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高)복지정책은 정치적으로 인기가 있다. 소위 포퓰리즘적 요소를 가진 복지정책의 문제점들은 잘 알려져 있다. 노동은 힘들다. 그래서 남의 것을 얻어서 (혹은 심하게 표현하면 약탈해서) 살아갈 수 있는 길이 있다면, 이 길을 택하려는 유혹은 강렬하다. 이것이 복지정책으로 인해 빈곤으로부터 탈출하는 계층보다 오히려 복지에 의존해 살아가는 계층을 더 많이 만들어내는 이유이다. 물론 이런 문제를 완화시키려고, 복지(welfare) 대신 근로복지(workfare)와 같은 개념을 도입하는 등의 노력이 없지 않았다. 그러나 복지프로그램이 온존하는 한, 이런 유혹을 없애기는 쉽지 않다. 다수 득표에 따라 집권을 하는 민주주의와 이런 복지포퓰리즘이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렇다면 다수결 민주주의 아래 정치권의 복지 포퓰리즘 경쟁을 제어할 구조는 전혀 없는 것일까? 그 해답은 아마도 고(高)세금이 정치적으로 인기가 없다는 데 있지 않을까 싶다. 비록 고(高)복지의 약속이 정권을 창출하는 데 도움이 되더라도 이것을 뒷받침할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높은 세금을 물려야한다. 그러나 높은 조세는 정치적으로 인기 있는 정책이 아니다. 세금을 쉽게 올렸다가는 그 정권은 오래가지 못한다. 이런 연계에 대해 투표자들이 명확하게 인식할 수 있다면, 혹은 정치권에서 정책을 개발할 때 이런 연계 구조를 감안하지 않을 수 없다면, 비록 경기침체기에 어려움을 겪는 계층이 상당수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아마도 정치권의 고복지 프로그램 경쟁은 크게 자제될 것이다. 고(高)조세-고복지 약속은 단순한 고복지 약속에 비해 인기가 없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정치권에서 높은 복지를 약속하면서 재원을 늘리기 위해 일반적으로 가장 먼저 시도되는 것이 “부자 짜내기”(soak the rich) 정책이다. 소수의 부자들의 부를 짜낸다 하더라도 득표에 별로 부정적 영향을 주지 않을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이런 점은 최근 한나라당에서 제안한 새로운 높은 세율의 소득구간을 만들어는 소위 “버핏세” 신설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물가가 상승하고 있는 상황에서 실질소득은 종전과 같더라도 명목소득은 높아지기 때문에 누진세율 구조 아래에서는 사람들의 세금 부담이 자동적으로 증대된다. 그런데 현재 물가는 비록 완만하지만 계속 상승하고 있어서 이미 세금부담이 조금씩 늘어나고 있는 와중에 새로이 더 높은 세율이 적용되는 구간을 신설하려는 것이 소위 “버핏세”이다.
보편적 복지가 강조되면 “더 넓은 세원”은 필수적이다. ‘부자 짜내기’로는 부족하므로 중산층들과 더 낮은 소득 계층에 대해서도 면세를 없애거나 종전보다 더 높은 세율을 부과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이들이 더 높은 세금에 동의할 것인지는 의문이다. 그런 점에서 세금을 바탕으로 하는 복지정책은 재정민주주의가 제대로 지켜지고 있다면 비록 정치권에서 이를 고려하고 있더라도 일정한 정도 제한을 받기 마련이다.
2. 인플레이션을 통한 재원조달의 가능성을 차단하여야
그러나 정부가 인플레이션(통화증발)을 통해 재정을 조달하는 것이 가능하고 정부가 이에 의존하게 된다면, 광범위한 계층에 대한 더 높은 세금을 추진하지 않고서도 단기적으로 그리고 투표자들의 오해 속에 마치 저(低)세금-고복지가 가능한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킬 수 있다. 투표자들이 그 정도로 세금을 낼 의사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루어진 그런 의사가 있음을 전제로 하고 도입된 복지 프로그램은 결국 장기적으로 파탄에 직면할 운명을 안게 된다.
인플레이션을 통한 정부지출을 위한 재원조달 방법은 심지어 전쟁 중인 위급상황인 경우에도 이를 사용하지 않는 것이 좋다. 전시에도 세금을 통해 부과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전시에 필요한 것은 생산과 소비를 평화의 시대와는 달리 군사적 목적으로 돌려야 한다. 사람들에게 세금을 부과함으로써 그 돈만큼 그들이 평상시 쓰던 것을 줄이도록 하여야 한다. 그 결과 전쟁이 벌어지면, “모든 시민들의 아침 식탁에 보이지 않는 손님, 군인 한 사람이 더 앉아 있게 된다. 그 시민의 주차장에 그 사람의 차 이외에도 보이지 않지만 탱크와 폭격기가 놓여있게 된다.”
물론 전시와 같은 상황이 되면, 거둘 수 있는 세금에 한계가 있어서 국채를 발행해야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국채는 되도록 민간이 인수하도록 하게 해야 한다. 그렇게 해야 국채발행에 따라 이자율이 높아지게 되고 제대로 소위 민간투자가 구축되는 효과(crowding out effect)가 발생해서 민간의 저축으로부터 정부와 민간이 경쟁적으로 쓰고자 하는 충돌이 발생하지 않는다.
3. 신용창출에 따른 단지적인 활황과 이에 이은 불황
정부가 일반 민간이 아니라 상업은행이나 중앙은행으로 하여금 이 국채를 인수하게 하는 경우, 결국 더 많은 신용(통화)이 창출되게 된다. 상업은행 등이 보유한 국채가 중앙은행에 인수되고 이를 바탕으로 본원통화가 더 많이 공급되면 부분지급준비제도 아래에서 그 국채 총액의 통화승수—지급준비율이 10%일 때, 10배—만큼 통화량이 급증하게 된다. 이것이 인플레이션을 통한 재정조달이다. 이렇게 되면 대부시장에서의 시장이자율은 오히려 종전보다 더 낮아져 정부와 민간이 주어진 자원에 대해 서로 쓰고자 충돌하는 상황이 발생한다.
단기적으로는 물론 이것이 경기 붐처럼 보이는 현상을 불러올 수도 있다. 그러나 결국 더 많이 발행된 신용들로 인해, 대부분의 재화들의 가격들이 상승하지 않을 수 없고, 시장이자율도 다시 높아지지 않을 수 없다. 그 결과 낮은 대부시장에서의 이자율로 인해 유발된 많은 민간투자들 가운데 상당수는 실패하게 되고 경기도 침체의 시기를 겪는다. 한 때의 붐으로 인해 사람들의 절망은 더 커지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물가상승을 두고 소위 ‘투기자’들을 찾아 이들을 희생양으로 삼으려는 정치적 경향이 강해진다. 이런 사회 분위기 속에서 사회통합은 기대하기 어렵다. 인플레이션을 통한 재정조달이 없었을 경우에 비해 사회적 갈등이 더 커진다.
물론 복지 지출을 위한 재정조달은 많은 측면에서 전시의 경우와는 다르다. 복지 지출의 경우, 국채의 발행의 시급성이나 필요성에 있어서도 전시에 비교할 수 있을 정도라고 하기는 어렵다. 그래서 복지지출에 필요한 재원은 세금으로 조달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투표자들의 선택을 묻는 것이, 정부의 지출과 재원조달에 국민 대다수의 의견을 반영한다는 재정민주주의의 원칙에도 부합한다. 이를 위한 국채 발행은 최대한 자제되어야 마땅하다. 그리고 만약 이런 길이 허용되더라도 이것이 통화증발로 이어지는 길을 차단해야 한다.
4. 한국은행의 준(準)재정활동에 대해 정비할 필요
앞에서의 논의는 두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신용창출을 통한 재정조달의 가능성이 열려 있으면, 국민들의 동의를 얻어 세금을 부과하고 정부지출을 결정한다는 재정민주주의는 구호에 불과하게 될 수 있다. 인플레이션을 통한 재원조달이 봉쇄될 때, 정치권의 포퓰리즘적인 고복지 프로그램 개발 경쟁이 자제될 가능성이 있다. 둘째, 신용 팽창을 통한 재정조달은 자원을 낭비한다. 신용팽창이 자금시장에서의 이자율구조를 왜곡시켜 장기적으로 실패할 투자를 시작하게 만들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우리의 정책제안은 진정한 국민적 합의 아래 조세와 정부지출에 관한 정책이 이루어지는 재정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기 위해 신용창조를 통한 재정조달을 가능한 한 최대한 봉쇄하자는 것이다. 이를 실천하기 위해 한국은행의 준(準)재정활동과 관련된 법률과 규정들, 재정법 관련 법률들을 다시 엄밀하게 검토하고 재정비하여야 할 것이다.
김이석 / 자유기업원 초빙연구위원
<참고문헌>
미제스(김이석 역), 화폐와 신용의 이론, 한국경제연구원, 2011.
Mises, “Inflation: An Unworkable Fiscal Policy,” in Economic Freedom and Interventionism, (1990) Irvington-on-Hudson, NY: Foundation for Economic Educ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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