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는 2월말 노무현 정권 출범을 앞두고 새정부의 대(對) 기업정책 방향이 화두로 떠올랐다. 특히 대통령직 인수위원회가 본격 가동된 이후 설익은 경제정책들이 우후죽순처럼 터져 나오면서 재벌정책과 관련된 논란도 갈수록 뜨거워지고 있다. 논란이 확산되자 인수위측은 최근 인위적이고 강제적인 재벌개혁은 추진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공식표명하는 등 새정부가 추진하는 기업정책의 밑그림을 제시했다. 인수위측은 그러나 공정하고 투명한 시장경제시스템 구축을 위해서는 재벌개혁은 지속되어야 하며, 이를위해 상속-증여세 완전포괄주의, 증권관련 집단소송제 등의 도입을 추진중이다. 이에대해 경제단체와 주요 대기업들은 각종 규제를 강화해 기업활동을 위축시키는 것을 글로벌 경쟁시대에 역행하는 처사라며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이에 세계일보는 권영준(權泳俊.경실련 정책협의회 의장) 경희대 교수와 이형만(李炯晩) 자유기업원 부원장의 대담을 통해 새정부의 재벌개혁 정책에 대한 찬반 양론을 들어봤다. /편집자주
▲권 교수=재벌정책은 가급적 시스템 중심으로 조용히 꾸준히 해야하는데 인수위에서 선언식으로 하다보니 정책혼선이 생기는 등 다소 부작용이 초래됐다. 그러나 인수위측이 뒤늦게나마 점진적-자율적-장기적으로 재벌개혁을 추진하겠다는 쪽으로 입장을 정리해 다행스럽다. 하지만 재벌개혁에 대한 핵심적인 철학은 유지되어야 하며, 재벌의 기업지배구조 개선과 기업투명성 제고를 위한 조치는 반드시 노무현 차기정부에서 마무리돼야 한다.
▲이 부원장=재벌개혁이 이슈가 되는 것 자체가 납득이 안된다. DJ정부 5년동안 상당한 수준의 재벌개혁이 이뤄졌는데 올바른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 점진적-자율적-장기적이란 3원칙보다 더 중요한 것은 법치의 원칙이다. 재벌개혁도 개인의 재산권과 자유권을 침해하지 않는 범위내에서 이뤄져야 한다. 정부가 앞장서 '재벌'이란 부정적 용어를 사용하는 것도 고쳐져야 한다. 사전에도 없는 재벌이란 용어를 사용함으로써 기업의 정체성이 훼손되고 공정하고 자유로운 정책토론을 가로막고 있다.
▲권 교수=말로는 법치를 주장하면서 그 법이 버거우면 편법과 탈법을 일삼는 재벌들의 태도가 문제다. 구조조정본부가 대표적인 사례다. 지주회사 제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구조본을 통해 적은 지분을 가진 총수들이 실질적으로 계열사들을 거느리고 있다. 삼성전자의 경우 소액주주와 외국인 주주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오너의 의지에 따라 삼성자동차에 출자해 결국 막대한 손실을 초래했다. 이같은 편법은 국민경제 전체에 부담을 주는 동시에 경제원리에도 전혀 맞지 않는다.
▲이 부원장=구조본 문제는 공정거래법이 기업집단 규제를 하고 있기 때문에 존재하는 법의 산물이다. 구조본이 계열사간 중복투자를 막고 시너지 효과를 높이는 등의 순기능도 하고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무조건 구조본을 총수 독단경영의 전위대처럼 몰아부쳐서는 안된다. 외환위기 이후 각종 공시제도와 회계제도 도입, 외국인투자 활성화 등으로 시장감시기능이 크게 강화됐는데도 과거의 잣대로만 대기업을 재단해서는 안된다.
▲권 교수=부의 세습을 근절하기 위해서는 상속-증여세의 완전포괄제를 도입해야 한다. 재벌 2세들의 상속증여 문제는 이미 삼성 이재용씨 사건에서 경험했다. 게다가 최근에는 파생금융시장 규모가 엄청커지면서 법제도가 새로운 상품들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법치주의에 근거해 상속증여세를 부과할때 완전 포괄주의가 법정신에 맞다는 생각이다. 또한 완전포괄주의가 시행되더라도 사실상 국민의 99%는 전혀 문제가 안된다.
▲이 부원장=국민의 기본권을 보장하기 위한 민주주의의 두가지 원리는 죄형법정주의와 조세법정주의다. 세목과 세율, 과세요건 등이 법에 규정돼 있는데 이를 넘어서면 헌법정신에 위배되는 것이다. 부의 세습이 문제라면 현재의 유형별 포괄주의를 보완하면 된다. 정치적 영향력이 큰 우리나라의 특성을 감안할때 과도한 법규제는 득보다 실이 많다. 완전 포괄주의는 정부가 세원포착이나 제도정비 등의 할일은 안하고 개인에게만 책임을 묻겠다는 행정편의주의적인 발상이다.
▲권 교수=기업지배구조의 투명성 제고를 위해서는 증권관련 집단소송제도의 도입이 시급하다. 이 제도는 외환위기 당시 국제통화기금(IMF)과 우리 정부가 합의한 약속이다. 또 현재 증권거래법에서 불법으로 규정하고 있는 분식회계, 허위공시, 주가조작에 한해서만 엄격하게 적용되기 때문에 부작용은 거의 없을 것으로 본다. 또 제도가 시행되면 기업에게도 이득이다. 단기적으로는 기업들이 집단소송에 걸려들지 않기 위해 정도 경영을 해야하는 어려움이 있을지 모르지만 중-장기적으로는 기업가치가 더 올라가고 공신력을 제고할수 있는 만큼 기업경쟁력 제고에도 도움이 된다.
▲이 부원장=집단소송제는 기업투명성 제도가 아니라 소송특례 제도로 봐야 한다. 미국식 집단소송제는 당사자주의를 무시해 법치원칙에 위배될 뿐 아니라 기업활동에도 엄청난 부작용을 초래한다. 미국에서도 소송에 휘말린 기업의 주가가 30%씩 폭락한다. 문제가 있다면 현행 민사소송법을 다소 보완하면 된다. 무리하게 집단소송제를 도입할 경우 현정부의 대표적인 실패작인 빅딜정책의 재판이 될 소지가 있다. 미국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일본이 왜 이 제도를 도입하지 않았는지를 따져봐야 한다.
▲권 교수=소수 대주주가 불특정 다수의 예탁금으로 경영되는 금융계열사의 돈을 마치 자기 돈인양 사용하는 것도 큰 문제다. 이를 막기위해 금융기관 계열분리 청구제 도입이 논의되고 있다. 그러나 이는 초강경 조치인 만큼 신중을 기해야 하며, 이보다는 재벌 금융계열사에 대한 소유상한제를 도입하는게 낫다는 생각이다.
▲이 부원장=금융계열분리 도입은 기본적으로 너무 극단적인 발상이다. 이는 현행 공정거래법과 금융감독원의 징계 규정을 통해서도 얼마든지 규제할수 있다. 특히 계열분리는 주식매각을 강제하는 것인데 이는 헌법에서 보장하는 사유재산권을 명백하게 침해하는 초법행위다.
▲권 교수=최근 공정위의 고발권을 시민단체나 피해업체에 다양하게 주자는 얘기가 나오고 있다. 그러나 공정위가 일처리를 제대로 한다면 현재 있는 법만으로도 문제될게 없다는 생각이다. 사람이 제일 중요하다. 노무현 당선자는 공약대로 금감위원장과 공정위원장에 대해서도 인사청문회를 통해 제대로 본분을 다할수 있는 인물을 뽑아야 한다.
▲이 부원장=공정위의 전속고발권은 유지돼야 한다. 공정위의 업무가 고도의 전문지식을 필요로 한 사안들인데 모든 국민이 대상이라면 누가 기업을 할수 있겠나. 기업의 혼란은 물론 국가경제에도 막대한 악영향을 초래할 것이다. 공정위에 사법경찰권을 부여하는 문제도 현재의 조사권만으로도 충분하기 때문에 불필요하다.
▲권 교수=대기업의 출자총액 제한은 증권관련 집단소송제와 연계해서 생각할 필요가 있다. 집단소송제가 도입되면 출자총액 제한은 다소 완화돼도 무방하다. 그러나 현재로서는 재벌들이 자기자본의 30%, 총자산의 15%를 계열사 지분으로 가지고 있다. 이는 투자목적이라기 보다는 계열사를 지배하기 위한 수단이기 때문에 당분간은 불가피하게 규제할 필요가 있다.
▲이 부원장=집단소송제와 출자총액 규제를 결부시켜서는 안된다. 새정부에서 이 제도의 부작용에 대해 잘 모르는 것 같다. 기업이 투자를 제때 못하면 기업뿐 아니라 주주에게도 큰 피해를 주게된다. 우리나라 주식시장이 저평가된 것도 이 제도에 기인한바 크다. 또 출자총액제한은 외국기업과의 역차별로 공기업이 헐값에 넘어가는 등의 부작용을 초래하고 있다.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지않는 대표적인 규제정책이다.
▲권 교수=재벌 개혁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노무현 당선자의 의지다. 공정한 시장경제를 확립하겠다는 의지가 강하다면 '기업하기 좋은 나라'를 만들수 있다. 앞으로 5년간 단기적 실적에 연연하지 말고 백년대계의 다리를 놓는다는 자세로 임해줄 것을 당부한다. 또 재벌개혁의 기초공사는 정치개혁이다. 재벌개혁은 시스템적으로 접근해야하기 때문에 시간이 걸리지만 정치개혁은 속전속결로 끝내야한다. 정치개혁이 되지 않고 재벌개혁만 하라고 하면 순서가 잘못됐다.
▲이 부원장=전적으로 공감한다. 4대부문 개혁 중 재벌개혁을 제외한 정치-노동-공공부분 개혁은 극히 미진하다. 개혁하면 재벌을 떠올리는 식의 표적개혁은 곤란하다. 새정부는 기업이 투자를 활성화하고 경쟁력을 제고할수 있도록 기업환경을 개선하는데 역점을 둬야 한다. 가뜩이나 대외경제 여건이 불투명한 상황에서 개혁정책이 대기업에만 편중될 경우 경제강국 건설의 꿈도 멀어질수 밖에 없다.
민병오-박선영기자 eagleeye@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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