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의 길 이야기

도서명 제3의 길 이야기
저 자 마이클 노박 / 박종찬 역
페이지수 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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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 소개

이야기 시리즈 29


상세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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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에서 제3의 길이라는 것은 기존의 좌파 이데올로기들이 자신들의 과오를 반성하고 우파적 수단을 수용하기 위한 일종의 정치적 레토릭(修辭)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런데 우려스럽게도 한국에서는 제3의 길이 좌파의 무오류를 입증해 주는 보증수표와 같은 것으로 제시되고 있다. 이러한 잘못된 현상을 시정하는 데 이 책의 의의가 있다. 이 책에서 마이클 노박은 우파적 입장에서 전후 복지체제가 시민사회의 자율성을 잠식시키고 시혜적 국가를 제도화함으로써 시민들의 의존성과 도덕적 타락을 조장했다고 지적한다. 그리고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국가에 집중된 권한을 시민사회로 양도하는 민주적 자본주의를 제시한다. 이러한 노박의 주장에 대해서 앤서니 기든스, 존 로이드, 폴 오머로드와 같은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처음에는 노박을 강하게 비난하지만 결론에서는 `우파`인 노박의 견해를 상당부분 수용하고 있다.


노박에 따르면 사회주의 붕괴 이후 사회민주의의가 추진해온 복지체제는 이념적ㆍ현실적 위기를 겪고 있다. 이러한 위기에 직면하여 유럽의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은 과거의 처벌적인 재분배주의에서 벗어나는 한편 국민들을 무기력하게 만드는 보모국가(Nanny State)로부터도 벗어나고 있다. 하지만 그들이 자신들의 고유한 목적―평등, 고통에의 동참, 빈곤층에 대한 배려 등―마저 포기한 것은 아니다. 이러한 고유한 목적을 유지하는 한에서 새로운 수단, 즉 우파적인 방법들을 수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변화의 시기에 직면하여 유럽에서는 상당한 정도의 비관론이 일어나고 있다. 세계화라는 흐름에 의해 전후 유럽에서의 체제 안정을 가능하게 만들었던 사회적 기반이 무너지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미국에서는 이와 대조적으로 낙관론이 자주 들리고 있다. 미국인들이 나타내는 낙관론의 근거는 바로 세계화이다. 세계화라는 흐름이 유럽에서는 비관적인 전망의 근거로, 미국에서는 낙관적인 전망의 근거로 인식되고 있는 것이다.


세계화라는 흐름 속에서 우리를 가장 위협하는 것은 문화적 위기이다. 군나르 미르달(Gunnar Myrdal)은 복지제도로 인해 스웨덴 사람들의 도덕성이 약화되었다고 선언했다. 미국에서도 마찬가지로 정부의 보조금에 대한 의존성이 높아졌다. 뿐만 아니라 미국에서 폭력범죄, 사생아 수 등 사회병리 현상도 급격하게 증가했다. 유럽과 미국의 정책 전문가들이 복지국가의 재정적 위기에 대해 폭넓은 공감대를 가지고 있지만, 보다 심각한 것은 바로 복지국가의 정신적 위기이다.


복지국가가 가져온 문제점은 첫째, 개인의 책임이라는 주체성이 메말라 가면서 궁극적으로는 복지국가의 `나태함`이 나타나게 되었다는 것, 둘째, 행정국가가 시민사회에 의해 수행되어 오던 대다수의 기능들을 꾸준히 잠식해 버려 시민사회의 보조기구로서 국가라는 원칙이 침해되어 버렸다는 것이다.


특히 복지제도로 인해 가장 나쁜 영향을 받은 것은 가정생활이었다. 복지제도는 사람을 의존성의 굴레에 사로잡히게 만들어 버렸다. 이러한 굴레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공공기금에 의존하는 경향을 버리지 못하며 그들의 자녀들도 이러한 경향을 그대로 물려받을 가능성이 크다. 미국에서는 약 400만 명의 빈곤층들이 이러한 의존성의 굴레에 빠져 있으며 가난에서 벗어날 기회를 잡지 못하고 있다.


국가가 공동선을 위한 유일한 도구도, 최선의 도구도 아닌 것은 명백하다. 전체주의 국가 뿐만 아니라 복지국가도 많은 사람들의 기대를 충족시켜 주지는 못했다. 따라서 국가라는 환상에서 벗어나 자유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자유사회란 자발적으로 움직이는 현명한 시민들이 자유에 대한 권리를 확보하고 공동선을 촉진하기 위하여 자발적인 합의를 통해 정부를 형성하고자 하는, 자치정부를 위한 구상이다. 자유사회에서 시민들은 수많은 자발적인 단체들을 구성하여 시민사회를 이끌어 나간다. 그리고 여기에서 시민들은 엄격한 경제적 책임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스스로 상상력, 창의성, 주도성이 있는 시민이 됨으로써 한 사회에서 가장 중요하고 훌륭한 인적 자본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자유사회가 되기 위해서 긴급하게 필요한 것은 집권화된 관료체제가 맡고 있는 임무를 시민 각자에게, 그리고 그들의 다양한 단체에게 양도하는 일이다.


이러한 양도에는 일곱가지 원칙이 적용된다. 첫째, 전체를 포괄하는 자치정부라는 역사적 목표를 성취하는 일이다.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책임있는 시민을 기를 필요가 있다. 둘째, 튼튼한 가정을 가꾸는 일이 대단히 효율적이다. 책임있는 시민을 키우는 곳이 바로 가정이다. 셋째, 생활의 모든 영역에서 주도성, 창의성, 기업가 정신이라는 개인적 습관을 배양하는 일이 중요하다. 넷째, 창조성을 고양하기 위해서 모든 가정이 기금을 만들어 세대간에 물려줄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일(가정자본의 형성)이 공공정책의 목표이어야 한다. 여섯째, 가정 내에서 자본을 형성하도록 하는 것은 국가의 부담을 경감시켜주는 효과를 가져온다. 일곱째, 복잡한 조세 및 규제 법규를 단순화시켜야 한다.


이렇게 일곱 가지의 원칙이 마음속에 확고하고 분명하게 자리잡으면, 많은 시민들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지에 대해 많은 실행방안을 내놓을 것이다. 우선 세 가지 정책대안을 말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연금개혁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칠레가 모범적인 사례를 보여주었다. 둘째, 의료저축구좌이다. 이것은 각 시민이 법에 따라 의료저축구좌를 열고 규정된 대로 소득의 일부를 사적인 구좌에 투자하도록 하는 것이다. 셋째, 단일세(flat tax)이다. 이것은 정부가 예외없이 소득세율을 단일하게 적용하는 것이다. 이렇게 단일세율을 적용한 뒤 저소득층에 대해서는 세금을 공제해 주게 되면, 흔히 알려져 있는 것과 같이 단일세가 누진성을 손상한다는 말이 잘못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앤서니 기든스는 미국과 유럽의 복지국가에 대한 관념이 다르다는 것을 지적하면서, 유럽에서는 복지국가가 미국에서와는 달리 완전히 한 세대동안 사회적 이동성과 번영의 도약대로 간주되어 왔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에 따르면 가정의 위기는 복지제도 때문이 아니라 가정에 영향을 주는 일련의 근본적인 변화와 그것을 둘러싼 제도, 즉 결혼, 성문제, 남-녀의 관계, 그리고 집과 직장의 관계 등에 어떻게 적응할 것인가의 문제라고 말한다.


그리고 토니 블레어의 승리가 사회주의의 실패를 확인해 주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마가렛 대처의 승리를 확인시켜 주는 것이기 보다는 신자유주의 실패를 확인해 주는 것이라고 한다. 신자유주의는 경제부문을 근대화하려고 하면서 가정을 포함한 다른 영역을 탈근대화시키려는 모순을 가지고 있으며 대처는 자치단체로의 권한양도와 역행하는 정책을 폈다는 것을 지적한다.


그리고 세계화라는 양상은 그것에 대한 낙관론인가 아니면 동요인가 하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경제, 정치, 문화에 영향을 미치는 구조적 전환의 복잡한 묶음이다. 세계화는 국가의 통제력을 상당부분 약화시키며 국가의 경계를 넘어선 새로운 지역들 및 새로운 연합관계들을 창출해 낸다.


이러한 세계화의 복잡한 양상으로 인해 사회민주주의는 과거의 많은 업적에도 불구하고 근원적인 재고의 필요성에 직면해 있다. 복지국가의 개혁은 어떠해야 할 것인가?


첫째, 국가의 권한을 시민사회에 양도하기 보다는 초국가적 기구에게 `위쪽으로 양도`해야 한다. 둘째, 복지제도는 경제적ㆍ개인적 책임성을 강조해야 한다. 하지만 집단적인 책임의 원칙도 존중해야 한다. 셋째, 가족제도에 관한 한 정부가 통제할 수 있는 여지는 그렇게 많지 않다. 넷째, 연금 개혁은 노년층에 대한 지원의 차원에서 추진되어야 할 것이 아니라 현대 사회에 있어서 변화하고 있는 노년층의 사회적 지위를 다루는 접근법을 필요로 한다. 다섯째, 복지제도가 보호하려는 위험이라는 것의 성격이 달라지고 있다는 것을 고려해야 한다.


존 로이드는 노박이 복지제도와 사회민주주의의 실패를 보여주기 위해서 유럽의 상황을 의도적으로 왜곡되게 짜맞추려 했기 때문에 유럽의 성공사례는 무시되어 버렸다고 비판한다.


그에 따르면 오늘날 사회민주주의는 좌파적 정당성에 연연하기 보다는 정책의 실제 결과를 중시하는 실용주의 노선을 걷고 있다. 노박이 제시한 연금개혁, 의료저축 구좌, 단순한 비례세 등의 정책은 사회주의 정당이 검토하고 있는 수많은 아이디어 중 하나이다. 다만 그런 아이디어를 추진하는 것이 그렇게 간단하지 않은 것은 민주주의 국가에서 복지체제를 재구성하는 일이 많은 유권자들의 강한 반발을 초래하기 쉽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현재의 복지체제가 개선을 필요로 하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사회민주주의의 새로운 접근방법은 공동체의 새로운 행동양식을 모색한다. 즉 일상적인 활동에 대해 책임을 지면서 자신의 역할을 다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또는 책임을 다하는 사람이 되도록 사람들간에 서로 격려하게 함으로써 지역공동체를 강화하는 것이다. 즉 좌파가 우파의 영역으로 옮겨간 것은 사실이지만, 좌파 영역의 전통적인 목표, 즉 기회균등, 공공기관과 민간단체 모두에게 대중에 대한 책임성을 엄격히 묻는 일, 두터운 층으로 이루어져 있는 다양한 시민사회 등을 추구하는 것도 사실이다. 이것은 사회민주주의가 이념적 경직성을 탈피했다는 의미이다.


폴 오머로드는 복지체제로 인해서 유럽의 경제가 침체되었다는 주장에 반대하면서 복지제도가 상대적으로 약한 미국보다는 더 강한 유럽에서 전후 경제성장이 더 높았고, 미국과 유럽사이의 경제적 차이도 줄어들었다는 점을 지적한다. 즉 유럽에서 사회민주주의를 강력하게 시행하고 있었던 시기에 오히려 미국보다 성장률이 더 높았다는 것은 복지체제로 인해 경제적 침체가 발생한다는 주장을 역전시킨다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사회민주주의라는 것은 현재도 그러하고, 항상 실질적으로 보다 큰 분류인 자본주의의 한 유형이다. 즉 사회민주주의의 핵심에는 자본주의 경제작동을 위해서 요구되는 근본조건―사유재산권, 법의 지배 등―을 지키려는 강한 약속이 있다.


20세기 대부분의 기간동안 국가와 국가의 활동은 진보의 수단이었다. 그러나 국가만이 계속해서 사회의 진보를 가져올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자본주의를 발전시키는 것이다. 사회정의를 달성하는 가장 좋은 수단으로 판명된 것은 사회민주주의가 아니라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다. 사회정의를 촉진하기 위해 만들어진 사회민주주의적 프로그램의 효과는 경제성장을 통해 달성된 사회정의에 비한다면 2차적인 중요성밖에 가질 수 없다는 점을 사회민주주의자들이 받아들여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순수한 자유시장경제가 대안인 것은 아니다. 아담 스미스의 지적처럼 경제와 사회가 기능하기 위해서는 일정 수준의 도덕적 환경이 필요하고 국가의 역할은 바로 이런 틀을 지지하기 위해 권력을 잡는 일이다. 따라서 지난 세기의 전환점에서 유효했었던 진보의 모델에 매달려 있는 일이 순진한 것처럼, 전례 없는 부와 번영의 시대에 서구국가가 복지국가를 지속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 또한 우스운 일이다.


마지막으로 노박은 논평자들의 주장에 대해서 상당한 정도의 공동의 장이 있었다고 평가한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복지제도의 개혁을 위해 의존성과 책임성의 문제를 고려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또 그는 평자들의 논평에 대한 상세한 답변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