의해 결정된다. 그러한 경제환경을 무시한 경우에는 시장에서 비효율적이기 때문에 생존할 수 없다.
넷째, 재벌의 소유집중은 부의 불평등을 가져온다는 것이다. 소유집중은 창업이 소수의 기업가에 의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창업을 통해 기업이 창출한 가치가 노동자, 소수 주주 등에 분배된다. 그리고 자본주의에서 합법적인 방법에 의해 창출한 부는 누구나 그 소유권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30대 재벌의 소유집중도는 기업이 성장함에 따라 점점 감소하는 추세에 있는 것도 사실이다.
다섯째, 자주 거론되는 재벌에 대한 비판은 재벌이 중복투자로 과다한 경쟁을 일삼고 있다는 것이다. 비판자들은 재벌들의 중복투자는 흔히 정경유착의 산물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투자나 효율은 공학적 개념이 아니다. 수요의 원천이 되는 시설과 투자도 주관적인 것으로 외부관찰자가 중복투자 여부를 판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여섯째, 경제력이 대기업 또는 재벌에 집중되어 있다는 것이다. 경쟁으로 대기업이나 재벌의 시장 점유율이 증가하는 것은 효율의 결과이다. 즉, 대기업이나 재벌이 효율적이기 때문에 시장 점유율이 증가하고 소위 경제력의 집중 현상을 목격하게 된다. 그 점에서 대기업이나 재벌의 시장 점유율이 증가하는 것을 문제삼을 것이 아니라 기업의 시장 진입을 억제하는 진입규제가 존재하는지 여부를 검토하여야 할 것이다.
기타 재벌에 대한 많은 규제와 비판이 존재한다. 그것들은 재벌의 금융기관과 언론기관의 소유 금지, 출자총액의 제한, 상호채무 보증 제한, 사외이사 제도의 도입 강제, 노조의 경영권 공유와 경영권 참여, 재벌 총수의 경영에 대한 비난, 기업의 사회적 책임 강조 등이다. 그러나 이러한 규제들은 그 타당성이 입증되기 어려운 것이라고 하겠다.
4. 재벌정책의 올바른 방향과 대책
재벌정책은 공정거래정책과 산업정책의 중요한 부분이다. 재벌의 발생 원인과 효율성을 이해하면 규제 일변도의 재벌정책은 많은 문제점을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재벌정책의 올바른 방향과 구체적인 재벌 정책을 제안한다.
첫째, 재벌정책은 이론과 실증분석 자료에 의거하여 입안되고 시행되어야 한다. 둘째, 대중주의에 의거 자본주의를 부정하는 방법으로 재벌정책을 시행하는 것은 지양되어야 한다. 셋째, 재벌이 독점의 원인이 아닌 한 공정거래정책과 산업정책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 넷째, 정부의 반재벌 정책과 공정거래법의 재벌에 대한 각종 규제 정책은 모두 폐지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다만 현행 지주회사 설립 제도만은 친시장적으로 보완할 것을 제안한다. 다섯째, 재벌도 다른 일반 기업처럼 상법 또는 회사법의 적용을 받도록 하여야 한다.
참고문헌
김영용'안재욱'전용덕 공저, 지식인과 한국경제, 자유기업센터, 1996. 이재형'유승민, 대사업체와 재벌사업체간의 성장과 생산성, 한국개발연구원, 1994. 전용덕'김영용 공저, “복합통합과 경제계산”, 자유기업원 홈페이지 BP No. 37 (2002. 2. 15). Khanna, Tarun and Krishana Palepu, "The Right Way to Restructure Conglomerates in Emerging Markets," Harvard Business Review, July-August 1999, pp. 125-1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