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들어가는 말
2005년 중반이후 미국의 북한에 대한 관심은 핵문제로부터 다른 문제들로 옮겨가고 있다. 한국 정부와 언론은 2005년 9월 19일 북경회담의 결과를 보고 “북한 핵문제가 타결” 되었다고 말하며 흥분 했었지만 미국은 당시 이미 다른 이슈를 가지고 북한 문제를 확대 시키고 있던 중이었다. 물론 북한 핵문제 역시 지금까지 해결을 향한 아무런 진전도 없음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물론 전문가들은 정부와 언론이 말하는 '북한 핵 타결’ 주장이 근거 없는 낙관이라는 사실을 일찍이 지적 했다.
북한 문제가 핵 문제 만으로 해결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식한 미국은 북한 문제를 핵으로부터 다른 문제들로 서서히 그러나 확실하게 확대 시켜 나가기 시작했다. 작년 여름 이후 미국 정부 관리들의 북한에 대해 언급을 살펴보면 '북한 핵’ 혹은 '6자회담’ 보다 훨씬 더 자주 사용되는 말들이 '북한 인권’ 혹은 북한이 만든 '위조지폐’ 등이다. 앞으로 북한이 판매하고 있는 '가짜 담배’ 혹은 '마약’ 문제까지도 거론 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미국의 대 북한 정책은 물론 정교하게 수립된 미국의 세계 전략이라는 맥락 아래 수립되고 집행되는 것이다. 미국의 대 북한 전략의 본질을 이해 할 때 한반도 문제의 해결을 위해 우리가 택해야 할 바람직한 정책이 무엇인가를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2. 악의 축 에서 폭정의 전초기지, 그리고 범죄정권으로
냉전시대 동안 많은 미국 학자들은 소련은 장기적인 전략(strategy)을 가지고 있는 나라인 반면 미국은 단기적인 문제해결(problem solving)만이 있을 뿐 이라며 미국의 전략적 사고가 부족하다는 사실을 한탄했다. 그러나 9.11 이후 미국은 보다 체계적으로 장기적인 국가전략을 수립해서 실행에 옮기고 있는 한편, 단기적인 문제 해결에도 능란한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테러리스트의 공격 앞에 미국의 국가안보가 형편없이 취약하다는 사실을 비싼 대가를 치루고 배운 미국은 정교한 전략을 세우지 않을 수도 없는 형편이었다. 9.11 이후 미국은 '미국은 안전하지 못한 나라이며 미국이 안전한 세계가 되도록 현재의 세계를 바꿀 것’을 대전략의 근간으로 삼았다.
패권국은 현상유지정책을 택하는 것이 논리적으로 맞는 일이다. 일등의 지위에 오른 그 누구도 현상의 유지를 목표로 삼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테러전쟁이라는 역설적인 전쟁에 당면한 미국은 '현상타파’를 국가전략의 기초로 삼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세계에서 제일 힘이 막강한 나라가 현상 타파를 국가 전략으로 채택하게 된 21세기 초반의 국제체제는 그래서 과거 어느 시대와도 달리 역설적이며 불안정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다.
북한이, 미국이 상정한 현상타파 정책의 대상국 중 하나로 선정 되었다는 사실은 북한 문제의 본질을 이해하는 핵심적 요인이다.
2002년 1월 부시 대통령은 대 의회 연설을 통해 북한을 악의 축(Axis of Evil) 이라고 불렀다. 여러 가지 의미로, 여러 가지 차원에서 해석 될 수 있는 말이지만 악의 축 이라는 말이 함축하고 있는 본뜻은 '제거의 대상’ 이라는 뜻이다. 기독교에 국가의 근거를 두고 있는 미국이 어느 상대를 '악’ 이란 말로 표현 했을 때 이는 타협의 대상은 아니라는 뜻 이다. 그러나 '악의 축’ 이라는 수사(rhetoric) 는 국가와 국민의 구분이 명확하지 못하다는 문제가 있었다. 이라크 전체가 악이라는 뜻인지 후세인이 악이라는 뜻인지 애매한 것이다. 부시 행정부는 이라크 국민들을 미국 편으로 만들지 못한 상황에서 이라크 전쟁을 치른 결과 후세인을 축출 하는 데는 성공 했지만 이라크 국민의 지지를 확보하지 못해 전후 처리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이다.
이라크 전쟁으로부터 얻은 교훈은 부시 임기 제2기가 시작되는 2005년 적국을 지칭하기 위해 미국이 다시 채택한 용어에서 분명히 나타났다. 미국은 '악의 축’ 을 '폭정의 전초기지’(Outpost of Tyranny) 라는 새로운 용어로 부르기 시작한 것이다. 폭정(暴政) 이라는 말을 사용함으로서 미국이 상대할 대상이 나라가 아니라 정권(regime)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한 것이고, 이 말은 특히 북한을 주요 표적으로 삼은 것 이었다.
폭정의 전초기지라는 새로운 용어에서 자연스레 선택되는 전술은 적의 정권과 적의 국민을 구분하는 일이다. 단순한 구분이 아니라 적의 정권과 적의 국민을 적대 관계에 놓이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이 같은 전략을 수행하는데 유용한 수단이 바로 인권이다. 북한 정권을 폭정의 하나로 규정한 미국은 앞으로 폭정을 공격의 표적으로 삼을 것이며, 폭정으로부터 인권 탄압에 시달리는 사람들은 죄가 없으며, 미국은 이들을 보호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북한 수용소에 여러 해 갇혀 있다가 북한을 탈출한 강철환 기자를 백악관에 초청, 거의 한 시간가량 면담한 것도 미국의 대북한 인권 정책의 일환이었음은 말 할 필요도 없다. 미국은 북한 인권 이슈를 국제화 시켰으며, 북한의 정권과 북한의 국민을 인권이라는 이슈로서 분명하게 갈라놓았다.
미국은 북한 정권과 북한 주민을 갈라놓은 후, 북한 정권의 범죄적 성격을 강조하는 각종 이슈들을 제시하기 시작했다. 우선 미국은 위조지폐 이슈를 제기 함으로서 북한 정권의 범죄성을 부각 시키고 있다. 국제정치에서 한 나라가 상대방을 어떻게 인식하고 지칭하느냐에 따라 외교 정책의 목표와 결과는 판이하게 달라진다. 미국은 북한을 범죄 정권으로 보고 있으며 범죄정권은 그 속성상 처벌의 대상이다.
3. 미국 대북한 정책 변화의 본질과 의미
미국과 북한 관리들이 3월 7일 미국 뉴욕에서 만나 위폐 문제를 논의할 것이라는 발표가 있었다. 위조지폐에 대해 과연 '논의’가 이루어 질 수 있을지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위조지폐 문제는 핵문제, 인권문제와는 달리 '논의’될 성질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핵을 만들고 보유하는 나라를 범죄국가라고 말하지 않으며 인권문제가 열악한 나라도 범죄국가는 아니다. 그러나 위조지폐를 만든 나라는 범죄국가 이며 그렇기 때문에 북한과 미국이 위조지폐에 관해 벌이는 논의는 위조지폐를 '만들었다’ '만들지 않았다’의 논란일 뿐이다.
핵문제는 앞으로 핵을 만들지 않겠다고 약속하면 그 대가로 '상’을 받을 수도 있는 일이며 인권문제를 개선하는 경우 국제사회의 칭찬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위조지폐 문제는 '앞으로 절대로 만들지 않겠다’고 말한다면 지금까지는 만들었다는 범죄사실을 고백하는 일이 되어 '처벌’을 받아야 할 일이 되고 만다. 그래서 위조지폐 문제는 그것이 국제적인 것이든 국내적인 것이던 '논의’될 수 있는 문제라고 보기 곤란한 것이다.
그동안 북한은 위폐를 전혀 제조한 적이 없다고 말했고, 미국은 여러 정황으로 볼 때 북한이 정권 차원에서 위조지폐를 만든 것이 확실하다고 주장했다. 북한은 위조지폐를 만든 사람을 처단하겠다고 말했지만 미국은 북한이 북한 돈을 찍는 바로 그곳에서 달러화 위조지폐가 인쇄 되었다고 주장하는 판이다. 사실 북한 같은 정치구조를 가진 나라에서 민간인이 정부 몰래 위조지폐를 만들어 통용한다는 것은 믿을 수 없는 얘기다.
앞으로 미국은 국제사회에 주는 폭발력이 훨씬 더 큰 마약 문제를 제기할 수도 있다. 이미 마약을 선적하고 호주를 향하던 북한 선박이 노획되고 북한 선원들이 체포 된 사건도 발생한 바 있었다. 마약 외에도 북한이 1 년에 무려 20억 갑이나 만들었다는 가짜 양담배, 북한 외교관들이 각국 주재 대사관에서 저지르는 밀수를 비롯한 각종 불법 행위에 관한 자료를 미국은 범죄국가로 몰아가는 증거로 차례, 차례 제시할 태세다.
4. 미국 및 국제사회의 대북한 제재
한국 정부는 그동안 북한 문제에 대해서 소극적인 입장으로 일관했다. 문제의 본질을 설명하고 북한으로 하여금 올바르지 못한 행동을 그만두도록 일찌감치 설득해야만 했었다. 그러나 한국 정부는 그동안 북한의 잘못에 대해 대단히 소극적이었다. 북한 인권문제에 관한 표결에서 기권하는가 하면 북한이 제조한 위조 달라 문제는 근거가 불확실하다며 은근히 북한을 두둔 했다. 북한은 '한국은 모든 일에서 궁극적으로 북한 편’ 이라고 인식할지도 모르겠다. 만약 그렇다면 한국은 스스로 북한의 대외정책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하는 존재가 되기를 자처한 것이다.
한국이 북한에 대해 유화정책으로 일관하는 동안 미국을 비롯한 세계 각국은 이미 북한을 강력하게 제재하기 시작했다. 한국은 절대로 북한을 '무력’으로 제재하면 안 된다고 말해 왔지만 세계 많은 나라들이 해군력을 동원 북한의 불법 무역 행위를 차단하기 시작한지 이미 오래 되었다. 2004년 10월 하순 일본이 동해바다에서 주도한 PSI 훈련에는 미국, 호주, 프랑스를 포함한 18개국의 해군이 참여하기도 했다. 이미 2002년 년 말 예멘으로 수출하는 북한 미사일을 선적한 북한 화물선이 사우디아라비아 해역에서 미국의 지휘를 받은 스페인 해군 헬리콥터에 의해 수색 및 압수를 당했고, 2003년 4월에는 북한으로 수출 되는 것이라고 의심받은 독일제 알루미늄을 적재한 프랑스 화물선이 지중해상에서 미국 해군에게 검색 당하고 화물을 모두 뺏기는 사건도 발생 했다.
일본의 군사 전문가들은 F-117과 같은 미국의 최신예 스텔스 폭격기들은 이미 북한 상공을 날며 작전계획 5030을 수행하고 있는 중이라고 분석하고 있다. 작전 계획 5030이란 럼스펠드 장관이 고안한 것으로 준 군사작전(pre-Conflict Maneuver)을 통해 그나마 한계에 봉착한 북한의 군사자원을 고갈 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작전이다. 예로서 미국 전투기들이 북한을 향해 위협 비행을 하면, 북한의 전투기들이 이에 대응하기 위해 출격을 할 것이고, 미국 전투기들은 다시 회항함으로서 전투는 벌이지 않고, 북한의 기름만을 소진 시킨다는 것이다.
미국은 이미 방코 델타 아시아 은행의 거래 중지를 통해 북한의 자금줄을 엄청나게 조이고 있다. 주민들이 아무리 굶어도 문제없을 것 같았던 북한 정권은 다가오는 압력에 반응하기 시작한 것 같다. 오래 전에 해결했으면 북한에도 좋았을 일들이 이제 시간이 많이 지체 되었다. 이제 북한의 문제는 문제가 너무 확대 되었고 해결 방식도 다르게 되었다. 이제 미국은 마치 상대방의 급소를 발견한 독수리처럼 돌진하는 형국이다.
늦었지만 한국 정부는 북한 정권에게 문제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고, 어려운 결단을 촉구해야 한다. 위조지폐 문제에 대해서는 중국조차 미국에 협력하고 있는 상황이다. 북한 문제가 또다시 강대국 권력정치의 산물이 되면 결코 안 된다. 이런 상황을 방지할 책임은 당연히 현 한국 정부의 몫이다.
이춘근 / 政博. 자유기업원 부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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