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이즈미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문제로 불편한 관계에 있었던 중일관계가 최근 역사교과서 문제, 영유권 문제 등으로 갈등의 증폭과 함께 진통을겪고있다.
본고에서는 탈냉전시대의 도래에 따른 전환기의 국제환경 속에서 전개되고 있는 중ㆍ일관계에 관해 살펴 본 후, 중ㆍ일관계의 갈등 요인 및 실태 즉, 과거사 문제에 의한 중ㆍ일 국민의 정서적 갈등, 동지나해의 무인군도(無人群島)의 영유권을 둘러싼 중ㆍ일의 갈등, 미ㆍ일동맹의 강화와 일본의 국제적 사회에서의 역할 증대에 따른 중ㆍ일의 갈등 등에 관해서 살펴보기로 한다.
I. 탈냉전시대의 중일관계
탈냉전시대의 도래와 더불어 새로운 국제질서가 형성되면서, 중ㆍ일관계도 새로운 전환기를 맞이하여야 했다. 냉전후 유동적인 국제질서속에서 중국은 대외적으로 자기주장을 강하게 하기 시작하였고, 일본 또한 21세기의 정치대국을 지향하여 국제사회의 역할증대를 추구하면서 중ㆍ일 양국간에는 경제적 관계는 협력, 정치군사적 관계는 갈등관계가 조성되기 시작했다.
냉전직후 중ㆍ일 양국은 양자관계를 '세계속의 중일관계’로서 한단계 더 높이 발전시키기 위하여 1991년 8월 가이후 도시키 일본 총리의 방중, 1992년 4월 장쩌민 국가주석의 방일 및 동년 10월 일본 천황의 방중, 등을 실현시켰고, 나아가 1994년 3월부터는 일본 방위청과ㆍ 중국 국방부간의 고위안보대화를 시작했지만, 1994년 5월 호소카와 내각의 나가노 법부장관의 '난징(南京) 학살 날조' 발언, 동년 10월부터 전개된 중국의 핵실험과 일본의 '중국 경계론’ 등으로 인하여 중ㆍ일간에는 갈등이 야기되기 시작했다.
이와 같은 양국 관계의 불편한 상황은 1996년 이후 계속되고 있는 센카쿠ㆍ조어도 열도의 영유권를 둘러싼 갈등, 하시모토 총리의 야스쿠니신사 참배, 2000년 모리 총리의 '신(神)의 국가' 발언 2001년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 및 고이즈미 총리의 야스쿠니신사 참배 등으로 중국 국민의 정서적 반감속에서 지속되었다.
따라서, 중ㆍ일 양국은 2003년 3월 후진타오 중국 국가주석을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지도체제의 출범을 계기로 고위인사의 왕래 등 관계개선을 위한 노력을 전개하였고, 그 결과, 5월 31일에 러시아의 페테르부르그시에서 정도(定都) 300주년 기념식에 참석한 양국 정상의 회담이 개최되기도 하였으며, 중ㆍ일관계는 갈등이 다소 완화되고 관계개선을 향해 나아가게 되었다.
그러나, 2003년 8월 4일에 일어난 '일본 제국주의의 유기 화학무기 폭발사건’의 처리 문제, 9월 18일 중국 언론에 의해 폭로된 일본인 집단 매춘관광, 10월 29일 시안(西安) 서북대학 교내 파티시 일본 유학생의 음란공연에 대한 중국 교수 및 학생들의 시위사건 등으로 인하여 중국내 반일 감정이 재차 심화되기 시작하였다.
따라서, 중ㆍ일관계의 개선노력은 한계에 직면하게 되었고, 2005년에 접어들어서는 일본정부의 왜곡 역사교과서 검정 통과 및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 진출 추구 등에 중국인들이 격분하면서 격한 반일 시위가 중국 대륙의 전역에 확산되기 시작하였다.
2005년 4월 2일 쓰촨(四川)성 청두(成都)에서 시작된 반일 시위는 열흘 만에 전국적으로 번졌다. 4월 9일 베이징대학 및 칭화대학 등의 학생들이 주도한 시위에 2만 명이 참가한 것을 비롯하여 10일의 허난(河南)성 정저우(鄭州) 시위에는 수만 명이 참여하였고, 16일에는 1919년 5ㆍ4운동 이래 최대 규모의 반일 시위가 상하이를 비롯하여 항저우, 텐진 등 주요 도시 곳곳에서 일어났으며, 17일에는 선전, 선양(瀋陽), 홍콩 등으로 확산되었다.
특히, 과격했던 상하이의 반일 시위에서는 10만명이 넘는 시위대가 일본총영사관을 에워싼 채 돌을 던지고, 일본 상점과 일제 자동차를 공격하는 폭력양상으로 전개되었다.
이와 같은 중국의 격렬한 반일 시위는 일본내 우익보수세력의 반중 감정을 자극하였고, 아울러 중ㆍ일간의 '기 싸움’ 양상과 함께 일본정부의 단호한 대중국 비판이 야기되도록 하였다.
2005년 4월 17일 베이징 중ㆍ일 외교장관 회담직후 마치무라 노부다카 외무장관의 대중국 비판 발언과 더불어 일본 정치권에서는 대중국 비판의 강경발언이 잇따라 터져나왔고, 4월 23일에는 일본의 우익단체와 일반시민 2000여명이 '중국타도’ '2008년 베이징 올림픽 거부’ 등이 적힌 플래카드를 흔들며 중국의 '반일 시위’에 항의하는 '반중 집회’를 전개하였다. 즉, 중국의 격렬한 반일시위 및 일본의 단호한 대중 강경 대응으로 인하여, 중ㆍ일관계의 갈등은 정면 충돌로 치닫으며 증폭되었다.
이처럼 긴장고조의 중ㆍ일관계는 중국정부가 반일 시위가 자칫 반정부 소요사태로 악화될 것을 우려하여 엄중 경고를 내리고, 나아가 고이즈미 일본 총리가 제1회 아시아ㆍ아프리카회의에서 과거 일제침략과 식민지 지배에 대한 반성과 사과’를 표명함 더불어 중ㆍ일정상회담을 가짐으로써 다소 진정국면으로 접어들게 되었다. 예컨대, 후진타오 중국 국가주석이 4월 21일 반일 시위를 경고한 데 이어 공안당국은 반일 집회에 대해 엄중경고를 보냈다. 고이즈미 일본 총리는 4월 22일 인도네시아의 자카르타에서 개최된 제1회 아시아ㆍ아프리카회의에서 '과거 일제침략과 식민지 지배에 대해 통절한 반성과 마음으로부터의 사과’를 표명한 뒤, 23일에 후진타오 중국 국가주석과 정상회담을 가졌다. 중ㆍ일 정상회담 직후, 24일 일본 국내에서는 아사히 신문에서는 중ㆍ일 갈등의 불씨로 작용했던 고이즈미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에 대해 전국 유권자 808명을 상대로 여론조사를 실시하였는데, 그 결과 비판 여론이 크게 상승한 것으로 나타났다. 아사히 신문의 여론 조사 결과에 의하면, 찬성 36%, 반대 48%의 의견이 제시되었다.
현재, 중ㆍ일관계는 과거사 문제에 의한 중국국민들의 정서적 갈등이 내재되어 있는 상태에서 영토 영유권 문제, 지역 패권 경쟁 등의 불씨를 내포하고 있으므로, 이들 갈등 요인이 서로 얽혀 증폭될 수 있는 불안정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II. 역사문제와 중ㆍ일 정서적 갈등
1894년에 발발한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바 있는 일본은 1930년대에 접어들면서 군부의 정치적 영향력이 한층 증대되면서, 1931년 9월 만주사변을 일으켰고, 1937년 7월 중일전쟁을 도발하였다. 이후, 1945년 8월 일본이 패망할 때까지 중ㆍ일간에는 8년간 역사적 휴유증이 남는 참혹한 전쟁이 지속되었다.
일본의 중국대륙침략정책이 추진되면서 중국대륙에서는 무고한 많은 중국인들이 희생되었고, 특히 일본군의 점령지에서는 수많은 중국인들이 억울하게 죽음을 당하였다. 예컨대, 1937년 12월 당시 국민당 정부의 수도였던 난징이 점령될 때에는 약 30만의 중국인이 일본군에 의해 비참하게 학살되었다. 이 '난징 대학살’사건은 중일전쟁시 일본군이 자행한 잔혹한 행위의 상징적인 사건이기도 하다. 또 많은 중국인들은 일본군의 세균전ㆍ독가스전을 위해 설치된 731부대 등에서 인체실험 등으로 희생되어야 했다. 따라서 제2차전쟁이 끝난후, 전면적인 중ㆍ일전쟁을 일으킨 고노에 후미마로 총리는 자살하였고, 관동군 지도자들은 처형당했다.
이와 같은 중ㆍ일전쟁의 비극적인 사건들은 역사의 흐름과 더불어 잊혀져는 '죽은 과거사’가 아니고, 생존자들의 증언, 기록사진, 보존되고 있는 당시의 신문기사 등을 통하여 오늘날에는 중국인들의 머리 속 및 가슴 속에 '살아있는 역사’로서 존재하고 있다. 즉 '침략자와 피침략자’, '가해자 와 피해자’ 등 중국인들의 역사적 피해의식, 정신적 아픔은 반일감정의 기저를 이루고 있고, 일본 정치인들이 전전(戰前)의 행위를 정당화하려는 발언을 할 경우, 중국인들은 강한 반발을 나타내는 것이다.
III. 중ㆍ일의 영유권 갈등
동지나해의 한 무인군도(無人群島)에 대한 영유권을 둘러싸고 중ㆍ일간에는 최근까지 갈등을 빚었다. 5개의 섬과 3개의 암초로 구성되어 있는 이 무인군도의 일본명은 센카쿠(尖閣)열도, 중국명은 다오이다오(釣魚島), 대만명은 다오이타이(釣魚臺)인데, 중국(복주)으로부터 동쪽으로 420Km, 대만의 기륭(基隆)으로부터 북동쪽으로 약 190Km, 일본 오끼나와의 나하(那霞)로부터 남서쪽으로 약 420K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북위 25 42', 동경 123 30' 지점에 위치).
그다지 쓸모가 없었던 센카쿠 열도는 부근의 대륙붕에 풍부한 석유자원, 천연가스층이 묻혀있는 것이 밝혀지면서 주목을 끌기 시작하였고, 중국ㆍ일본ㆍ대만간의 영유권 분쟁이 발발하게 되었다.
최근 석유회사들은 동지나해 해역에 100억-1,000억 배럴의 원유가 매장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는데, 중국과 일본은 다음과 같은 센카쿠열도ㆍ다오이다오의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다.
먼저 중국측의 다오이다오의 영유권에 대한 주장을 살펴보면 그 요지는 다음과 같다.
첫째, 중국이 다오이다오를 영유한 기록은 1372년부터 나타난다. 즉, 명나라(1369-1644)의 시조인 홍무제(洪武帝)가 유큐(流球)열도를 중국에 복속시킴과 더불어 다오이다오를 영유하였다.
둘째, 중국측의 역사적 문헌에 따르면, 다오이다오는 중국연안에 침입하는 왜구를 막기 위한 중국 복주성(福州省)의 5개 해군 초개구역중의 하나이다. 또 한 칙서에는, 1893년 청나라의 서태후(西太后)가 한 신하에게 하사하였다는 기록도 있다.
셋째, 청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종결됨과 더불어 1895년 4월 17일에 시모노세키 조약(下關條約)이 체결되었는데, 이때 다오이다오는 동조약의 2조에 의거하여 “다오이다오에 인접하거나 부속된 도서”로서 일본에 강제할양되었다. 따라서 제2차대전에 패배한 일본은 카이로 선언 및 포초담 선언에 의거하여 다오이다오를 중국에 반환ㆍ복귀시켜야 한다.
넷째, 일본과 대만과의 국교정상화를 위하여 1952년 4월에 일화평화조약(日華平和條約)이 체결되었는데, 이 조약에서는 1941년 이전 일본의 강압에 의하여 체결된 모든 조약은 당초부터 무효(null and void)인 것이 합의되었다. 즉, 시모노세끼 조약의 무효와 더불어 다오이다오에 대한 일본의 어떠한 영유권도 법적근거를 상실하게 된다.
이상과 같은 주장과 함께, 중국은 1992년 2월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에서 다오이다오의 영유권을 주장하는 영해법을 채택하였다.
반면, 일본의 센카쿠열도 영유권에 대한 주장은 다음과 같다.
첫째, 중국측의 주장처럼, 14세기 후반경에 중국인에 의해 센카쿠 열도의 존재가 알려졌지만, 1884년 일본인 고가 다쓰시로(古賀辰四郞)가 이 섬을 개발하기 전까지 중국은 영유의 의사로서 이 섬을 점유하거나 경영한 실적이 없다. 즉, 중국령이라고 인정할 아무런 근거가 없다.
둘째, 1879년 류큐(流球)왕국이 일본에 강점된 후, 오끼나와 현감(縣監)은 이 섬을 오끼나와현(縣)에 편입시킴과 더불어 경계표지를 세울 것을 일본 중앙정부에 세차례나 건의하였다. 그 결과, 일본 각료회의에서는 1879년 1월 14일 영토편입과 경계표지 건설을 결정하였고, 동년 4월 1일 칙령 제13호를 통하여 국내법상 영토 편입조치를 시행하였다. 따라서 센카쿠 열도의 영토편입은 청일전쟁 및 시모노세키 조약과 무관하다. 1895년에 체결된 시모노세키 조약에 의해 일본이 새롭게 청국으로부터 획득한 영토는 요동반도, 대만, 팽호열도(澎湖列島)이다.
셋째, 1951년 1월 일본은 주권을 회복하기 위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을 맺었다. 동 조약의 2조에서 언급하고 있는 '일본의 영토주권이 배제되어야 할 범위’에 센카쿠 열도는 포함되어 있지 않다. 즉 동 조약의 제3조에 의해 미국에 이양되었다.
넷째, 1972년 5월 15일 오끼나와 반환조약의 발효와 더불어 센카쿠 열도는 미국 관할에서 일본영토로 복귀되었다.
이상과 같이 중ㆍ일 양국은 센카쿠열도ㆍ다오이다오의 영유권에 관하여 서로 다른 주장을 펼치고 있는데, 최근 중국의 동지나해 가스전 개발이 전개되면서 영유권 분쟁은 자원분쟁과 더불어 심화되고 있다.
IV. 미ㆍ일동맹의 강화에 따른 일본의 군사적 역할증대와 중ㆍ일 갈등
1972년 중ㆍ일 국교정상화이후, 중ㆍ일관계는 미국의 세계전략 및 아시아ㆍ태평양 전략에 따른 반소 통일전선의 틀 내에서 형성되었으므로, 파워 게임적 갈등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소련의 해체에 따른 탈냉전시대의 도래와 더불어 미ㆍ일 안전보장체제가 확대ㆍ발전되고 일본의 정치ㆍ군사적 역할이 증대되면서, 중ㆍ일간에는 정치ㆍ군사적 갈등의 조짐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즉, 1996년 4월 「미ㆍ일 안전보장 공동선언 : 21세기를 향한 동맹」(Japan-U.S. Joint Declaration on Security - Alliance for the 21st Century, 이하 '미일 신안보 공동선언')의 발표와 더불어 1997년 9월 새로운 미ㆍ일 「방위협력지침」이 제정되면서 중ㆍ일 정치ㆍ군사적 갈등이 표면화되어 나타나기 시작했다. 미ㆍ일 신「방위협력지침」은 '일본주변지역 유사시 범위’를 지리적 개념이 아닌 '사태의 성질’에 따른 상황적 개념으로 규정함과 더불어 일본의 군사적 역할 범위가 아시아ㆍ태평양 지역으로 탄력적으로 확대될 수 있는 내용을 담고 있는데, 이에 대해
중국은 (1) 중국ㆍ대만의 분열 고착 기도 및 중국 주도의 통일을 저지, (2) 미ㆍ일 신「방위협력지침」의 범위에 대만해협 포함, (3) '중국 포위망’ 구축의 일환으로 미ㆍ일 신「방위협력지침」 제정 등 매우 부정적인 인식을 나타내었다.
따라서 중국은 미ㆍ일 견제를 위한 러시아와의 전략적 연대를 추진하기도 하였고, 일본은 중국의 부정적인 시각, 경계, 우려 등을 의식하여 안보협의를 위한 각료급 인사의 교류 등 중ㆍ일 군사협력의 강화 및 활성화를 추진하였다.
그러나, 최근 미ㆍ일 안전보장체제를 바탕으로 한 일본의 자위대 해외활동의 활성화, 미국의 새로운 군사변환 전략 및 주일 미군 기지의 재편에 따른 일본의 전략적 위상 제고 등 미일동맹의 강화가 계속 추구되고, 아울러 2004년 12월에 발표된 신「방위계획의 대강」에서는 일본의 안보 역할 증대와 더불어 공식문건으로서는 처음으로 중국을 안보 불안 요인으로 지적함으로써, 중국의 반발과 함께 중ㆍ일의 정치ㆍ군사적 갈등은 한층 커지게 되었다.
일본이 21세기 국제지도국을 지향하여 유엔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의 진출을 추진함과 더불어 군사력 등 하드파워의 질적 강화 및 헌법개정 등 안보관련 소프트 파워의 개혁을 계속해서 추구해 갈 경우, 중ㆍ일의 정치ㆍ군사적 및 파워 게임적 갈등은 보다 심화될 것이다.
배정호 / 통일연구원 선임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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