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전에 『하이에크 이야기 Ⅰ』에서 인간들의 사회인 열린 자생적 질서 및 시장경제질서의 생성에 관한 하이에크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의 이야기의 줄거리는, 질서잡는 사람이 없어도 스스로 생성되는 질서가 있는데, 이 질서가 열린 자생적 질서이고 시장경제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질서의 자생적인 형성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금지적 성격을 가진 도덕규칙들이라는 점이다. 이 행동규칙들도 역시 문화적 진화의 선물이라는 것이다. 인간이성의 한계와 사회적 행동규칙의 역할의 관계, 그리고 사회적 행동규칙과 자생적 질서의 관계에 관한 하이에크의 이야기는 자유주의 사회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
우리가 지금 『하이에크 이야기Ⅱ』에서 들어보고자 하는 하이에크의 다양한 이야기는, 왜 열린 자생적 질서의 자유경제가 좋으냐, 이 질서의 기초인 법질서는 어떤 형태인가, 그리고 이 질서에서 국가는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가, 민주주의는 열린 자생적 질서와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는가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는 주로 윤리적인 이야기의 성격을 갖고 있다.
하이에크는 사회가 추구해야 할 최고의 가치를 분배적 정의와 같은 평등이나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과 같은 공리주의 가치로 보지 않는다. 그는 개인적 자유를 최고의 가치로 여기고 있다. 그러면 왜 개인적 자유가 소중한가?
하이에크에 있어서 개인적 자유는 인간의 이성에 의해 고안한 가치가 아니라 문화적 진화의 선물이다. 따라서 인간은 항상 자유로이 태어났다든가, 인간은 항상 자유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있었다라는 말은 역사적으로 옳지 않다. 폐쇄된 원시사회에서는 자유란 존재하지 않았다. 자유에 대한 소망과 자유라는 개념 자체는 열린 자생적 사회가 등장한 이래 비로소 존재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 개인적 자유가 등장하면서 사회과학이 존재의미를 갖게 되었고 또한 이것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개인적 자유가 허용된 사회를 연구대상으로 할 경우에, 비로소 사회과학이 가능한 것이다. 자유가 없는 사회에 대한 연구는 의미가 없다. 왜냐하면 자유가 없는 경우에는, 열린 자생적 질서란 존재하지 않고 인위적 질서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인위적 질서에 대한 연구에서는 질서를 만드는 사람의 심리만을 연구할 수 있을 뿐이다.
하이에크는 개인적 자유가 필요한 이유를 인간의 구조적인 무지라는 인간 본성에서 찾고 있다. 인간들이 모든 것을 이미 알고 있다면, 지식을 습득하고 새로운 지식을 창출하고 실험할 필요가 없다. 개인의 자유는 바로 이러한 행동자유를 의미한다. 따라서 이러한 자유, 그리고 이를 기초로 하는 열린 시장질서는 인간들을, 더구나 구조적으로 무식한 인간들을 자유가 없는 인위적인 간섭주의 경제질서보다 훨씬 더 현명하게 만든다. 그리고 모든 것을 완전히 알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의 계획에 의한 인위적 질서, 즉 계획경제로 충분하다. 시장경제는 필요없다. 또는 완전히 알고 있는 사람이 시장경제를 소망스러운 방향으로 조종, 통제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인간은 구조적으로 무식하다는 하이에크의 중심된 이야기를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면, 시장경제를 간섭하고 싶어하는 간섭주의자들을 건방진 사람들, 알지도 못하면서 아는 척 하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해도 좋다. 또는 이들이 지식의 오만을 자행하고 있다고 말해도 과장된 것은 결코 아니다.
자유는 인류의 발전을 가져온다. 개개인들은 자유의 토양 속에서만 자신들의 에너지, 기업가적 정신을 마음껏 발산할 수 있다. 그 결과 사회의 발전과 진화가 이루어진다. 자유는 발전과 진화의 원동력이다. 발전은 경제적, 정신적 및 문화적 국면 모두를 포함한다. 그렇기 때문에 하이에크는 "자유 문명의 창조력"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자유는 어떠한 행동제한도 없는 상태는 결코 아니다. 법이 없는 곳에는 자유도 없다. 자유는 법과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모든 형태의 법이 자유를 보장하는 것이 아니다. 특정의 조건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이 조건이 법의 지배 원칙이고 이 원칙이 법을 정의로운 행동규칙으로 만드는 원칙이기도 하다.
법규칙은 첫째로 그것은 적용에 있어서 일반적이다. 불특정 다수의 사례와 인간들에게 똑같이 적용될 수 있어야 한다. 둘째로 법규칙은 금지되어진 행동만을 기술해야 한다. 셋째로 법규칙은 확실해야 한다. 이러한 세 가지 조건들을 갖추고 있는 법규칙만이 타인들이 침해하지 않으리라는 확실한 기대를 형성할 수 있게 하고 또한 새로운 행동방식을 개발하고 혁신할 수 있다. 이러한 조건들을 갖춘 법규칙들은 바로 열린 자생적 질서의 형성을 가능하게 한다.
법의 지배 원칙에 합당한 법규칙들을 집행하는 데 국한하여 국가의 강제를 허용하는 국가가 실질적 의미의 법치국가이다. 법치국가적 법은, 특정의 집단적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처분적 법률과는 달리, 오로지 개인적 자유를 보장하고 열린 자생적 질서를 유지하고 확립하기 위한 법률이다. 처분적 법률은 집단적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법률로서, 이것은 조직규칙과 동일하게 명령적 성격을 갖고 있다.
새로운 법률을 도입할 때에는 그것이 일반성, 추상성 및 확실성을 갖추고 있어야 할 뿐만 아니라 그것은 기존의 행동규칙 체계들과 양립되어야 한다(내재적 비판). 특히 중요한 것은 첫째로 전통이다. 전통은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장구한 경험을 내포하고 있고, 또한 우리가 알 수 없는 유익한 기능을 행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둘째로 행동규칙 전체를 단번에 개선할 수 없고 점진적으로 행동규칙 하나하나를 개선해 나아가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의 이성의 한계 때문이다.
자유를 보장하는 행동규칙들은 사법과 동일하다. 자유를 보장하는 법규칙에 의해 통치하는 법치국가에서는 열린 자생적 질서의 기초가 되고 있는 사법과 조직질서의 기초를 형성하는 공법을 엄격히 구분해야 한다. 이러한 구분이 없이 이 두 가지 법체계를 동일하게 취급할 경우, 개인적 자유가 위태로워진다. 공법만을 알고 있고 또한 자생적 질서의 존재를 무시한 채, 인위적 질서의 존재만을 알고 있는 법학자와 경제학자는 자유의 적이다. 왜냐하면 자유를 보장하는 사법은 공법과 완전히 다른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법질서는 원래 입법의 결과가 아니라 재판관들이 분쟁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형성된 자생적 질서였다. 이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법의 지배 원칙과 그리고 행동규칙들과의 양립성 테스트였다.
그런데 재판관의 법의 형성은 불만족스러운 측면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하이에크는 이 측면을 수정하기 위해 입법의 필요성을 인정하고 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는 그 입법은 법관의 법의 형성과정(커먼 로common law의 형성과정)을 모방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현대 의회민주주의에서 이러한 모방이 무조건적으로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하여, 그리고 현대 민주주의의 결함 때문에 자유가 위태롭게 되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하이에크는 민주주의를 분석하고 있는데 이것이 하이에크의 이야기의 여섯 번째 구성요소이다.
하이에크는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를 엄격히 구분하고 있다. 자유주의는 국가권력의 제한에 초점을 맞추는데 반하여 민주주의는 국가권력의 원천에 초점을 맞춘다. 그리고 법률에 있어서도 자유주의는 법률의 내용을, 민주주의는 법의 원천을 중시한다. 자유주의는 국가권력의 제한에 초점을 맞추기 때문에, 민주주의와 이에 따른 집단적인 의사결정도 제한되어야 한다.
그러나 현대민주주의는 제한되어 있지 않고 있다. 그 결과 민주주의는 부패된 민주주의로 변질되었다. 민주주의는 약자에게 강하고 강자에게는 약하다. 민주주의에서 다수결원칙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다수가 결정한 것이면 무엇이든 정부가 행해야 한다는 점이 문제이다. 따라서 민주주의 내지 다수의 결정을 제한해야 한다.
하이에크는 민주주의를 제한하기 위한 이상적인 헌법을 제안하고 있다. 그의 제안에서 중요한 것은 입법의회의 의사결정을 제한하기 위한 원칙으로써 정의正義로운 법규칙의 정의定義를 도입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정의는 바로 법의 지배 원칙이다. 그의 이상적인 헌법 모델이 구상하고 있는 입법과정은 바로 커먼 로의 형성과정을 모방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이에크가 입법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지만 그러나 그 입법과정은 기존의 의회민주주의의 입법과정과는 그 성격에 있어서 전적으로 다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