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는 실패한 신인가/한스헤르만 호페 지음/박효종 옮김/나남출판
낡디낡은 트렁크 하나 애면글면 버리지 못하는 이유는 뭘까. 무엇이든 담을 수 있고 어디든 갖고 갈 수 있어서? 아니면 그저 편하고 익숙해서? ‘민주주의’란 게 꼭 이 트렁크를 닮아 누구에게나 만만하고 임의롭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지나쳐 버릴 때마다 모두의 허전함은 내심 컸다. 그게 뭔지를 둘러싼 갈증과 텍스트의 빈곤을 아우성치는 이들의 목청 또한 높았다. 들을수록 애매하고 반복할수록 어슴푸레해 가기만 했던 저 ‘모순’이니 ‘위기’니 하는 추상명사마저 수없이 써 가며. 하물며 교과서가 손1에 닿아도 강의는 버거웠다. 지천으로 깔린 책들만으로도 압살당할 만큼 민주주의는 풍요로웠건만 우리의 뇌리는 정말 왜 그다지도 가난했던 것일까.
그 흔한 눅들 만한 그림 하나 없이 호페는 이 책에서 그간의 지적 빈곤과 허전함 곳곳에 지혜의 ‘푸른 칼’을 꽂는다. 정신 차려 깨어나고 되돌아 반성하라고 조용히 외치며 민주주의는 이제 정말 왜 가망 없는지, 그래도 기대고 비비며 안겨야 할 사상인지 묻고 답한다.
아울러 1차대전 이후 미국의 승리와 민주주의의 승리가 이제 추레하게 사그라지는 역사의 원인을 짚되, 미국의 전쟁 불개입이 현실로 나타났더라면 절충된 평화와 유럽의 전통적 군주제는 유지되었을 것이라고 애석해하기도 한다. “러시아와 독일, 오스트리아의 황제가 제자리에 있었다면, 러시아에서 볼셰비키가 권력을 잡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서유럽에서 증대되던 공산주의의 위협에 대한 반응으로 이탈리아와 독일에서 파시스트와 나치스가 똑같이 권력을 장악하는 사태는 불가능했을 것이다.”(21쪽)
이 같은 도발적 회한이나 근본적 역사전복의 상상이 현실의 아픔을 치유하는 직효약은 물론 못 된다. 아무리 빨리 해본들 늦는 게 ‘후회’ 아니던가. 그 속에서 역사의 수레를 되돌리지 못하는 것 또한 슬픈 일임을 굳이 말로 표현할 필요 있을까.
그런데 이 책은 더 나아가서 20세기 미국의 자유주의와 신보수주의도 개인의 자유를 제한한다는 측면에서 ‘사회민주주의’에 속한다는 극단적 주장을 개진한다. 하지만 군주제 정부에 관한 수정적 견해(사적으로 소유된 정부)와 민주주의 정부의 새로운 해석(공적으로 소유된 정부)을 새삼 가르며 그 중간지대에서 ‘소수의 사회혁명’을 모종의 대안으로 구하는 방식은 일찍이 토크빌이나 사르토리도 궁리하지 못했고, 헬드나 맥퍼슨도 토해내지 못한 생각이었다.
이 책이 제시하는 사회 혁명이란 ‘자유지상주의’에 입각한 것으로, “마침내 국가의 관할 영역이 사라질 때까지 독립적이고 자유로운 지역들(싱가포르와 같은 독립적 자유도시들)이 무제한적으로 출현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의 구상이 더욱 천연덕스럽고 얄밉도록 매력적인 이유도 사실은 아나키도 국가도 아닌, 사적으로 소유된 정부에 의해 자유롭게 자금을 조달하며 법과 질서를 경쟁적으로 제공하는 보험회사가 앞날의 체제로 소개되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공공재산을 사유재산으로 돌리고 모든 징세권과 입법권을 불법적인 것으로 선언하여 새로운 헌법을 채택하고, 최종적으로 보험회사들로 하여금 그들이 하게 되어 있는 (보호와 보상)업무를 수행하도록 허용하라”는 것이다. 죽은 루소를 흔들어 깨워 로버트 노직 곁에 앉히고 이어 조지 오웰까지 자리 권하며 호페의 얘길 듣게 할라치면 그들은 끝에 가 뭐라 말할까.
그래도 금세 이해 못할 몇 구절은 진한 안타까움으로 남는다. 가령 “자연적으로 주어진 자원의 질에 차이가 나는 이상 입식윤리를 통해 창출된 결과는 평등하기보다 불평등하리라는 점을 예상할 수 있다”(222~223쪽)라든지, “고임금 지역 국가가 실시하는 이민정책의 주요 원리는, 무역의 경우에 ‘자유’무역이라는 것이 갖는 의미와 똑같은 의미를 지니기 위해서 이민과 입국의 경우에는 초청 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함의하고 있다는 통찰에서 비롯된 것이다”(272쪽)의 경우처럼 자꾸 현미경을 들이대며 읽고 싶어지는 진짜 이유는 이미 역자가 펴낸 저서 ‘합리적 선택과 공공재’ 1·2(인간사랑)나 ‘국가와 권위’(박영사)에서 맛보았던 감동을 계속 이어가고 싶어서다. 그나저나 제아무리 민주주의가 ‘실패한 신’이라 해도 아직은 여러 사람을 품을 만큼 그 가슴이 넉넉하지 않을까.
(박종성·서원대 정치행정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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