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논문에서는 자생적 질서가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그리고 자생적 질서의 하나인 우리나라 상장기업의 전통적 지배구조를 어떤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하는지, 글로벌 스탠더드의 강요는 자생적 행동 패턴과 어떤 마찰을 빚는지,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시점에서 우리가 취해야 할 행동은 무엇인지 등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우리가 작은 정부와 규제완화를 부르짖는 이유는 자생적 질서의 효율성을 믿기 때문이다. 물론 모든 자생적 질서가 효율적인 것은 아니다. 자생적 질서의 효율성은 소비자의 선택이 보장됨과 동시에 공급자간의 경쟁이 존재하는 경우, 또 당사자들 간의 계속적 거래관계에 있는 경우이다. 이럴 때에 당사자들 간에 형성되는 자생적 관계는 황금률을 담고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도덕적으로도 정당하다. 그러나 위와 같은 조건이 성립되지 않는 상태에서 형성된 자생적 질서는 효율적일 보장도 없고, 또 황금률을 담고 있을 가능성도 그리 높지않다.
우리나라 상장기업이 활동해온 여러 시장들 중에는 경쟁적인 것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것들도 있었다. 경쟁적인 시장으로는 상품시장과 주식시장이 있었고, 제도권 대출시장과 퇴출시장, 노동시장은 덜 경쟁적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형성된 지배구조도 상당히 불완전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 이럴 경우 자생적 질서에 대한 정부 개입의 필요성이 대두된다. 그러나 개입은 신중해야 한다. 가장 이상적인 방법은 상장 기업을 둘러싸고 있는 시장이 모두 경쟁적이라고 가정했을 때 형성되었을 지배구조를 기업에 요구하는 것이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어떤 지배구조가 그런 요건을 충족하는지는 알아내기가 매우 어렵다. 선진국의 기업들이 채택하고 있는 행동, 즉 글로벌 스탠더드를 강요하는 것은 해답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그것보다는 기업을 둘러싸고 있는 시장들에 대한 규제를 폐지함으로써 새로운 자생적 지배구조가 형성되도록 하는 것이 더 옳은 대안이다. 글로벌 스탠더드의 강요는 기존 질서와의 사이에 여러 가지의 갈등을 빚어낸다. 공과 사의 구별을 분명히 하는 것이 글로벌 스탠더드일 것이다.
그러나 많이 달라지고는 있지만 한국인들은 여전히 공과 사의 구별을 분명히 하지 않는다. 시장에서 경쟁하는 기업들의 경우도 상황은 그리 다르지 않다. 따라서 그것을 부정한다면 시장의 자율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되어 버린다. 지배주주가 회사의 공적 재산을 사적 용도로 사용하는 문제도 그렇다. 이것은 한국의 지배주주들의 행동에 대해서 종종 문제로 지적되어 온 현상이다. 적대적 M&A 시장이 정착되어 있지 않은 상황에서 지배주주의 경영 참여는 필연적 결과이다. 문제는 일반주주들에 비해서 우리나라의 지배주주는 특별한 비용을 부담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공식적으로 그에 대한 대가를 받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특별히 부담하는 비용이란 주식의 집중투자에 따른 위험의 증가, 그리고 회사의 대출에 대해 개인적 보증을 서게 됨으로써 지게 되는 무한책임이다.
이런 비용들을 부담함에도 불구하고 지배주주가 공식적으로 특별한 보상을 받을 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지 않다. 어떤 식으로든 보상이 없다면 지배주주도 출연하지 않을 것이고 상장의 인센티브는 상당히 작았을 것이다. 한국에서는 공과 사의 구분이 명확치 않았고 그 결과 지배주주는 비공식적으로 보상을 받을 수 있었는데 그것이 회사의 재산을 사적인 용도로 사용하는 관행일 가능성이 높다.
지배구조 문제와 직접 관련되어 있지는 않지만 연공서열제 역시 그렇다. 글로벌 스탠더드는 성과에 따라 보수가 결정되는 방식일 것이다. 연공서열제는 성과가 좋은 사람의 몫을 성과가 나쁜 사람이 가져가는 것이다. 그 결과 근로의욕은 떨어지게 될 것이다. 다른 조건이 같다면 성과급제가 연공서열제보다 우월하다. 그러나 다른 조건은 동일하지 않다. 많은 보수를 받는 사람에 대한 질투와 따돌리기를 극복하지 못하는 한 성과급제가 생산적 제도라고 말하기 쉽지 않다.
상장기업의 숫자가 늘면 주식시장의 유동성이 증가하고 그 결과 모든 투자자들이 이익을 본다. 즉 기업의 상장 행위는 외부경제를 창출하는 행위이며 장려되어야 할 일이다. 글로벌 스탠더드의 강요는 주로 상장기업을 대상으로 하고 있는 것이며, 그 결과 상장의 인센티브가 줄어들 가능성이 높다.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상장사에 대한 글로벌 스탠더드의 강요는 장기적으로 투자자들에게 손해이다. 그러나 글로벌 스탠더드라는 행동 패턴 자체가 문제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만약 기업의 대주주가 된 외국투자자들이 개별 기업에 대해 주주로서 글로벌 스탠더드에 입각한 경영을 요구한다면 글로벌 스탠더드는 자연스럽게 자생적 지배구조의 일부로 편입되어 갈 수 있다.
문제는 정부개입에 의한 강요이다. 그렇게 되면 아직 준비가 안 되어 있거나 또는 한국적 지배구조를 고수하는 것이 더 유리한 기업조차도 억지로 지배구조를 바꾸어 경영성과가 떨어지는 일이 발생할 수 있다. 자생적으로 형성된 기존의 기업지배구조가 최선은 아닐지 모른다. 하지만 우리에게 적합한 지배구조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다. 좋은 지배구조가 출연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준 후 지배구조가 자생적으로 진화해가도록 하는 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이다.
첫째는 적대적 M&A가 활발히 일어날 수 있는 여건이 갖추어져야 한다. 지금의 상황에서 여기에 가장 큰 장애는 노동시장의 경직성이다. 둘째는 퇴출제도의 확립이다. 지배주주가 경영권을 뺏긴다는 것 외에 실질적으로 퇴출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보조금에 의한 기업 회생이 아니라 진정한 퇴출이 이루어지도록 퇴출제도가 정비되어야 한다. 셋째는 금융기관의 자율화이다. 정부가 소유한 금융기관의 지분을 조속히 매각하고 금융기관의 운영과 설립에 대한 정부 개입을 포기해야 한다. 넷째는 회사법의 경쟁이다. 글로벌 스탠더드로서 우리가 택할 것은 이것이다. 중앙정부의 회사법을 폐지하는 대신 광역자치단체로 하여금 회사 조례제정권을 갖게 하여 회사법 경쟁을 유도할 필요가 있다. 마지막으로 증권거래소 설립 및 운영의 자율화이다. 중앙정부나 사법부의 역할은 증권거래소의 상장 규칙이나 회사조례, 또는 기업이 스스로 제정한 정관을 위반한 기업에 대한 규제에 국한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