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자신의 패 숨긴 채 게임 참여…정치적 간섭 높이려는 속셈
경영권에 위협되는 내용 그대로 두면서 국민연금만 적용 배제
전임 위원장이 우려한 10%룰 변경까지 담겨…책임소재 불분명
국민연금만 ‘5%룰’에서 예외로 두는 자본시장법 시행령 개정안에 대한 비판이 거세다. 재계에선 금융수장 교체기를 노린 날치기가 아니냐는 지적도 나온다.
15일 재계에 따르면 금융위원회가 국민연금에 대한 ‘5%룰’ 예외 적용을 골자로 하는 자본시장법 시행령 개정안을 입법예고하면서 그간 공적연금의 투자 전략을 미리 알 수 있게 해줬던 ‘약식 보고 특례’가 사라진다.
‘5%룰’이란 자본시장법상 상장기업의 의결권 있는 주식을 5% 이상 보유하게 되거나 1% 이상 지분 변동이 있는 경우 보유 상황과 목적을 5일 이내 공시하는 제도다. 하지만 내년 1분기부터 국민연금은 예외다.
국민연금은 운용액 637조원 가운데 약 17%에 해당하는 109조원가량을 국내 주식시장에 투자하고 있다. 이는 국내 증시 전체 시가총액의 약 6.5%에 비율로 사실상 국내 기업의 최대 주주다.
좋게 말하면 기업 경영에 쉽게 개입할 수 있게 된다는 뜻이지만, 달리 말하면 정부 기관이 ‘블라인드 속에서 자신의 패를 숨긴 게임’을 펼치면서 기업 경영을 위협할 수도 있는 것이어서 재계의 우려가 크다.
금융당국은 앞서 스튜어드십코드(자율적 의결권 행사 지침)에 대한 걸림돌 제거가 개정 목적이라고 밝혔다. 국민연금은 지난해부터 ‘대주주의 전횡을 방지한다는 명분’으로 스튜어드십코드를 도입해 적극적인 의결권 행사에 나서고 있다.
하지만 문제는 이번 개정안이 적극적인 의결권 행사를 돕는다는 입법 취지와 거리가 멀다는 점이다. 또 투명해야할 연금 운용에서 ‘비밀주의’를 부추긴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크다.
전문투자자들의 투기행위가 성행하는 현 시점에서 적용되는 5% 요건으로는 대주주의 경영권 안정을 보장하기 어렵다. 이 때문에 선진국에는 보고 요건을 3% 이하로 강화한 입법례가 많다. 요컨데 금융당국이 5%룰을 그대로 두면서도 국민연금에만 특례를 허용하는 길을 선택했다는 얘기다.
은성수 금융위원장은 지난 인사청문회에서 "연기금의 투자 목적은 국민 재산 증식이고 경영 참여가 아니기 때문에 5%룰을 완화해 부담을 줄여줄 필요성이 있다"면서 찬성 입장을 표시한 바 있다.
최승노 자유기업원 원장은 “연기금에 예외규정을 확대하려는 것은 원칙적으로 잘못된 발상으로 기업에 대한 정치적 간섭을 높이는 부작용을 부를 것”이라며 “지난 3월 대한항공 주주총회에서 국민연금이 여론에 편승한 선택을 하면서 오너 경영권을 위협한 사례가 재현될 위험성이 크다”고 말했다.
김영훈 바른사회시민회의 경제실장은 “전일 한국생산성본부가 발표한 다우존스 지속경영가능지수를 봐도 국내 기업의 지배구조 부분 경쟁력이 크게 떨어지는 것으로 나타났다”며 “외부로부터의 경영간섭 강화를 지배구조 개선으로 보는 잘못된 인식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또 이번 개정안이 금융리더십 공백기 확정된 것이어서 책임소재를 따지기 어려울 것이라는 지적도 일고 있다. 보건복지부가 국민연금을 ‘5%룰’ 예외 적용을 금융위에 요청한 것은 지난해 8월이다.
최종구 전 금융위원장은 당시 “기관투자자의 영향력이 과도해 지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를 잘 알고 있다”며 “문제가 최소화될 수 있도록 의결권 외부위탁 등 장치를 두는 방안을 협의중”이라고 밝혔지만 금융위는 이번에 전임 위원장이 우려한 10%룰 변경안까지 담았다.
지금까지 10% 이상을 소유한 주주가 6개월 이내에 취득주식을 매각해 이익을 실현하는 경우 그 차익을 회사에 반환토록 규정하고 있다. 이른바 먹튀를 방지하기 위한 것이다. 하지만 지분 10% 이상을 소유한 공적 연기금은 차익반환의무를 면제받는다.
전삼현 숭실대 법학과 교수는 “정부가 자본시장에서 경영권 위협이 커지도록 방향으로 시행령을 개정하고 있는데 경영권 안전장치가 있어야 직접투자가 늘고 일자리도 증가한다”며 “경영권 위협 요소가 많을수록 직접투자보다 투기자본만 성행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상헌 기자 liberty@enews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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