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여정부의 3차에 걸친 언론통제 조치
1) 제1차 조치(홍보업무운영방안)
노무현 대통령은 취임 직후인 2003년 3월 7일 장관급 및 청와대수석들이 모인 제1회 참여정부 국정토론회에 참석, 강연을 통해 각부서의 책임자들이 언론과 ‘긴장관계’를 유지하라고 역설하면서 언론으로 인해 ‘억울한 일’을 당할 때는 가만히 있지 말라고 당부했다. 노대통령의 이날 발언은 그의 언론에 대한 비타협주의를 실천하려는 것으로, 참여정부 언론정책의 기본방향을 제시한 것이었다. 노 대통령은 이와 함께 청와대를 비롯한 정부 각 부서에서 조간신문의 가판을 구독하는 것을 금지했다. 관리들이 조간 가판을 보고 불리한 기사를 빼라고 언론사에 부탁하는 것이 못마땅했기 때문이다. 그가 이처럼 취임 초부터 언론에 강공책을 쓴 것은 김대중 정부의 언론정책 실패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일찌감치 ‘언론 길들이기 전략’을 쓴 것이라 할 것이다.
이에 따라 이창동 문화관광부 장관은 1주일 뒤인 2003년 3월 14일 새로운 ‘홍보업무운영방안’을 발표했다. 그 골자는 기자실의 폐지와 브리핑실 및 취재지원실 설치, 그리고 브리핑제 실시였다. 청와대는 가장 먼저 청와대 기자실의 운영방식을 바꾸어 종래에 출입이 허용되지 않았던 인터넷매체 기자들을 포함한 270여명에게 출입을 허용했다. 그 동안 한국언론의 오랜 숙제였던 폐쇄적인 기자실 운영 문제에 해결의 실마리가 잡히고 정부당국의 정례적인 브리핑을 통해 행정정보를 공개하는 전향적인 방안이 마련된 것은 환영할 일이다. 언론이 오보를 냈을 경우 정부 관련부서가 능동적으로 해명자료를 배포하고 반론 및 정정보도를 청구토록 한 것 역시 노대통령의 지시가 아니더라도 정상적으로 실시되기만 한다면 언론의 오보방지와 국민의 알권리 신장을 위해서도 바람직한 일이다. 문제는 이런 조치들이 순수한 동기에서 나온 것인가 하는 데 있었다.
문광부의 홍보업무운영방안 가운데 특히 문제가 된 것은 기자들의 정부 부처 사무실 방문 취재를 제한하고 사무실방문 취재 때는 공보관의 사전협력을 받아야 하며 취재대상자의 실명표시제를 실시하고 공무원은 기자와의 회식을 자제하며 취재에 응한 공무원은 공보관에게 통보하도록 한 점이다. 이런 방안은 사실상의 자유로운 취재에 대한 억제조치라 할 것이다. 정례적인 브리핑제 도입 같은 모처럼의 전향적인 조치도 이런 방안과 맞물렸기 때문에 문공부의 홍보업무운영방안이 정부에서 발표하는 것만 언론이 쓰도록 하려는 언론억제 방안으로 인식된 것이다. 일선기자들의 모임인 한국기자협회는 성명을 내고 이 같은 취재제한조치가 국민의 알 권리와 언론자유를 침해하고 정부와 언론 간에 긴장을 조성하는 것이라고 비판하면서 이 조치의 수정을 요구했다. 노 대통령은 4월 2일 국회에서의 첫 시정연설에서 문광부의 홍보운영방안에 대해 언급하면서 기자들의 사무실 출입은 제한하는 것이 옳지만 업무에 지장을 주지 않는 범위 안에서 자유롭게 공무원을 만날 수 있도록 보장할 것이라고 밝히고 취재 시 공보관을 거치거나 공무원이 신고하는 규정을 없애고 공무원의 자율에 맡기겠다고 말했다. 이로써 문광부의 새로운 조치는 일부 완화되었다.
2) 제2차 조치(언론관계법 개정)
열린우리당은 2005년 1월 1일 기존의 정기간행물법을 대체하는 두 개의 언론관계법안을 통과시켰다. 그 하나는 ‘신문 등의 자유와 기능 보장에 관한 법률(신문법)안’이며 다른 하나는 ‘언론중재 및 피해구제 등에 관한 법률(언론중재법)안’이다.
이들 언론관계법안은 노무현 정부가 추진한 국가보안법폐지법, 과거사조사법. 언론개혁법, 사립학교법 등 이른바 4대 개혁입법 계획 가운데 여야 합의에 의해 맨 먼저 통과된 것이다. 노 대통령이 구상한 근본적인 언론구조개혁은 법제화가 필요했기 때문에 야당이 다수를 차지한 16대 국회에서는 불가능했다. 그러나 2004년 4월 실시된 17대 국회의원 총선에서 열린우리당이 다수당이 되자 이를 추진하게 된 것이다. 열린우리당은 이들 개혁입법을 그해 정기국회에서 시도하다가 야당의 반대에 부딪쳐 실패하자 연말에 임시국회를 열어 언론관계법안 심의를 강행한 끝에 12월 31일 밤을 넘기고 새해 첫 새벽에 이들 언론법안을 통과시킨 것이다.
국회를 통과한 신문법안은 1개 신문의 시장점유율이 30%가 넘거나 3개 신문이 60%를 넘는 경우에는 이를 독과점으로 인정해 특별규제를 받게 하고, 신문발전위원회와 언론유통원을 두어 정부가 특정 언론사를 지원할 수 있는 규정을 넣었다. 이들 조항들은 모두 시장경제원칙을 왜곡하는 규정들인데 노무현 정부의 속셈은 보수적인 메이저신문을 발행부수 상한제로 묶는 동시에 친정부적인 마이너신문을 지원하자는데 있었다. 이 법안에는 노 대통령이 그렇게도 희망했고, 또한 그 동안 시민단체들이 그렇게도 집요하게 요구했던 언론사 소유구조개편, 즉 대주주의 주식소유상한을 30%로 제한하는 조항은 열린우리당이 위헌소지가 있다고 스스로 판단해서 제외되었다. 언론중재법안은 피해 당사자가 아닌 제3자의 시정권고도 기능하도록 함으로써 정부가 언론보도에 사후적으로 간여할 수 있게 했다. 이러한 새로운 조항들에 대해 국내 언론단체는 물론 국제언론인협회(IPI)도 노 대통령에게 공개서한을 보내 언론자유 침해의 우려가 있으므로 대통령이 이들 법안의 서명을 거부하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노무현 정부의 언론구조개혁 시도는 1년 반 만에 헌법재판소의 언론관계법 일부 위헌 판결로 그 핵심조항들이 무효가 됨으로써 중대한 장애에 부딪쳤다. 즉 헌법재판소는 2006년 6월 29일 동아 조선 두 신문이 제기한 헌법소원을 심리한 끝에 1개 신문사의 시장점유율이 전국 발행부수 기준 30% 이거나 3개 신문사가 60% 이상일 경우는 공정거래법상 시장지배적 사업자로 규정토록 하는 신문법 조항은 위헌이라고 결정했다. 헌재는 공정거래법상 여타 업종의 경우 1개 사업자 50% 이상, 3개 이하 사업자 75%일 경우에 시장지배적 사업자로 추정된다는 점, 그리고 시장지배적 지위는 독자의 선택에 의해 형성된다는 점 등을 감안할 때 이 조항은 평등권과 신문의 자유를 침해한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시장지배적 사업자를 신문발전기금 지원대상에서 제외시킨 조항도 위헌결정이 났다. 헌재의 위헌판결로 노무현 정부가 대신문의 시장점유율을 인위적으로 묶으려던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언론중재법 중에서는 정정보도 청구소송을 가처분절차로 처리토록 한 조항이 위헌으로 결정되었다. 그 이유는 가처분 절차에 의해 재판을 할 경우 소송을 당한 언론사의 방어권을 심각하게 제약해 언론 자유를 위축시킬 우려가 있다는 것이다. 이 조항의 위헌 결정은 노무현 정부가 마구잡이로 정정보도 청구를 제기함으로써 정부에 불리한 기사를 즉시 봉쇄하려던 기도를 좌절시켰다. 헌재는 또한 신문사가 다른 신문·통신사를 소유하는 것을 금지하는 조항은 헌법불합치라고 결정했다.
헌재는 그 대신 핵심 쟁점 중 하나인 신문사의 경영정보 공개 의무조항 등에 대해서는 합헌이라고 결정했다. 일간지의 전체 발행부수 및 유가 판매부수, 구독수입과 광고수입, 총 발행주식, 5% 이상 소유주주 등 경영정보를 신문발전위원회에 신고토록 하고 있는데 신문은 일반기업에 비해 사회적 책임이 큰 만큼 경영활동 자료 신고를 통해 투명성을 높일 필요가 있다는 근거에서다.
3) 제3차 조치(취재지원선진화방안)
2007년 5월 22일 국정홍보처는 청와대와 국방부 등 일부 부처를 제외한 대부분 정부 부처의 브리핑실을 없애고 세종로 정부중앙종합청사와 과천종합청사에 마련하는 종합브리핑실로 통합한다고 발표했다. 이 5ㆍ22조치는 사실상 기자들의 정부부서 출입과 취재활동을 원천적으로 봉쇄하려는 극단적인 취재제한 조치이다. 이 조치에 대해 즉각 문화일보가 위헌 확인 헌법소원을 제기했다.
주목할 점은 참여정부의 중요 언론정책 내용이 노 대통령 개인의 언론관과 일부 시민단체의 좌파적 이념노선에서 비롯되었지만, 5ㆍ22방안은 오로지 노 대통령의 말 한마디로 결정된 점이다. 즉, 노 대통령은 2007년 1월 16일 국무회의에서 “특권과 유착, 반칙, 뒷거래 청산에 완강히 저항하는 집단이 언론”이라면서 각 부처 기자실의 실태조사를 지시했다. 그는 “기자실에 몇몇 기자들이 죽치고 앉아 보도 자료를 가공하고 담합한다”고 말한 다음 국정홍보처와 외교통상부에 외국 기자실은 어떤지 실태를 조사해 보라고 지시까지 했다. 이날 그의 지시가 이른바 ‘취재지원선진화방안’의 단초가 된 것이다.
국정홍보처는 노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실시한 국내외 기자실 운영 실태에 대한 조사 결과를 3월 22일 발표했다. 그 내용은 대부분의 선진국에는 정부 내 기자들이 상주하는 기자실이 없으며, 사전협의 없는 공무원 대상 인터뷰 취재는 불허한다는 것이었다. 물론 이 발표는 유럽 일부 국가의 이야기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나중에 밝혀졌다. 미국과 일본에는 정부 부처에 기자들이 상주하는 기자실이 제도화되어있다.
5ㆍ22방안은 노 대통령 주재로 열린 이날 국무회의에서 확정되어 8월부터 실시키로 했다. 이 방안은 행정부 각 부처에 있는 37곳의 브리핑실 및 기사송고실을 세종로 정부중앙청사, 정부과천청사 및 정부대전청사 등 3곳으로 통폐합하고, 지방경찰청별로 마련되어 있는 경찰 내 14곳의 브리핑실은 서울에 있는 경찰청 본청 기자실 1곳으로 통폐합하며 검찰도 법무부와 검찰 기자실을 통합해 1곳 정도만 운영한다는 것이다. 브리핑실 통폐합 이외의 중요 쟁점은 공무원접촉문제였다. 사전 허락 없이는 기자의 공무원 접촉 및 부처 사무실 방문을 금지하도록 했다.
5ㆍ22방안에 대한 언론의 반발이 심하게 일자 국정홍보처는 9월 14일 수정안을 발표했다. 그 내용은 ‘취재지원에 관한 기준안’(총리훈령)에서 대표적인 독소조항으로 지적되어 온 11조와 12조를 삭제하는 것이다. 즉 공무원들이 기자의 취재에 응할 경우 공보관실과 사전 협의하고, 답변 사실을 사후 보고토록 한 조항(11조)과 면담 취재 장소를 새로 만드는 통합브리핑센터 또는 정부기관의 장이 정한 접견실로 제한하는 조항(12조)을 삭제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브리핑실 통폐합 방침에는 변화가 없었다. 다만, 검찰과 경찰의 브리핑 및 송고시설 운영은 이들 기관의 특수성을 고려해 현행대로 유지하기로 했다.
그런데 기자의 공무원 접촉 제한조항은 총리훈령에서는 삭제되더라도 각 부처에서 이를 내규로 정하고 있기 때문에 실효성이 없다는 지적이 언론계에서 제기되었다. 그러나 정부는 이를 무시하고 공무원 접촉통제 조항만 수정한 채 기왕의 브리핑실 통폐합방침을 밀어붙여 통합브리핑실 공사를 강행했다. 해당기자들은 새로 마련된 통합브리필실에서의 정부 브리핑을 받는 것을 거부하는 등 저항을 계속했다. 그러나 국정홍보처는 최종적으로 10월 11일 기존의 각 부처 기자실(기사송고실)의 집기를 들어내고 인터넷선을 절단하는 등 강제 폐쇄조치를 단행해 버렸다. 그 결과 세종로 정부중앙종합청사에 있던 총리실 통일부 등 9개 부처의 브리핑실이 없어져 1천여명에 달하던 등록기자와 200여명에 달하던 상주기자가 한 사람도 없게 되고, 재정경제부 법무부 등 10개 부처가 들어있는 과천종합청사도 1개 건물(재경부 법무부)에 한 개의 통합브리핑실을 두고 나머지 4개 동에는 부처별 브리핑실을 모두 폐쇄, 상주기자 250여명이 없어지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건국 이래 근 60년간 운영되던 각 부처별 기자실은 없어지게 되고, 길거리로 쫓겨난 기자들은 종래의 기자실 출근투쟁으로 이에 대항했다. 이 3차 조치로 인해 언론의 정부감시 기능과 국민의 알 권리는 그 만큼 제한받게 되었다.
노무현 대통령의 언론관
노무현정부의 언론정책은 노 대통령 개인의 언론관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는 취임 반년만인 2003년 8월3일 2차 국정토론회에서 “5공 때 문귀동(文貴童) 성추행사건 당시부터 언론에 대한 불신이 (나의) 마음속에 싹터왔다”고 털어놓았다. 그는 당시 검찰이 ‘운동권 세력이 성(性)을 혁명의 도구로 사용한다’고 발표하자 일부 언론에서 검찰의 발표를 아무 비판 없이 그대로 보도한 사실을 지적하면서, “이것은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고 분개했다.
노 대통령의 이 같은 부정적인 언론관은 그의 운동권적 사고방식에다가 자신이 언론으로부터 받은 피해와 이로 인한 언론과의 소송에서 잇따라 승소한 개인적인 경험, 그리고 일부 대(大)신문들의 ‘박해’에도 불구하고 대통령에 당선된 데 따른 그의 자신감이 복합되어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그의 언론과의 악연은 1988년 4월의 13대 총선을 앞두고 일어난 현대중공업 노조사태에서 비롯되었다. 현대중공업 노조가 파업에 들어갔을 때 그는 현지의 노동자 집회에 참석해 울산은 노동자가 많이 사는 곳이니까 노동자 대표를 (국회의원으로) 뽑아주기 바란다고 말하면서 “저는 다른 어느 곳에든 가면 당선되지 않겠느냐"고 발언했다. 그런데 일부 대신문들이 이 대목을 "나는 어디 가든지 당선된다. 나 같은 사람 20명만 있으면 국회를 뒤집을 수 있다"고 말한 것으로 보도함으로써 자신을 '교만한 정치인'의 표본처럼 만들었다고 그는 주장했다. 그가 참다못해 기자실을 찾아가 해명하고 항의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더니 언론은 성명서 가운데 과격하다는 인상을 주는 대목만 인용 보도해 그를 더욱 ‘오만한 사람’으로 만들고 사설까지 써서 자신을 ‘지근지근’ 밟았다는 것이다. 그에 의하면, 이는 단순한 흥미 위주의 보도가 아니라, 정치인이 노동자의 집회를 찾아다니지 못하도록 쐐기를 박자는 의도에서 나온, 특정 정치인의 가치관에 대한 공격이라는 것이었다.
3년 후인 1991년에는 조선일보사에서 발행하는 《주간조선》이 “인권변호사 출신 노무현 의원, 알고 보니 부자, 호화 요트 소유”라고 보도하자 그는 3억원을 청구하는 명예훼손 소송을 제기했다. 1심에서 그는 승소하여 2천만 원을 배상하라는 판결을 받아냈으나 2심에서는 화해하고 소송을 취하했다. 그 이유는 청구액에 비해 엄청나게 적은 액수의 배상판결이 나와 2심으로 끌고 가도 제대로 될지 자신이 없어져 맥이 풀린 데다, 잡지사 측에서 소송취하를 요구했고 당에서도 대변인(노무현)이 언론과 싸우면 안된다고 만류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와 조선일보 간의 끈질긴 싸움은 10년이 지난 2001년 1월, 《주간조선》측이 당시 그 기사에 일부 과장이 있었지만 상당부분은 진실이라는 새로운 기사를 냄으로써 갈등이 재연되었다. 《주간조선》은 10년 전 요트 기사를 썼던 기자의 말을 빌어 잡지사측이 1심에 패한 후 항소를 했으나 노 후보 측에서 화해하자는 연락이 와서 화해를 하게 되었다는 기사를 실었다. 그러나 나중에 화해를 제안한 측이 노 후보가 아니라 주간조선 측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지게 되어 조선일보와 주간조선은 정정보도를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결국 노대통령은 신문사를 상대로 한 다툼에서 두 번이나 이긴 것이다.
2001년 5월22일 민주당 고문이던 그는 대우자동차 부평공장을 찾아가 정부와 노동자 사이에서 중재활동을 하다가 노조원들로부터 달걀세례를 받았다. 그런데 3대신문 중 2개지는 그가 한 일을 전혀 보도하지 않았다. 이튿날 그는 "수구언론을 그냥 두고서는 한국사회를 개혁할 수 없다"면서 "정치인도 시민단체, 대안언론 등과 손을 잡고 나서서 잘못된 언론을 고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조선일보》는 2002년 신년호에 실린 16대 대통령선거 가상대결 여론조사보도에서 한나라당의 이회창 총재가 대통령 후보에 지명될 것을 예상, 그 상대자로 민주당의 여러 주자를 차례로 대비시켰다. 그러나 이 신문은 이 때 민주당의 유력한 대선 후보의 한 사람이었던 노무현 당시 해양수산부 장관은 제외시켰다. 그에 의하면, 이러한 《조선일보》의 보도 태도는 다른 신문들이 여론 조사를 통해 “노장관이 이 총재와 맞붙으면 막상막하의 결과가 나온다”고 보도한 것과 큰 차이를 보였다는 것이다.
노대통령과 주요 신문간의 갈등은 2002년 2월6일 민주당의 인천지역 경선 합동연설에서 그가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는 민주당 경선에서 손을 떼라”고 주장해 재연되었다. 그는 “동아일보가 내게 ‘언론사 소유 지분 제한 소신을 포기하라’고 강요했지만, 나는 결코 굽히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그의 발언에 대한 신문사측의 부인과 반박으로 이 싸움은 한바탕의 장군 멍군으로 끝나고 말았다. 그러나 이 사건은 그와 보수언론간의 갈등을 더욱 심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노대통령과 주요 신문간의 대립은 선거 막판까지 그치지 않았다. 2002년 12월 투표 바로 전날 밤 그의 제휴자인 정몽준 국민통합21 대표가 돌연 지지철회를 선언했을 때 주요 신문들은 이를 대서특필했다. 그러나 그는 대선에서 승리했다. 그의 당선은 언론에 대한 자신감을 결정적으로 키웠다. 이 같은 강력한 자신감이 노대통령 취임 후의 언론에 대한 강공으로 나타난 중요 원인이 된 것이다.
취임 전 노 대통령의 언론정책 구상
언론에 대한 노 대통령의 평가는 한마디로 황당하다. 언론에 관한 그의 어록(語錄)은 대통령의 말씀이라고는 도저히 믿기 힘든 독설과 비속어로 가득 찼다. 후보 시절부터 ‘언론과의 전쟁’ 또는 ‘조폭언론’ 발언으로 논란을 빚은 그는 대신문들을 서슴없이 ‘족벌언론’ 또는 ‘수구언론’이라고 매도했다. 그는 "족벌언론은 수구적 이익과 자기 회사 이익에 맞지 않으면 공격을 하며, 자신들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왜곡된 공격을 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수구언론은) 과거 부당한 정권과 결탁해 특권을 누린 언론권력을 말한다. 이중 몇몇 언론은 세상이 바뀌었는데도 특권을 유지하며 권력을 좌지우지하려 들고 있다"고 규정했다.
그는 대통령에 취임한 후에도 이런 표현을 거침없이 사용했다. 노 대통령은 2003년 4월2일 국회 본회의에서의 첫 국정연설에서 “몇몇 족벌언론은 김대중 전 대통령과 국민의 정부를 끊임없이 박해했다. 나 또한 부당한 공격을 끊임없이 받아 왔고, 그 피해는 이루 다 말할 수 없다. 많은 사람들이 (나에게) 성공한 대통령이 되라고 당부한다. 그러나 나는 이런 언론 환경 하에서 과연 그것이 가능할까 회의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그 해 8월2일의 제2차 국정토론회에서는 “(언론은) 공정한 의제 (설정), 정확한 정보, 냉정한 논리를 통한 ‘공론의 장’으로서의 기능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고 언론에 대한 철저한 불신을 그대로 표출했다. 이 말은 참여정부의 언론정책 기본방향을 예고한 것이었다.
노 대통령의 언론정책은 주요 신문과의 대결을 특징으로 한다. 그는 후보 시절인 2002년 6월 “수구언론과 온 몸으로 싸울 것”이라고 말하면서 ”정치인의 정도(正道)는 언론의 힘이 막강하다 하더라도 굽실거려서는 안 되는 것이다. 부당한 것은 부당하다고 항의할 줄 알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노 대통령은 공식석상에서 언론인들의 인격과 명예를 훼손하는 인신공격적인 발언도 서슴지 않았다. 그는 그해 8월 2일에는 장·차관급과 대통령비서실 고위간부들이 참석한 제2차 국정토론회에서 “언론계 출신 가운데는 질이 안 좋은 사람도 많다”고 말해 주변을 놀라게 했다. 그 자리에 있던 공동취재단의 어느 기자가 “심한 모멸감과 수치심을 느껴 자리를 박차고 나가려했다”고 나중에 심경을 털어놓은 것을 보면 그의 이날 태도가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만하다. 한국신문협회는 사흘 후인 8월7일 “노대통령의 이러한 언급은 언론인에 대한 모욕이다”라는 공식 성명으로 대응했다.
노 대통령은 이어 9월 25일 민주평화통일해외자문회의 위원초청간담회에서는 “기자도 언론윤리강령을 만들어야 한다. 밥 얻어먹고 기사 써서는 안된다”고 말하는 등 다시 언론인들을 공개적으로 폄하하는 발언을 했다. 노 대통령이 한국언론을 가리켜 ‘불량상품’이라고 규정한 2007년 1월 4일 발언은 그의 언론관련 발언 중에도 압권에 속한다고 할 것이다. 그는 이날 정부과천청사에서 열린 국장급 이상 공무원들과의 오찬석상에서 “우리 사회에서 가장 부실한 상품이 돌아다니는 영역이 어디냐?”는 질문을 스스로 던진 다음 “내 생각에는 미디어세계인 것 같다”고 서두를 꺼내고는 “불량상품은 가차 없이 고발해야 하고, 타협하지 말아야 한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제일 나쁜 것이 유착이다. 절대 유착하지 말라. 이것은 나의 간곡한 부탁이다”라고 거의 호소조로 당부했다. 이것은 언론을 통제하려다 실패한데서 나온 그의 좌절감과 언론에 대한 편집증적 증오감을 나타낸 것이다.
보수신문 영향력 감소를 노린 언론정책 목표
노대통령은 후보 시절 정부 주도로 과감한 언론개혁을 단행할 뜻을 내비친 적이 있었다. 그가 당초 생각한 언론개혁의 핵심은 ‘족벌언론’, 즉 ‘조중동’이라고 불린 보수계신문의 소유구조를 고쳐 일가족 소유를 금하고 복수의 주주가 소유하도록 함으로써 오너의 언론사 지배력을 약화시키자는 것이다. 그는 김대중 정부 당시인 2001년 언론사에 대한 세무조사 때 "언론이 단순한 사유재산이 아니고 국가의 공공적 재산이라면 (언론사) 소유지분을 제한하는 제도개혁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기자들에게 언론자유를 돌려주기 위해서는 인사권 독립까지 가야하며, 그래야 기자들이 자유롭게 취재하고 보도하는 언론자유가 꽃필 수 있다"고 밝힌 바 있다(2001년 7월12일 MBC 라디오 인터뷰).
그는 또 “말이 좋아 권고이지, (언론은) 개혁해야 한다. 내가 (대통령이 되면) 하려고 한다”고 밝힌 적도 있다(2001년 10월8일 모 의원 후원회에서 행한 발언). 2002년 11월 그는 언론의 독과점 문제에 대해 “유럽 국가처럼 우리나라도 특정 언론사의 시장 점유율이 일정 수준을 넘지 못하도록 제한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언론자본으로부터, 광고주로부터의 기자의 자유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며 “일반 기업도 ‘소유와 경영’의 분리를 강조하는데 언론은 사회적 공기인 만큼 적어도 취재와 편집권은 기자들에게 주는 것이 맞다”고 강조했다(2003년 4월 7일 제47회 신문의 날 기념식).
참여정부는 인사권 행사를 통해 장악이 가능한 방송사와 재정상태가 취약해 정부와 맞서기 어려운 일부 마이너신문과 인터넷매체를 정권의 우군으로 삼았다. 이들을 지원하여 보수적인 대신문을 견제하자는 이이제이(以夷制夷)전략이 참여정부 언론정책의 핵심이 된 것은 이 때문이다. 노 대통령은 대선 직후 맨 먼저 그에게 우호적이었던 한겨레신문사를 찾아가 ‘협조에 감사한다’고 말한 다음 나중에 단독 회견도 가졌다. 그리고 마치 보상이라도 하듯 한겨fp 논설주간을 KBS사장에 임명했다. 그는 인터넷신문인 《오마이뉴스》와도 단독회견을 해 다른 언론사를 간접적으로 압박했다. 노대통령은 이 무렵 청와대 출입 기자들에게 “방송이라도 공정하게 해줬으면 좋겠다. 그렇게 해서 (3대 신문의) 왜곡·편파 보도를 좀 상쇄해주는 그런 기능을 해줬으면 좋겠다는 게 개인적 소망이다"라고 털어놓았다(2003년 4월 2일). 이는 그가 방송이 신문을 견제하는 역할을 해줄 것을 기대하고 있음을 솔직히 피력한 것이다.
KBS를 비롯한 방송들이 참여정부 출범 초부터 보수신문을 의도적으로 공격하기 시작한 배경은 여기에 있다. 의도가 그렇다 보니, 이들 방송의 보수신문 때리기가 방송과 신문간의 건전한 상호비판의 범위를 넘어서는 것은 불가피하다. 방송의 신문비판의 주된 대상과 이슈들이 보수신문들을 겨냥하고 있음은 한 눈에 알 수 있었다. 이러한 정략적인 신문공격은 신문의 신뢰성 뿐 아니라 방송의 신뢰성도 함께 떨어뜨리는 결과를 초래했다. 흥미로운 사실은 앞에서 살핀 2003년 3월 문광부의 홍보업무운영방안이 말썽을 일으켰을 때, 평소 노대통령에게 우호적인 매체들도 일제히 이를 비판하고 나선 점이다. 어느 인터넷신문은 솔직하게도(?) “왜 우군들마저 등을 돌리게 만드나. 지금이 언론과 맞서 힘 소진할 때인가”라고 비판하고 나섰다. 청와대의 ‘국정브리핑’ 발행결정에 대해서도 평소 친정부적 입장을 보이던 신문마저 사설에서 ‘이를 중단하라’고 주장했다.
2004년 봄 KBS를 비롯한 일부 전파매체의 노 대통령 탄핵소추 보도는 한국언론사에 길이 남을 치욕적인 편파보도였다. KBS는 한나라당 주도로 3월 12일 국회에서 통과된 노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 결의안이 마치 ‘불법 결의’라도 되는 양 연일 특별프로를 마련해 야당을 매도하고 어떤 날에는 거의 하루 종일 일방적 방송을 함으로써 완전히 방송의 중립성을 훼손했다. 한국언론학회는 이를 “극단적인 편향성을 드러낸 파괴적 편향”의 범주로 분류했다. 노 대통령은 KBS의 이 같은 편파보도행태에 국민원성이 집중되었음에도 불구하고 2006년 11월 정연주 사장의 임기를 연장시켰다.
노대통령의 보수언론 목조르기정책은 일부 친여시민단체와 언론노조, 그리고 일부 진보적 학자들의 지원을 받았다. 이들의 가장 중요한 목표는 참여정부 내의 좌파세력과 국가관, 역사관, 언론관이 다른 보수계신문의 영향력 축소에 있었다. 이들은 우선 《조선일보》를 제1차 공격목표로 삼고 타도운동을 벌였다. 노무현정부 임기 초반부터 시작된 ‘안티조선 운동’은 역대 정권에서 볼 수 없었던 친여조직에 의한 집요한 비판언론 죽이기운동이었다. 과거에도 특정 기사를 둘러싸고 정치단체나 사회단체가 언론사를 상대로 갈등을 벌인 일은 있어도 특정언론의 존재 자체를 위협한 사례는 없었다.
2002년 5월 노사모(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는 “1차로 올 연말까지 조선일보 50만부 절독운동을 벌이겠다"며 조선일보 절독(切讀)운동의 목표를 내걸었다. 언론개혁시민연대의 집행위원장인 김모 한일장신대 교수는 2002년 12월 노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된 다음 《한겨레》에 기고한 칼럼에서 “신문의 인적 청산이 문제가 아니라, 신문 자체의 교체가 필요하다. 일제시대에는 조국과 민족을 배신하고, 군사독재 시절에는 정권의 나팔수 노릇을 하면서 국민의 눈과 귀를 막았으며, 민주화 이후에는 스스로 권력이 되어 ‘대통령 만들기’를 비롯하여 온갖 만행을 저질러왔다. 현재의 (3개지 전체 점유율) 75%를 35%로 낮추어 그 빈자리는 한겨레나 한국, 경향, 대한매일 등 비교적 공정보도의 원칙을 지키는 젊은 신문들로 채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노 정권의 제도적 언론 재갈 물리기 방안
지난 2001년 각 언론사에 대한 대대적인 세무조사와 천문학적인 추징금 부과, 그리고 대신문사 사주들의 구속이 김대중 정부의 보복적 비판언론 목조르기였다면, 그 후계 정부인 노무현 정부의 언론정책은 언론에 행정적ㆍ법적ㆍ제도적인 재갈 물리기에 초점이 있었다. 그 내용은 취재제한 조치, 대량의 정정보도 청구 및 언론중재신청, 징벌적인 액수의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민사소송제기로 언론을 위축시키는 것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언론관계법 개정을 통해 ‘새로운 언론질서’를 만들려는 것이었다. 이런 방식에도 불구하고 비판언론들이 끝내 굴복하지 않자 노무현 정부는 이들 신문에 정부관리가 기고하거나 회견에 응하지 못하게 하고, 심지어는 이들 신문사가 주최하는 행사에도 참석치 못하게 하고, 또한 정부부서와 비판적 신문사와의 행사 공동주최를 취소시키고 이에 위반될 때는 문책을 하는 졸렬하기 짝이 없는 보복책까지 서슴지 않았다. 그리고 이들 신문에 대해서는 공기업의 광고도 제한했다.
노 대통령의 언론 상대 소송제기는 큰 화제 거리였다. 노 대통령은 2003년 8월 13일 자신과 그의 가족의 재산과 관련된 의혹을 제기한 한나라당 김문수 의원에 대해 10억 원, 이를 보도한 《동아일보》 《조선일보》 《중앙일보》 《한국일보》에 대해 각각 5억 원씩 20억원, 모두 합쳐 30억원의 손해배상청구소송을 서울민사법원에 제기했다. 현직 대통령이 언론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한 것도 전례 없는 일이려니와 언론중재위원회도 거치지 않고 거액의 징벌적 배상금을 청구하는 소송을 바로 법원에 제기한 점에서 야당과 언론에 대한 위협이라는 비난이 쏟아졌다.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는 즉각 성명을 내고 노 대통령의 소송제기가 언론에 대한 재갈 물리기이며 다른 정부기관에 대해서도 같은 방법으로 대응하라는 의도적인 압력이라고 성토했다. IPI(국제언론인협회)도 같은 취지의 성명을 내고 이 같은 점들을 들어 한국을 언론자유침해 감시대상국 명단에 계속 남겨두기로 결정했다고 발표했다. 노 대통령은 자신의 소송제기에 대해 비난여론이 쏟아지자 법원에서의 소송 진행을 그의 퇴임 후로 미루도록 일보 후퇴했지만 이 사건은 노정권의 대표적 언론위협사건으로 남게 되었다.
문광부는 노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언론보도기사를 긍정보도-사실보도-건전한 비판-악의적 비판-오보의 5단계로 구분해 청와대에 보고하고 단계별로 대응책을 마련하기로 했다, 언론계의 반발이 일자 문광부는 이를 수정, 5단계 분류를 사실보도-비판보도-오보의 3단계로 나누어 청와대에 보고토록 했다. 이에 따라 ‘오보’ 등 문제가 있는 경우 지체 없이 중재신청을 내도록 했다. 중재신청 건수는 2004년의 경우 언론중재위원회가 설치된 이래 가장 많은 759건에 달했다. 그 중 국가기관과 공공단체가 제기한 건수는 33.4%인 254건에 달했다. 청와대 홍보수석실은 2003년 9월 21일 동아일보 측의 취재요청에 응하지 않겠다고 발표했다. 그 이유는 동아일보가 19-20 양일 자 신문에서 대통령부인 권양숙 여사의 아파트 미등기 전매 의혹과 관련, 청와대의 해명을 기사에 공정하게 반영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러 조치가 있자 각계로부터 국민의 알 권리에 대한 중대한 침해라는 비난이 청와대로 쏠렸다.
언론발전 저해하는 시장질서 왜곡
노무현 정부 언론정책의 특징 중 하나는 자신의 코드에 맞는 신문을 지원함으로써 비판언론을 견제하고 궁극적으로 언론의 시장판도를 바꾸겠다는 이이제이전술이다. 노 정부는 이를 위해 예산을 투입하는데도 서슴지 않았다.
노무현 정부는 신문발전위원회와 신문유통원을 설립해서 중앙지를 지원하고 지역신문발전위원회를 만들어 지방지에 별도의 재정지원책을 실시했다. 정부는 신문발전위원회의 운영을 위해 2006년부터 신문발전기금을 조성, 그해에 251억8000만 원, 2007년 263억8700만 원을 책정했다. 실제 집행액수를 보면, 2006년 7월 한겨레 등 12개 언론사에 157억원, 2007년 1월 오마이뉴스 등 43개 사에 114억원을 각각 지원했다. 지원명목은 2006년의 경우 독자권익위원회 지원(2억원), 고충처리인 지원(1억원), 경영컨설팅 지원(4억원), 구조개선 및 신규사업 지원(75억원), 시설도입 및 정보화사업 지원(75억원), 구조개선 및 신규사업 지원(75억원) 등이다.
신문유통원의 경우는 처음부터 말썽이 많았지만 운영도 파행적이었다. 신문유통원은 당초 마이너 신문사들이 공동출자해서 신문공동배달조직을 만들면 정부가 이를 매칭펀드 형태의 지원을 해 주기로 하고 설립키로 한 것이다. 그러나 막상 어느 신문사도 돈을 내려 하지 않자 참여정부는 신문유통원을 국가예산만으로 설립하고 2006년에 100억원을, 2007년에는 350억원을 투입, 연말까지 296개의 신문공동배달센터를 설립키로 했다. 그러나 예산당국과의 이견으로 예산 조달이 안 되자 신문유통원은 사채 2억원을 빌려다 운영비로 쓰는 웃지 못 할 난센스까지 저질렀다. 신문유통원은 2006년의 겨우 100억원을 투입했지만 신문의 공동배달로 들어온 수입이라고는 겨우 1억3천만 원이었다는 보도가 나왔다.
신문유통원은 당초 산간벽지의 국민들에게 폭넓은 언론매체 선택권을 보장하기 위해 공동배달체제를 갖추겠다고 했다. 그러나 신문유통원이 2006년에 개소한 배달센터 51곳 중 강릉, 평창, 인제 등 강원지역 3곳을 제외한 나머지 48곳은 모두 수도권이었다. 수도권에는 이미 각사가 경쟁적으로 배달망을 갖추고 있다. 다시 말하면 이 지역의 독자들은 자기가 보고 싶은 신문을 볼 수 있는 곳이다. 신문유통원의 이 같은 방향전환은 국민의 세금으로 마이너신문의 신문배달을 도와주는 것에 불과하며 언론유통시장에 정부가 끼어들어 자유경쟁제도를 망가뜨리는 것이 된다.
노무현식 언론정책이 주는 교훈
언론의 자유는 근대 헌법이 국민의 기본권으로 인정한 표현의 자유의 한 형태이다. 표현의 자유가 어떤 기능을 하고 있는지 가장 명쾌하게 정의한 사람이 미국 헌법학자 에머슨(Thomas I. Emerson)이다. 그는 표현의 자유가 수행하는 기능으로서 (가) 개인 인격의 자유로운 형성과 전개 (나) 입헌민주주의의 유지 형성 (다) 진리에의 도달 (라) 사회적 안정과 변화간의 균형을 들었다.
언론의 자유는 종래에는 국가에 대한 소극적 방어적 권리였지만, 차츰 참정권과 함께 국가 질서 형성의 적극적 권리로 그 성격이 바뀐 데 기인한다. 언론이 제4부(the Fourth Estate)라는 말은 이 때문에 새로운 현대적인 의미를 갖게 되었다. 현대민주주의는 여론정치이므로 언론은 현대 국가를 떠받히는 시스템이다. 따라서 언론의 정부비판과 권력감시 기능을 깡그리 무시하는 노 대통령의 언론관은 민주적 지도자로서는 결격사유가 아닐 수 없다.
노 정부의 언론정책 중 특징의 하나는 그 발상이 좌파성향이라는 점이다. 국가가 개별언론사를 지원하고 언론시장에 개입하고 배달회사까지 만들어 준다는 것은 좌파적 발상이 아니고는 설명될 수 없는 것이다. 프랑스 등 일부 유럽국가가 신문사에 직접 보조금을 주고 있으나 배달회사까지 만들어주지는 않는다. 같은 유럽국가라도 영국과 독일 같은 나라에서는 아예 직접보조금 제도가 없으며, 미국과 일본에서는 물론 없다.
노무현 정부의 언론정책은 한국언론에 귀중한 교훈을 제공했다. 과거 군사정부의 무지막지한 언론탄압을 경험한 한국언론은 민간정부 역시 교묘한 방식으로 언론에 재갈물리기를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참여정부의 언론정책은 반면교사로서 귀중한 역사적 교훈이 될 것이다.
남시욱 / 언론인,세종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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