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들어가는 말
유럽통합이 가속화 되고 있다. 1951년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벨기에, 네덜란드, 룩셈부르크 등 6개국이 참여했던 유럽석탄철강공동체(ECSC)가 무려 53년만에 회원국 25개국의 공동체로 성장했고 좀처럼 합의에 이루지 못할 것 같았던 헌법안도 가결되는 쾌거를 올렸다. 이에 따라 노르웨이와 스위스를 제외한 서유럽 모든 국가와 폴란드, 헝가리, 체코 등 주요 동유럽 국가들이 참여한 범유럽 공동체의 기틀이 마련되었다.
유럽의 이런 변화는 냉전 이후 소련의 영향력 약화와 초강대국 미국으로 특징지워지는 21세기 국제사회의 역학에 새로운 변화를 시사하고 있다. 국제사회에 통합된 유럽의 영향력이 거세질 것이고 미국 또한 유럽의 협조와 공조없이 국제질서를 유지하기가 어려워질 것이다. 경제적으로도 유럽연합(EU)은 인구 4억5천여만명, 국내총생산(GDP) 9조 4천억 달러로 미국에 버금가는 규모를 갖추게 되었다. 상품 교역면에서는 오히려 미국을 능가하고 있다. 즉 유럽통합이 강력한 유럽 재건이라는 목표로 차질없이 추진될 경우 세계는 유럽이라는 변수에 정치적, 경제적으로 크게 좌우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유럽연합에 대한 정보를 갖추고 통합과정에 대한 이해를 높이는 것은 향후 우리사회의 미래를 관리한다는 측면에서 필요하다.
2. 유럽연합(EU)의 주요 아젠다
2004년 들어 유럽연합은 몇가지 주요 일정을 처리했다. 5월 1일을 기해 10개 신규 회원국이 유럽연합에 가입했고 6월 10일 ~ 13일에는 제6대 유럽의회 선거가 치러졌다. 그리고 6월 18일 브뤼셀 유럽 정상회담에서는 마침내 헌법안이 가결되었다.
2.1 유럽연합(EU)의 확대
지난 5월 1일 유럽연합은 10개국의 회원가입신청을 받아들임에 따라 15개 서유럽 국가 중심의 유럽연합이 25개국으로 확대되었다. 추가로 회원국이 된 나라는 구 소련에서 독립한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등 발트 연안 3개국과 동유럽 국가인 폴란드, 헝가리, 체코, 슬로바키아, 슬로베니아 5개국 그리고 키프러스와 말타 등이다.
새로 가입한 10개 회원국은 기존의 회원국에 비해 소국이다. 인구 3천8백만명인 폴란드를 제외하고 인구 1천만명 미만의 소국이다. 폴란드를 제외한 9개국의 인구가 폴란드 인구보다 적은 3천6백만여명에 불과하다. 에스토니아 140만, 라트비아 240만, 말타 40만, 슬로베니아 200만, 키프러스 80만명이며 1천만명이 넘는 나라는 폴란드, 체코(1천30만명), 헝가리(1천20만명)에 불과하다. 10개국의 총인구가 7천480만명으로 기존 15개 회원국 인구수 3억8천만명의 20%에도 못미친다.
경제규모도 기존 회원국의 총 GDP인 8조8천억 유로의 5%에도 미달하는 4천38억 유로에 불과하다.
2.2 제6대 유럽의회 구성
이번 유럽의회 선거는 국가에 따라 6월 1일부터 13일까지 치러졌다. 대부분의 나라가 13일에 선거를 치른 반면 영국, 네덜란드가 10일, 아일랜드는 11일, 라트비아, 말타, 이탈리아가 12일에 각각 선거를 치렀다. 총 3억 5천만명의 유권자가 732명의 의원을 뽑는 선거로 세계 최대의 규모였다. 후보자만 해도 14,670명으로 이들 중에는 모델, 팝스타, 스포츠맨 및 포르노 배우 등이 포함되었다.
732명의 의석은 25개 회원국의 인구수에 따라 독일에 최대의석인 99석, 영국과 프랑스에 각각 78석이 배정되었고 인구 40만명의 말타에는 5석이 돌아갔다. 이외에도 벨기에, 그리스, 체코, 헝가리, 포르투갈이 각각 24석, 스페인과 폴란드가 54석, 오스트리아 18석, 덴마크, 슬로바키아, 핀란드 14석, 아일랜드와 리투아니아가 13석을 배정받았다. 10석 미만인 나라는 말타 이외에 9석을 배정받은 라트비아. 7석의 슬로베니아, 6석의 룩셈부르크, 키프러스와 에스토니아 등 6 나라다.
선거결과 보수당이 276석을 확보해 37.7%로 제1당이 되었고 사회민주당이 200석으로 27.3%로 제2당을 차지했다. 그밖에 자유의 가치를 내세운 자유당이 66석, 좌파연합이 39석, 녹색당 42석 그리고 유럽회의론자들이 15석을 차지한 것으로 나타났다.
2.3 유럽헌법안 가결
유럽연합(EU)의 헌법은 1990년대에 논의가 시작되었고 2002년 유럽장래문제 협의회의 발의를 거쳐 작년에 초안이 만들어졌으나 스페인과 폴란드(당시 준회원국)의 반대로 채택되지 못했다. 각종 법안에 대한 의결정족수를 두고 두 나라가 독일, 프랑스, 영국 등 대국의 영향력이 너무 강하다는 이유를 제기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의결정족수는 회원국 수의 50%, 회원국 총인구의 60%의 찬성이었다.
6월 17일부터 브뤼셀에 모인 25개국 정상들은 18일 헌법안에 대한 최종 조율을 시작했다. 작년에 문제가 됐던 '이중 다수결 제도’에 대해 수정안이 올해 순번 의장국인 아일랜드에 의해 제출됐고 스페인과 폴란드가 이에 동의함으로 헌법안이 최종 확정되었다.
이번에 통과된 유럽연합(EU) 헌법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기본권 관련사항
유럽연합은 인간의 존엄성을 중시하고 자유민주주의, 평등, 법치주의 정신의 바탕 위에 건설되었다. 표현의 자유, 종교의 자유, 교육 노동조건 등 50개항의 기본권이 천명되었고 2007년부터 발효될 예정이다.
둘째, 의사결정방식
유럽연합의 의사결정은 '이중 다수결제’이다. 이 제도는 회원국과 회원국 전체인구의 의견을 동시에 의사결정과정에서 반영하도록 하고 있다. 작년 헌법안을 일부 수정해 통과한 내용으로 주요 정책과 법안에 대한 의결정족수를 회원국 수의 55%와 회원국 총인구의 65%로 해 독일, 영국, 프랑스 등 큰 나라의 독주를 막도록 했다. 2009년 11월부터 적용한다.
셋째, 대통령과 외무장관 신설
유럽연합을 대외적으로 대표하게될 대통령과 외무장관직을 신설한다. 대통령은 25개 회원국 정상회담에서 선출하며 임기는 2년 6개월이다. 1회에 한해 연임할 수 있다. 외무장관은 5년 임기로 외교, 안보정책에 있어 유럽연합을 대표한다.
넷째, 집행위원회 구성
현재 30명인 집행위원을 2014년부터 전체 회원국 수의 3분의 2 규모로 축소한다.
2.4 향후과제와 문제점
유럽이 빅뱅을 이루고 헌법안에 대한 정상들의 합의가 있었지만 향후 유럽통합의 과정이 순탄한 것만은 아니다. 우선 새회원국의 1인당 GDP는 유럽연합 평균의 40% 수준으로 이들 국가가 기존 회원국들의 경제수준을 따라잡기 위해서는 나라별로 20~50년 가량 걸린다는 시각도 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유럽연합(EU) 집행위원회는 2004년 5월부터 2006년 말까지 신규 회원국들에게 217억유로(약 30조원)의 재정을 지원할 것이지만 이에 대한 기존 회원국 국민들의 불만도 가중되고 있다. 당장 눈에 띄는 경제적 이득은 별로 없는 데 엄청난 지원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리스와 포르투갈 같은 기존 회원국들은 더 가난한 신규 회원국들로 인해 자기 몫을 찾지 못할 것을 두려워하고 있다. 외국인 투자자는 물론이고 국내 투자자들도 저렴한 노동력을 찾아 동유럽으로 이동하려는 현상도 경계의 대상이다.
유럽 정상회의에서 가결된 주요 정책들이 회원국 내 비준절차를 거쳐야 하는 것도 유럽연합의 미래를 불투명하게 하고 있다. 심지어 국민투표를 통해 주요 정책을 결정해야 하는 나라들도 있다.
EU가 단일 경제권으로 원활하게 작동하기 위해서도 국가 간 빈부 격차가 좁혀져야 하는 등 넘어야 할 산도 많다. 새 회원국들은 EU에 가입해도 당장 단일통화인 유로(euro)를 사용하지 못한다. 유로화를 사용하려면 재정수지의 건전성을 회복해야 하고 금리와 물가를 안정시켜야 한다. 또한 적어도 2년간 환율을 안정적으로 운용해야 하는 등의 조건을 갖추어야 하기 때문이다. 현재로선 물가상승률 1.6%, 장기금리 6.4%, 재정적자가 GDP의 0% 수준이고, 공공부채도 GDP의 5.4%에 불과한 에스토니아가 가장 유력하지만 다른 나라들이 문제다.
집행위원장을 둘러싼 각국의 힘겨루기도 쉽게 해결될 것 같지 않다. 오는 10월말로 임기가 끝나는 로마노 프로디 위원장의 후임을 두고 회원국들 간 이견이 분분하다. 차기 집행위원장으로 거론되는 인물은 기 베르호프스타트 벨기에 총리, 장 클로드 융커 룩셈부르크 총리, 콘스탄티노스 시미티스 전 그리스 총리, 하비에르 솔라나 EU 대외정책담당 대표 등이다. 현재 베르호프스타트 벨기에 총리가 가장 유력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으나 영국의 반대가 거세다. 영국은 그를 '위험한 통합론자’라고 비판하고 있으나 EU 통합에 적극적인 독일과 프랑스는 베르호프스타트를 지지하고 있다.
이 밖에도 홍콩 총독을 지낸 크리스 패튼(62) 유럽연합(EU) 대외관계담당 집행위원도 차기 EU 집행위원장 후보로 급부상하고 있다. 패튼 위원은 영국과 프랑스, 아일랜드의 지지를 받고 있지만 EU 내 중소 국가들이 영국과 독일, 프랑스 등 이른바 '3대 강국’ 출신의 집행위원장직 진출을 원하지 않고 있어 차기 집행위원장을 둘러싼 회원국 간의 갈등이 쉽사리 조정될 것 같지 않다. 영국이 유로화를 채택하지 않고 있는 것도 여전히 문제로 남아있다.
3. 유럽연합과 국제사회
유럽연합의 확대와 헌법안 통과를 계기로 유럽의 정치적, 경제적 역할이 새롭게 부각되고 있다. 세계 최대 역내시장의 가동과 함께 동,서 유럽간 분업이 본격화 될 것이며 국제사회에 대한 정치적 비중도 크게 증가할 것으로 예상된다.
동유럽 주요국가가 유럽연합의 회원국이 확정된 이후 구 사회주의 사회에 커다란 변화의 바람이 일고 있다. 전 세계로부터 주요 브랜드와 상품들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다. 불과 몇 년 전만해도 초콜릿, 운동화, 식료품와 같은 생필품조차 부족했던 것이 이제는 상점에 물건이 넘쳐나고 있다. 사람들은 정부가 모든 것을 해결해 주던 과거에 대한 향수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젊은 이들을 중심으로 열심히 일한 만큼 보상이 주어지는 사회에 대한 기대와 가능성이 높아가고 있다.
이런 가운데 동유럽은 서유럽을 비롯한 전 세계 투자자들의 관심을 끌고 있다. 주요 동유럽 국가들이 EU에 가입함에 따라 회원국의 지위를 누리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기업들은 원하는 곳에 자유롭게 투자할 수 있게 되었고 관세 비관세 장벽에 구애받지 않게 되었다.
4억 5천여만명의 역내시장이 하나의 시장이 된 것이고 미국을 능가하는 2조 3천억 달러규모의 교역이 자유롭게 이루어지게 되었다. 기업은 가장 생산비가 저렴하고 기업환경이 좋은 나라로 생산기지를 이동할 것이고 생산품들은 아무런 장벽없이 유럽각국의 시장을 파고 들 것이다.
네덜란드 필립 사가 TV 생산기지 일부를 헝가리로 이전키로 했고 서유럽의 제약사들은 동유럽에 현지 생산체제를 마련키로 했다. 특히 자동차 회사의 동유럽 진출은 가장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푸조와 토요타가 합작해 체코에 현지공장을 세우기로 했고 프랑스의 푸조와 시트로엥 양대회사는 중,동부 유럽에 7억 유로를 투자키로 했다. 독일의 주요 자동차 회사와 지멘스 등 주요 기업들도 동유럽 진출을 염두에 둔 조사활동에 여념이 없다.
우리나라의 경우도 동유럽 진출을 위한 노력이 눈에 띄게 늘고 있다. 기아 자동차가 연산 30만대 규모의 공장을 슬로바키아에 세우기로 했고 자동차 부품을 생산하는 10여개 중소기업도 슬로바키아에 동반 진출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이들은 기아차 뿐 아니라 폴크스바겐, 도요타, 아우디 등 이미 동유럽에 진출한 자동차 업체에 대한 부품 공급도 겨냥하고 있다. 한국타이어도 최근 동유럽에 공장을 설립한다는 방침을 세우고 태스크포스 팀을 가동하고 있다.
삼성전자도 올해 초 영국 윈야드 공장과 스페인 바르셀로나 공장을 폐쇄하고 생산라인을 동유럽의 헝가리와 슬로바키아 공장으로 이전했다. 영국과 스페인의 임금이 슬로바키아와 헝가리의 5~6배에 이르기 때문이다. 이 외에도 현대 모비스, 화섬업체 효성, 한일이화, 두원공조 등이 동유럽 진출을 적극 고려하고 있다.
특히 향후 동서 유럽간 분업이 본격화 될 것으로 보인다. 인건비가 저렴한 동유럽에 생산기지를 두고 서유럽에는 R&D, 디자인, 마케팅, 판매법인을 특화해 생산성을 높이고 국제경쟁력을 강화한다는 전략이다. 현재 영국, 독일 등 기존 회원국의 임금이 헝가리, 체코 등 동유럽 신규회원국의 5, 6배 수준이다.
물론 이런 분업이 긍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생산기지의 동유럽 이전으로 산업공동화, 환경오염 등 부정적인 측면도 적지 않다. 하지만 많은 전문가들은 이런 유럽 전체의 산업재편을 통해 유럽 전체의 경쟁력이 향상되고 유럽연합의 역내시장과 경제적 영향력이 미국, 중국 등 주요 경제대국을 크게 앞지르게 될 것이라는 견해를 보이고 있다.
이런 경제적 영향력 확대와 함께 국제사회에서 유럽의 정치적 비중도 크게 증가할 것이다. 현재 프랑스, 독일 등 유럽의 강대국들은 초강대국 미국과 아시아의 신흥 강대국 중국과의 보이지 않는 힘겨루기에 고심하고 있다. 이라크 전쟁을 둘러싼 미국과 유럽의 갈등, 거대 중국의 출현으로 인한 미국과 일본의 공조강화 등 한반도를 둘러싼 그 어느 때보다 국제정세가 불안하다.
이런 가운데 25개국으로 확대된 '거대 EU’의 탄생은 국제사회에 또 다른 변수이다. 세계 GDP의 4분의 1을 차지하고 국민소득 3만 달러를 누리는 인구 4억 5천여만명의 EU, 이들의 행보에 국제사회가 주목하고 있다.
박상봉 / 미래한국신문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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