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의 의료서비스에 왜 만족하지 못할까
지역 간의 의료 불균형. 공공의료 인프라 부족. OECD 평균에 못 미치는 의사 수와 건강보험 보장율. 의료분쟁과 파업. 우리나라 의료에는 늘 이슈가 많고 문제는 늘 심각하다. 그런데 뭔가 앞뒤가 맞지 않는다. 모국 방문길이면 짬을 내 검진을 하고 치료를 받는 미국 교민들은 왜 즐거워할까. 한국의 병원을 찾아오는 의료관광은 또 뭔가. 속으론 만족하면서도 ‘헬조선’을 말하는 인지부조화 현상이고 진실의 왜곡이다. 의료비는 선진국보다 낮고 의료서비스의 품질은 높다. 의료기관과 의사를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고 병원 사람들은 친절하다. 의료서비스 제공자는 그만큼 고단하겠지만 잘 정착된 건강보험제도 덕분에 우리 국민이면 누구나 누리는 의료복지는 풍요롭다. 정부와 공적 기관이 제공하는 공공서비스와 소비자의 개인적 요구에 의한 개인 서비스의 양면을 지니는 게 의료서비스다. 코로나19처럼 공중보건을 위한 방역이나 소외계층의 의료돌봄은 공공의 영역이지만 성형과 미용, 건강증진을 위한 의료서비스는 개인의 영역이다. 이미 우리나라의 의료서비스는 공공과 민간에서 외국이 부러워할 만큼 선진화를 달성했다. 콘텐츠도 좋고 소비자도 만족하는 시장. 문제는 늘 있게 마련이다. 진실을 비틀어서 기대치를 자꾸 끌어올리기보다 지금의 정책을 올바로 평가해 국민이 행복을 느끼도록 해야 하는 건 정치인들의 책임이다.
가격과 수요의 기본원리를 간과한 정책
건강보험료(‘건보료’) 인상을 놓고 정부의 고민이 깊다. 매년 6월이면 다음 연도의 건보료 인상률이 정해지는 게 보통이지만 금년엔 건강보험정책심의회가 이 결정을 늦췄다. 늘어나는 건보재정의 적자를 생각하면 많이 올려야 하지만 국민의 동의를 구하는 게 만만치 않기 때문일 것이다. 얼마나 더 올리는 게 최적일까. 논의가 더 필요하다는 게 보건복지부의 해명이지만 국민의 눈치를 살피는 형국이다. 이 문제는 2018년에 시행된 소위 ‘문재인 케어’로 불리는 건강보험 보장성 강화정책 때문이다. 이 정책의 골자는 건강보험이 적용되지 않았던 비급여 진료 항목을 적용대상에 추가해 가계의 의료비 부담을 줄이자는 것이다. 그러나 환자가 부담하는 진료비가 낮아지면서 의료수요가 기대 이상으로 증가하는 부작용이 나타났다. 뇌·뇌혈관 MRI 촬영에 대한 건강보험 재정투입은 시행 첫해 예상했던 수요보다 70% 넘게 초과하자 정부는 서둘러 환자의 부담 비율을 30~60% 수준에서 80%로 다시 올렸다. 가격이 내리면 수요가 증가하는 시장원리를 간과한 결과다.
물 건너간 건강보험 70% 보장률 약속
그동안 건보료는 지난 4년간 12.1%나 올랐다. 현재 6.86%인 건보료율로 재정을 충당하고 있지만, 재정수지는 새로운 건보 시행 이듬해부터 곤두박질해 2018년부터 수천억 원씩 적자로 전환되었다. 그나마 코로나19로 병원 찾는 수요가 급감한 작년엔 3,500억 원대로 적자가 줄었다. 건보재정의 투입은 ‘문재인 캐어’ 시행 첫해 3조8000억원에서 10년 후인 2027년에는 12조1,000억원으로 더 늘어날 전망이다. 지속 가능성이 문제다. 이전 정부들이 쌓았던 20조 원 넘던 건강보험 누적 적립금은 2020년 말 현재 17조 원대로 떨어졌다. 그렇다고 막대한 재정을 투입한 만큼 정책목표는 달성했을까. 전체 의료비 중 건강보험 부담 비율인 건강보험 보장률은 2018년 63.8%에서 2019년 64.2%를 기록해 제자리 수준이다. 문 대통령이 약속한 2022년 70% 달성은 물 건너갔다.
국민 다수가 반대하는 건보료 인상
늘어나는 지출만큼 건보재정을 늘여도 의료수요는 더 많이 늘어난다. 이 난제를 어떻게 풀까. 지난달 경총이 내놓은 ‘건보 현안에 대한 대국민 인식조사’의 결과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국민 다수는 현재의 의료서비스에 대체로 만족하는 걸 주목해야 한다. 국민 10명 가운데 7명은 보장성을 더 늘여 대상을 전면 확대하기보단 현재 수준을 유지하면서 중증 위주로 확대하고 보험료율은 지금 수준 또는 인하하는 게 좋다고 응답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의료서비스의 수혜자이자 부담자인 국민 다수가 대통령 공약의 명분보다 실리를 선호하고 있다는 얘기다. 재정부담을 줄이고 공공서비스의 실효성을 높이는 게 관건이다. 이를 위해선 건보료 인상의 프레임부터 깨야 한다. 적정한 부담을 위해선 먼저 적정한 지출수준을 정하고 재정을 효율화하는 게 우선이다. 경증환자와 다빈도 이용자의 자기부담금을 늘여 의료서비스의 과다한 이용을 줄이고 늘어난 재정을 꼭 필요한 곳에 서비스를 집중해야 한다는 걸 건보료를 부담하는 소비자들은 잘 안다. 초고령사회 진입에 대비해 의료전달체계를 개선하는 일이 건보료 올리는 고민보다 국민에겐 먼저다.
자료: 경영자총협회, 건보 현안에 대한 대국민 인식조사(2021. 6)
서비스란 본래 이질적이다. 똑같은 서비스라도 개인마다 효용이 다르다는 걸 모르면 소비자 모두를 만족시키려는 제공자의 기대는 빗나간다. “국민의 질병‧부상에 대한 예방‧진단‧치료‧재활과 출산‧사망 및 건강증진에 대하여 보험급여를 실시함으로써 국민보건 향상과 사회보장 증진에 이바지함을 목적으로 한다.”라는, 건강이 모두 망라된 국민건강보험법의 목적(제1조)을 모두 달성할 수 없는 현실에서는 법‧제도의 취지에 먼저 충실해야 한다. 건강보험은 모든 국민을 질병 등의 사회적 위험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사회안전망을 구축하고 지속하기 위한 제도다. 인기 있는 정책이라도 내 호주머니에서 돈이 나갈 때는 누구나 신중해진다. 복잡한 문제일수록 원점에서 원칙에 충실하면 고민이 줄어든다.
건보재정 확대보다 효율화로 전환해야
늘어나는 지출만큼 수입을 확보해도 달성하기 어려운 건보재정의 딜레마. 국민의 부담에 의존하기보다는 최근 4년간 실행된 보장성 강화정책의 실효성을 평가하는 일에서 해법을 찾아야 한다. 2017년 10조원이었던 고용보험 적립금이 선심성 일자리 정책으로 인해 모두 고갈된 것에 비추어 봤을 때, 건보재정의 불균형은 가볍지 않은 현안이다. 건강보험제도는 국민건강 증진을 위한 사회보장제도다. 의료체계와 의료자원의 효율적 운영을 통해 의료서비스가 필요한 국민이 모두 적시에 적정인에 의해 적소에서 적정진료를 이용할 수 있도록 하는 의료전달체계의 구축과 실행이 핵심이다. 본인의 의사와 관계없이 법률로 강제 적용되는 이 제도는 보험 가입을 기피할 경우 국민이 의료비를 공동으로 해결하고자 하는 제도는 목적을 달성할 수 없다. 그동안 지속적인 건강보험의 확대로 우리나라의 건강복지는 세계적인 수준이 되었다. 의료서비스의 공급자 간에는 불균형이 문제다. 종합병원마다 환자가 넘치는 한쪽에는 경영난을 겪는 의료기관들이 있다. 지속 가능한 의료복지를 위해서는 정책의 방향이 수정되어야 한다.
2차 병원급 역할 확대로 수급 불균형 해결해야
의료서비스의 수급 균형을 맞추려면 먼저 의료전달체계를 개선해야 한다. 1989년 처음으로 전국민 대상의 의료보험제도가 실시될 당시 행정구역과 생활권에 따라 진료권을 설정하고 의료기관도 1·2·3차로 구분해 기능을 분담했으나 지역 간 불균형의 문제가 나타나면서 1999년 국민건강보험법의 제정으로 상급종합병원을 제외한 1단계 요양급여와 2단계 상급종합병원 요양급여로 구분해 시행해 왔다. 그동안 환자가 종합병원 집중됨에 따라 나타나는 의료자원의 비효율성이 늘 문제다. 2018년 문재인 케어는 이를 더 악화시켰고, 건강보험의 재정부담도 급격하게 늘었다. 의료수가나 건보료 인상으로 풀리는 문제가 아니다. 지금의 1·2·3차 의료기관 분류체계를 수요와 공급에 맞게 조정해 환자가 요구에 맞는 적절한 의료서비스가 제공되도록 하는 게 핵심이다. 의원급에서 치료 가능한 질환은 의원급에서, 2차 병원급에서 치료 가능한 질환은 2차병원급에서, 그리고 종합병원에서 가능한 질환의 치료는 상급종합병원에서 치료를 시행토록 해서 환자가 신속하게 적절한 의료서비스를 받도록 하는 일이다.
의료자원의 효율적 활용방안이 필요
한쪽에선 수요가 몰려 공급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또 다른 쪽에선 수요부족을 겪는 시장의 불균형과 자원의 비효율성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개원하는 의사 중 전문의 비중이 절대적으로 높은 우리나라의 현실을 활용해 다음과 같이 개선안을 찾아야 한다. 지금의 상급종합병원 중심의 의료체계를 개선해 중소병·의원 등 1차 의료기관 중심의 전달체계를 개선해 의원급의 서비스 영역을 확대해야 한다. 환자교육, 건강증진, 예방 등을 담당하고 영유아, 소아‧청소년, 노인 등 생애주기별 건강관리 및 지침 제공 서비스, 건강검진 사후관리 서비스 등의 기능을 수행토록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1차 의료기관의 참여를 높이려면 행정절차의 간소화, 치료계획과 상담을 위한 수가 인상 등의 다양한 방안을 검토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지역의 중소병원 육성을 위해 수가 가산도 적극적으로 검토할 필요가 있다. 중소병원은 의료전달체계에서 중심적 역할을 담당하는 기관이다. 왜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는지 수요와 공급 불균형의 원인을 소비자의 관점에서 짚어보고 제대로 된 개선안을 찾아내야 한다.
지속 가능한 건강보험제도로 전환해야
세계적 수준의 의료서비스를 경험하고 있는 국민을 더 만족시키는 일은 쉽지 않다. 욕구가 충족되면 기대가 더 높아지는 ‘고객만족의 역설’을 생각해야 한다. 지속된 건보료 인상 덕분에 국민 대다수는 서비스 향유에 따르는 비용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차기 정부의 건강보험정책 방향에 대해 대부분은 건강보험 혜택, 건강보험료 부담 모두 현재의 수준을 유지할 것을 바라고 있다. 건강보험의 혜택을 전면적으로 확대하기 위해 매년 지속적인 보험료율 인상을 전제로 하는 지금의 보장성 강화정책에 동의하지 않는 것이다. 재산세와 소득세처럼 상위 1%, 10% 납세자를 표적으로 편을 나누고 표심을 얻을 수도 없는 게 건강보험이다. 보험료를 인상하는 것보다 현재 거두고 있는 보험료를 더 효율적으로 지출하는 방안을 찾는 일이 먼저다. 가입자들은 의료서비스의 수요자와 공급자가 상생할 수 있는 근본적인 방법을 원하고 있다. 문재인 케어는 지속 가능한 정책이 아니다. (끝)
허희영 / 한국항공대 경영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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