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한반도 상황을 보면 북한 핵문제보다 오히려 더 큰 조명을 받고 있는 것이 북한의 위조지폐 제조 문제와 인권 문제다. 미국은 물론 북한도 핵문제 보다는 위조지폐를 훨씬 더 큰 문제로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다. 지난 4월 13일 김계관 북한 외무성 부상은 6자회담 재개와 관련 "우리는 많은 요구를 하는 것이 아니며 미국의 의지만 있다면 순간에 되는 것"이라 말하고 "마카오 방코 델타 아시아 은행의 동결자금을 내 손에 갖다 놓으면 되며 그 자금을 손에 쥐는 순간 회담장에 갈 것"이라고 말했다.
오랫동안 한국, 미국, 일본, 중국 등 관련국들은 북한을 6자 회담장으로 불러내기 위해 정말 여러 가지 방안을 강구 했었다. 위협도 하고 유혹도 해서 겨우 북한을 회담장에 불러내곤 했다. 물론 1년에 한 두 번도 채 만나지 못해 겨우 4번 만난 6자 회담은 거의 아무런 진전도 이루지 못했다. 그런데 북한 측이 미국이 마카오의 방코 델타 아시아에 대한 제재만 풀면 즉각 6자 회담에 복귀 하겠다고 말하는 것을 보니 위조지폐로 인한 미국의 북한 제제는 북한을 진정 다급한 상황으로 몰아가고 있는 모양이다. 수백만 주민이 아사하는 와중에도 꿋꿋이 버틴 북한이, 국제정치학자들이 가장 별 볼일 없는 제재 수단중 하나라고 간주하는 경제(금융)제재에 이처럼 휘청거리는 모습을 보이는 것은 아무래도 이상하다.
협상에 임하는 적대적인 국가들이 서로 밀치고 받고 하다가 한편이 다급해 하며 비틀거리는 상황을 볼 경우, 다른 상대방은 그 상황을 더욱 확실하게 이용하겠다고 생각하기 마련이다. 작년 9월 20일 부터 행하기 시작한 금융 제재가 예상외의 효과를 보기 시작하자 미국 사람들은 금융제재가 이처럼 큰 효과를 나타낼 것은 꿈도 꾸지 못했던 일이라고 말한다. 미국은 우연히 북한의 가장 취약한 부분 중 하나를 발견하게 된 것이다. 사실 애초 미국의 대 북한 전략은 핵무기 그 자체를 빼앗겠다는 것만은 아니었다. 미국의 대 북한 전략 목표는 북한 정권이 테러를 지원하지 않을 민주 정권으로 바꾸는데 있었다. 지금 미국은 북한의 위조지폐 사건을 계기로 본래 구상했던 대 북한 전략을 서서히 그러나 확실하게 밀고 나가고 있다.
2. 미국의 대북한 전략의 본질적 목표 : 9.11 이전과 이후
9.11 이전 세계에서 미국과 북한
본래 미국과 북한은 전략적 경쟁상대는 아니다. 정상적인 국제관계라면 미국이 북한을 적으로 삼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는 얘기다. 냉전 당시 미국은 북한을 국제 공산주의라는 맥락 아래 적으로 상정했을 뿐이다. 북한 그 자체가 아니라 북한의 뒤를 받쳐주고 있는 중국, 소련이라는 국제 공산주의를 상대로 삼았던 것이다.
그러나 냉전이 끝난 직후 미국은 북한과 직접적 대적 관계에 들어간 상황이 있었는데 1980년대 후반부터 1994년 10월 까지 지속된 북한 핵을 둘러싼 문제가 그것이었다. 물론 미국은 당시 북한을 냉전시대의 중국, 소련 수준의 위협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다만 북한의 핵무기 개발이 어느 선에서 제한되지 않을 경우 북한 핵무기가 중동의 여러 나라들에게 팔려나갈 우려(즉 핵확산의 우려)가 제기 되었고 미국은 북한 핵을 동결(freeze) 시키는 선에서 문제를 마무리 지었던 것이다.
북한이 더 이상 핵무기를 제조하지 않기로 약속 한다면 그 경우 북한이 이미 한두 발 정도 핵무기를 가지고 있다 해도 그것은 눈 감아 줄 수 있는 일이었다. 북한이 자살을 각오하지 않는 한 핵무기로 미국을 공격할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소련도, 공산중국도 그리고 공산주의 이데올로기 그 자체도 파탄 나버린 세상에서 북한이 교조주의적 공산주의 국가이던 핵폭탄을 몇 발 보유하고 있건 말건 그것은 미국에게 별 전략적 위협(Strategic Threat)은 아니었다.
그러던 세월은 2001년 9월 11일 끝났다. 냉전 종식 후 10년 정도 국제정치에 대해 관심 끊고도 살 수 있었던 미국은 갑자가 세계에서 제일 취약한 나라가 되어 버렸다. 갑자기 엄청난 역설적 상황에 당면한 것이다. 미국이 당면한 역설(逆說, paradox)이란 미국의 힘이 아무리 막강하다 할지라도 테러리스트들의 공격 앞에 자국 시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는데 무기력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9.11이후 미국이 보는 북한
9.11 당시 미국은 세계를 미국이 살기에 안전한 곳으로 만들고야 말겠다고 다짐했다. 이런 일은 여러 번 있었고 사용된 수사(修辭)도 비슷했다. 1 차 대전 당시 미국의 윌슨 대통령은 세계를 민주주의가 살기 안전한 곳으로 만들겠다며 전쟁에 참전했다. 윌슨적 이상주의자라고 불리는 부시 대통령도 마찬가지 이유와 논리로 반 테러전쟁을 개시 했다.
9.11이라는 상상 밖의 테러공격을 당한 미국은 다음에 닥쳐올 테러리즘은 핵무기 혹은 다른 대량파괴 무기를 사용한 것이 되리라는 최악의 상상을 하고 있다. 테러리스트들이 스스로 핵무기를 제조할 능력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미국은 테러리스트들에게 핵무기를 줄 의도와 능력이 있는 나라들이 몇 몇 있다고 믿는다. 미국을 미워하는 몇 나라들은 미국의 보복 위협을 피하면서도 테러리스트들을 통해 미국을 핵공격 할 수 있게 되었다.
결국 9.11은 미국의 전통적 핵 억지 전략을 붕괴 시켰다. 북한의 핵폭탄을 실은 북한 미사일이 북한에서부터 발사되어 미국으로 날아가는 것은 상상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북한이 테러리스트들에게 은밀히 돈 받고 건네준 미사일이 미국에서 폭발한다는 것은 9.11 이후 충분히 상상할 수 있는 일이 되었다는 의미다.
졸지에 미국은 북한의 핵폭탄을 완전히 다른 시각에서 보아야 하게 되었다. 한국 사람들 중 많은 사람들이 미국이 북한 핵만을 문제 삼는 것을 공정하지 못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 세상에는 핵무기를 보유한 나라가 다수 있다. 그러나 미국이 이 모든 나라가 보유한 핵무기를 다 우려하지는 않는다. 미국은 영국, 프랑스, 러시아, 중국, 심지어는 인도, 파키스탄이 보유하고 있는 핵에 대해서도 무어라 말하지 않는다. 여기서 우리는 문제의 본질이 핵무기 그 자체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수많은 핵폭탄 중에서 테러리스트들에게 핵을 건낼 수 있는 나라가 보유한 핵폭탄만이 문제인 것이다. 미국은 북한이야말로 테러리스트들 수중에 들어갈지 여부를 고려하지 않은 채 돈을 주는 상대방이라면 그 누구에게도 핵무기를 내다 팔수 있는 나라로 인식하고 있다.
결국 문제를 완전히, 일거에 해결하는 방법은 핵을 빼앗는 것이 아니라, 핵을 가지고 있어도 괜찮은(위험하지 않은) 나라로 바꾸는 일이다. 2005년 이후 미국의 대 북한 전략은 급격히 regime change를 지향하고 있으며 그래서 주요 이슈가 핵으로부터 인권과, 위조지폐, 마약 문제 등으로 옮겨가고 있는 것이다.
3. 2005년 이후 미국의 대 북한 전략변화 : '악의 축’에서 '폭정의 전초기지’(Outpost of Tyranny), 그리고 범죄 정권으로
이라크 전쟁을 치르면서 미국의 대 테러전쟁 전략은 확실히 진화하고 있다. 이라크 전쟁은 미국으로 하여금 우선, 싸우는 대상을 보다 분명하게 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교훈을 주었다. 그래서 미국은 '악의 축’ 이라는 애매한 용어 대신 '폭정의 전초기지’(暴政의 前哨基地)라는 보다 분명한 용어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악의축이란 말을 사용 할 경우 후세인이 악의 축이라는 말인지 이라크라는 나라가 악의 축이라는 말인지 불분명하다. 폭정의 전초기지라는 말을 사용함으로서 미국은 싸워야 할 대상이 독재국가의 지도자 혹은 정권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했다. 동시에 미국은 폭정아래 사는 국민들을 향해 미국은 그들 편이라는 사실을 부각시키기 시작했다. 여기서 자연스레 나오는 것이 인권정책이다. 이미 과거부터 존재하던 문제였지만 미국은 2005년 이후 본격적으로 북한의 인권 문제를 제기하기 시작했다. 북한 정권과 북한 주민을 본격적으로 분리시키기 위한 작업이다.
다음으로 미국은 북한 정권의 범죄성을 보다 노골적으로 세계에 알림과 동시에 구체적으로 북한 정권을 압박하는 정책을 구사하기 시작했다. 위조지폐야 말로 북한 정권의 범죄성을 부각시키는데 가장 적당한 이슈다. 핵문제, 인권 문제와 달리 위조지폐 문제는 “처벌” 을 통해서만 종료될 수 있다는 점에서 우리가 유의해야 할 문제다
4. 북한의 달러화 위조지폐 제조 현황과 미국의 조치
북한 위조지폐에 관해 논란이 많지만 미국은 이미 북한정부가 위조지폐를 제조 했다는 확실한 근거를 포착 한 것으로 보인다. 물론 북한은 위조지폐를 제조한 적이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한편 북한은 위조지폐를 만든자를 적발해서 엄중 처벌하겠다는 말을 함으로서 북한 내에서 위조지폐가 제조 되었다는 사실을 일부 시인하기는 했다.
2006년 3월 22일 미국 의회조사연구소(Congressional Research Service)는 북한의 달러화 위조지폐 현황에 관한 보고서를 제출했는데 동 보고서는 북한이 매년 약 1,500만 달러~2,500만 달러에 이르는 위조지폐를 찍어 내고 있으며, 북한 정권이 부인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4,500만 달러 이상의 북한산 위조 달러가 적발되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북한이 위조한 지폐는 대단히 정교하기 때문에 전문가들 조차 식별이 곤란 한 것으로 정평이 나 있을 정도며 북한의 위조지폐는 super note 혹은 super K라고 불릴 지경이다.
북한 위조지폐가 과연 사실인가를 의심하는 사람들의 질문에 대해 보고서 작성자중 한 사람인 펄 연구원은 '미국은 냉전 시대 소련공산당 서기장의 자동차 속 대화를 도청 할 수 있었다’고 말하면서 "북한 위조지폐 공장의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쯤이야" 라고 대답 했다. 동 보고서는 또한 한국 정부가 1998년 이전에는 북한 위조지폐 문제에 관해 미국과 협력 했다는 사실도 밝히고 있다. 우리 정부가 최근 북한의 위조지폐가 사실인지 모르겠다고 말하는 것을 반박하는 자료다. 북한의 위조지폐 문제는 진위 여부를 따지기에는 너무 오래된 문제다. LA Times는 이미 미국은 북한이 1989년 이후 위조지폐를 만들고 있었다고 주장한다. 이상을 종합하면 미국은 오랫동안 축적 되어온 문제를 최근의 상황에 적합하게 이슈화 시키고 있는 것이라 보면 될 것이다.
2005년 9월 19일 한국 언론들이 북한 핵이 타결되었다고 대서특필 하던 바로 그 무렵 미국은 북한의 위조지폐 돈세탁을 한 것으로 의심되는 마카오의 방코 델타 아시아(BDA) 은행에 대해 제재 조취를 취하기 시작했다. 최근 미국은 테러리스트들의 돈줄을 끊기 위해 대폭 강화된 미국의 애국법(Patriot Act)에 의거 BDA 뿐 아니라 북한 자체를 돈세탁 우려 대상으로 지목하고 이를 공포할 움직임조차 보이고 있다. 그동안 국민이 수백만씩 아사해도 꿈쩍하지 않았던 북한 정권은 BDA 하나가 처벌 받기 시작한지 불과 6개월 만에 흔들거리고 있다. 지난 2월 16일 김정일 생일날 선물을 주지 못했다는 보도도 나왔다. 미국은 현존 북한 정권의 붕괴라는 본래 목적을 달성하기 가장 좋은 호재를 만난 듯 계속 금융 제재의 고삐를 조일 것이다.
독일의 알게마니네 차이퉁 지는 2006년 2월 28일 자에서 “만일 미국이 (위조지폐에 관해) 북한의 책임이라는 구체적인 증거들을 제시한다면 이는 유엔 헌장에 따르면 전쟁의 이유가 될 수도 있다”고 보도 하고 있고 미국 일각에서는 김정일 정권을 기소 할 것이라는 이야기도 나오고 있다. 한국 정부는 그동안 김정일 정권을 어떻게 해서라도 자극하지 않는 것을 대북정책의 기조로 삼고 있었다. 그러나 미국은 결국 김정일을 범죄 집단의 괴수 정도로 비하하는 상황에 이르고 있다. 북한 문제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선을 넘어가고 있는 것이다.
앞으로 미국은 한국이 어떤 이유에서 던지 북한에 돈을 지원하는 경우 간만에 효과를 얻고 있다고 생각하는 금융제재 조치에 물 타기를 하는 것으로 부정적으로 생각할 것이다. 한반도 문제가 한층 복잡해지고 있다는 말이다. 이 복잡한 상황에 하나의 가이드라인이 될 수 있는 원칙이 있다. 그 원칙이란 우리의 대북한 정책은 북한 정권이 아니라 북한의 동포를 생각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춘근 / 政博. 자유기업원 부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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