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04.01
No. 06
이라크 전쟁과 미국의 세계적 역할
최근 시작된 이라크전쟁을 둘러싸고, 전쟁의 의미와 성격, 미국의 공격 명분, 그리고 UN의 역할에 대한 논란이 일어나고 있다. 특히 국내적으로는 이라크 전쟁에 대한 국군파병 여부, 그리고 이라크 전쟁이 한반도 북핵 문제에 미칠 영향을 놓고 의견이 분분하다. 한국은 이라크 전쟁 발발 이전부터 북한 핵문제라고 하는 중대한 현안문제를 안고 있음으로 인하여, 이라크 전쟁이 향후 북핵문제 해결과정에 주게 될 함의(含意)에 주목해왔다. 그러나, 현상황은 오히려 파병을 둘러싼 국내의 여론분열 자체가 더욱 중요한 국가현안으로 부상하고 있는 형국이다. 이 논쟁은 단순한 파병 여부에 그치지 않고 그동안 우리 사회 내부에 잠재되어 있던 미국의 세계적 역할과 위상, 특히 한반도에서의 미국의 정책과 역할 문제에 대한 입장과 견해 차이를 더욱 극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우리와 군사·안보 동맹관계에 있는 미국에 대한 입장과 관점의 차이는 단순히 북핵 문제에 그치지 않고 중장기적으로 한반도 안보, 대북관계, 통일, 주한미군 문제 등과 밀접하게 연계되어 향후 한국의 국가발전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게 될 것으로 보인다.
미·영 연합군의 이라크 공격에 대한 정당성 여부
미·영 연합군이 이라크를 공격한 것은 9·11 테러사건 이후 대량살상무기가 테러국가와 연계되는 것을 막고, 미국의 안보와 더 나아가 세계 평화와 안정의 유지 차원에서 이른 바 “악의 축 (Axis of Evil)” 국가의 팽창정책을 사전에 저지할 목적이었던 것으로 이해된다.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정권이 이라크 국민을 철권으로 억압하며 대량살상무기 개발을 통해 인근지역과 세계평화를 위협해왔음은 자타가 공인하는 사실이다. 다만, 후세인정권은 최근 수개월간 UN의 대량살상무기 사찰에 순응하는 등 유화적 태도를 보임으로써, 국제여론을 활용하여 미국의 공격 명분을 약화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미·영 양국의 이라크전쟁을 반대하는 주요 근거는 UN결의 1441호에 추가하는 새로운 안전보장이사회 결의가 결여되었다는 것이지만, 코소보사태처럼 과거 UN결의 없이 다국적군대가 독자적으로 개입한 경우도 적지 않은 만큼, 이것이 문제의 본질은 아닐 것이다. 문제의 본질은 독재권력을 응징하되, 무고한 이라크 국민들의 인명 피해가 최소화되어야 한다는 점이고, 여기에 이라크 전쟁의 승패가 달려있다고 볼 수 있다.
미·영 연합군의 이라크 공격을 반대하는 또 하나의 주장은 어느 한 국가의 주권(state sovereignty) 또는 자주권을 타 국가가 일방적으로 무력 공격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인데, 이 역시 상술(上述)한 바, 인류의 보편적 도덕성을 심각하게 훼손하는 국가의 주권이 과연 언제까지 무한히 존중되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를 제기하게 한다. 현대의 세계는 과거의 국가들간 무정부적인 세계체제(states system)적 성격을 벗어나, 상당한 정도로 국제적 규범과 여론이 영향을 미치는 국제공동체(international community)적 성격으로 변화하고 있다. 따라서 국가주권의 불가침성과 국가간 ‘내정간섭 불가’의 주장은 한계를 가질 수 밖에 없다. 예컨대, 어느 한 국가가 지역의 안정과 평화를 위협하고 특히 대량살상무기 개발을 통해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위협하는 부도덕한 권력을 행사할 경우에 국제사회는 이를 응징한 권리가 있다는 의미이다.
국제사회에서의 평등(equality)과 힘(power)
한편 국제사회는 국내사회에서 구현되는 정도의 완벽에 가까운 구성원간 평등이 실현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수 많은 국가들로 구성되는 국제사회는 국가간 평등(equality)보다는 국가간 힘(power)의 분포와 힘의 현실을 반영하지 않을 수 없다는 점을 직시해야 한다. 이는 예컨대 UN의 중요 현안문제가 총회의 다수결이 아니라, 안전보장 이사회 그것도 상임이사국의 결의에 의하여 결정되도록 한 의사결정 메카니즘의 취지와 일맥상통한다. 현대의 국제사회가 과거 수천년 동안 지속되어 온 국가체제(states system)를 어느 정도 탈피하여 세계공동체 형식으로 발전하고 있다고는 하나, 아직도 세계에는 국가와 같은 강력한 권위를 행사할 수 있는 중앙정부가 부재(不在)한 상황이다. UN은 그만큼 미완(未完)의 국제정부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군사력 및 경제력에 기초한 힘을 보유한 강대국들이 UN 및 국제여론을 고려하면서, 세계정치를 운용해 나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UN의 역할과 기능을 돌이켜 볼 때, 우리가 간과하기 쉬운 핵심은 UN은 창설 초기부터 이미 세계평화 및 평등에 대한 인류의 이상을 추구하되, 국제정치상의 힘의 현실을 철저히 반영한, 평등과 힘의 절묘한 조화였다는 사실이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이는 국제 평화, 안전 및 군사 문제에 대한 의사결정 메카니즘을 회원국 다수결에 입각한 총회 결정에 두지 않고, 소수의 강대국 중심의 안보리 상임이사국간 합의 제도에 두었다는 사실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실행할 힘이 결여된 다수국가들의 의견 만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없으며, 특히 상임이사국내에서도 다수결 보다는 합의제를 채택함으로써 강대국간의 의견 불일치가 문제 해결은 커녕 오히려 분쟁의 원인이 될 수 있음을 사전에 고려한 것이다.
현존하는 국제기구의 대표격인 UN조차도 국력에 바탕을 둔 국가간의 불평등을 처음부터 기정사실화하였다는 이 점이 북핵 문제와 관련, “미국은 핵개발을 지속하면서, 왜 북한은 안되나?” 같은 질문에 대한 답이 될 것이다. 또한 NPT 등을 통해 기존의 핵보유 국가들을 인정하면서, 새로운 핵확산을 금지하고자 하는 국제사회의 핵문제 처리방향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그만큼 국제정치는 이상의 급격한 실현이 아니라, 국제적 힘의 현실에 바탕을 두고 이루어지는 이상의 점진적 실현의 과정이다.
21세기로 들어서서 국제정치상 힘의 분포는 또 새로운 변화를 거듭하고 있다. 이는 2차대전 직후의 냉전체제에서 소련과 동구권 사회주의가 붕괴하면서 나타난 현상으로, 초강대국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일극화 현상이 가속화되고 있는 현실을 의미한다. 일부에서 UN개편론, “post-UN era” 등의 구상이 거론되고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미국의 압도적 힘의 우위를 중심으로 형성되는 새로운 힘의 분포를 자연스럽게 반영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 현상은 과거 UN이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쟁점으로서, UN이 새로운 힘의 현실을 반영하지 못한 채, 안보리 국가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UN이 분열되고 그 기능이 마비되고 있는데 대한 대응으로 볼 수 있다. 그리하여 기존의 UN체제를 넘어서는 새로운 국제질서의 개편을 예고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우리의 입장에서는 이라크 전쟁 이후 국제질서의 이러한 변동이 우리의 국익에 어떻게 영향을 미칠지 주목해야만 한다.
패권안정이론(Hegemonic Stability Theory)
현존했던 국제기구 중 그래도 최상이라 할 UN이 세계정부 역할을 실질적으로 수행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세계문제의 해결을 주도하고 또 가장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은 힘(power)을 보유하고 있는 강대국이다. 여기에서 이른 바, 패권또는 패권국가(hegemon)에 대한 논쟁이 제기된다. 패권(覇權)국가는 힘 또는 능력(ability)을 보유한 강대국을 의미하며, 일반적으로 자국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이기적인(selfish) 국가의 개념이다. 그러므로 패권국가는 타국에 대한 착취(exploitation)를 자행하며, 타국에 대한 지배(dominance)를 추구한다. 이는 마치 고대 동양에서 왕도(王道)와 패도(覇道)가 구분되었던과 같은 개념이다. 그러나 모든 강대국이 패권국가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한다면, 국제사회는 본질적으로 이리 대 이리의 영원한 투쟁의 “자연상태”를 결코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여기에서 제기되고 있는 것이 선의(goodwill)와 지도력(leadership)을 보유한 패권국가가 출현할 수 있고 출현해야 한다는 필요성이다. 패권국가처럼 강력한 힘을 보유하되, 착취와 지배보다는 선의(善意)를 가지고 공공의 의익을 추구하는 리더쉽을 가진 국가상(像)인 것이다. 리더쉽 국가는 자국만을 위한 착취보다는 공공재(public goods)의 역할을 수행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예컨대, 핵우산, 석유수송로 등의 확보를 통해 무임승차자(free-rider)를 보호하고, 국제사회의 안정과 평화를 확보하며, 이기적인 패권국가의 부상을 저지하는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다. 이른 바 「패권안정이론(Hegemonic Stability Theory)」은 “선의의 패권국가, 곧 리더쉽을 가진 강대국이 국제사회의 안정과 평화에 기여한다”는 국제정치 이론이다. 며칠 전 청와대에서 나온 미국의 “골목대장”론은 「패권안정이론」을 설명하려는 시도인 것으로 보였으나, 충분치 않아 아쉬운 점이 있다.
문제는 과연 미국이 이기적인 패권국가인가, 아니면 선의를 가진 리더쉽국가인가 하는 점이다. 일단 미국 스스로는 리더쉽을 추구하고 있다고 자부하고 또 그렇게 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예컨대 3월 26일 행해진 부시대통령의 연설은 이라크 공격의 명분으로서 이라크 국민들의 자유를 회복시키기 위한 점을 강조하고 있듯이, 미국은 스스로를 세계에서 경찰역, 공공재 역할을 수행하는 리더쉽 국가로 자리 매김하려 하고 있다. 미국은 자유를 찾아 모여든 이민들의 합의와 약속에 따라 청교도 이념에 의해 건설된 사회로서, 자유민주주의의 수호와 확산, 그리고 인권 상황의 세계적 증진을 외교적 목표로 삼고 있는 독특한 나라이다. 미국은 이러한 이상을 구현하기 위해 군사력을 바탕으로 세계 경찰역을 자임하고 있다.
한국과의 동맹관계는 양국의 국가이익에 앞서, 이러한 이념적 공감대가 그 유대의 원천임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이런 점에서 국내 일각에서 이라크 전쟁을 미국의 석유자원 확보 쟁탈전의 일환으로만 파악하고 지나친 반전?반미운동을 전개하고 있는 것은 이라크 전쟁에 임하는 미국의 입장과 세계전략을 정확히 읽지 못한 처사일 뿐만 아니라, 북한 핵문제를 앞두고 긴요시되고 있는 한·미 동맹관계를 근본적으로 훼손할 우려가 있는 매우 위험한 사태의 전개라 하겠다.
이라크 전쟁과 한국의 국가이익
결론적으로 이라크 전쟁은 독재자를 축출하기 위한 명분있는 전쟁이며, 따라서 한국은 좁은 범위의 국가이익의 확보 차원에서 뿐만 아니라, 독재자와 테러 추방, 주민들의 인권증진, 그리고 지역평화와 안정 차원에서 미국의 이라크 전쟁을 지원할 필요가 있다. 한·미 양국이 이러한 이념적 공동 목표와 공동선을 바탕으로 협력할 때, 한국의 국가이익은 자연스럽게 확보될 수 있을 것이다. 한국이 이념적 목표들에 충실할 때에 미국은 북한의 핵위협 등 현존하는 한국의 국가안보를 위해 기꺼이 협력하게 될 것이다. 한·미 동맹관계의 관점에서 볼 때, 독재, 인권탄압, 테러, 대량살상무기 개발, 지역패권주의 등이 공동의 ‘주적’(主敵)으로 설정되어야 한다. 이렇듯 국가목표와 주적에 대한 공동인식의 토대 위에 김정일정권의 핵개발에 대한 공동대처와 정책공조가 가능하다. 한국의 국가이익이라는 협소한 의미에서 한·미 동맹을 주장하는데 그친다면, 실제적으로 동맹관계가 유지되기 어려운 점이 있는 것이다. 이는 단순히 특정 미행정부의 지원을 넘어서서 미국국민들의 전체 여론의 지지를 획득할 수 있는 길이기도 하다.
한국이 지정학상 강대국에 의해 둘러싸여 있어 생존과 번영에 어려운 여건인 것은 주지의 사실이거니와, 동북아 지역이 심각한 열강의 각축과 혼란상황으로 빠져들 때, 한국은 국제적 역학구도 재편과정에서 결국 어느 국가와 동맹관계를 선택해야 할 시점이 올 것이다. 급변하는 국제정세에서, 우리는 비교적 선의적이며 국제체제의 일반이익에 봉사해 나가는 세력과 연대하여 자국의 이익(self-interest)만을 배타적으로 추구하는 세력을 견제하는 방향으로 대응해 나가야 한다. 한국은 리더쉽 강국과 연대하여 협소한 자국 이익에 기초한 지역패권주의를 견제하는 방향으로 그 외교정책이 추구되어야 할 것이다.
국가이데올로기와 지정학적 요소를 고려할 때, 한반도 주변 4대 강국중 그래도 한국에게 비교적 가장 우호적일 수 있는 나라는 미국일 것이다. 향후 한·미 동맹은 동북아 지역에서의 어떠한 국제정치적 혼란과 파고(波高)와 맞서 한국의 생존과 번영을 지킬 수 있는 강력한 토대가 될 것이다. 반면, 한반도에서의 미국세력의 쇠퇴는 다른 이기적인 패권국가의 등장을 초래할 것인 바, 예컨대 중국 내지 일본의 한반도 영향력 확대를 가져오게 될 것이다. 한국의 외교정책이 지금까지의 미국과의 ‘동맹을 벗어난 ‘중립국’ 성향으로 움직인다면, 한국은 결정적으로 어려운 국가운명에 처하게 될 것으로 우려된다. 이런 점에서 이라크 전쟁을 둘러싸고 반전(反戰) 분위기에 편승하여 확대되고 있는 반미정서는 매우 위험한 것이다. 미국이 국력을 총동원하여 이라크 전쟁을 수행하고 있는 상황에서 반전은 곧 반미(反美)를 의미한다. 반미는 현 상황에서 결과적으로 친북(親北)과 연결된다. 반전·반미는 북핵문제를 해결하는데 결코 도움이 될 수 없을 것이다. 평화에 대한 열망만으로 평화를 실현할 수 없다. 평화는 평화를 수호하려는 강인한 의지와 노력이 수반될 때 달성할 수 있다는 것이 국제정치의 교훈이다.
홍관희 (洪官憙, 통일연구원 선임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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