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도] 청년, 이승만과 함께 자유주의의 날개를 달다 <자유경제원 토론 전문>

자유경제원 / 2015-03-31 / 조회: 2,641       뉴데일리

 

<자유경제원 토론회 / 이승만 탄신140주년>


청년, 이승만과 함께 자유주의의 날개를 달다

2015년 3월 26일은 이승만 대통령의 탄신 140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우남 이승만은 만 29세의 나이였던 1904년 한성감옥에서
불후의 명저 『독립정신』을 집필합니
다. 이 책은 한국인 최초의 외교사 저술서입니다.
그는 이 책에서 대한제국의 국운
을 걱정하며 자유와 책임, 통상, 근대화의 중요성과 함께
마음속에 독립정신을 굳게 
가지고 국민이 깨어 있어야 한다고 외칩니다.

그는 근대정신과 국제질서를 이해한 
선각자이자 목숨을 걸고 민권개혁과 국민의 계몽을
이루고자 노력했던 독립협회의 
청년지도자였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의 정치경제사상과 그가 펼친 정책들에 대해 한
국의 청년들은
아직 잘 인식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청년들이 배우고 아는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지식과 정보는
오랜 기간 많이 왜곡되고 폄하되어 왔기 때문입니다.
이에 자유경제원에서는 이승만 대통령과 그의 생애 그리고 시장경제에 대한 사상과 정책에 대해 청년들이 함께 논의해보는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건국 대통령 이승만 탄신 140주년 기념 청년토론회
일시 ▍ 2015년 3월 26일 목요일 오후 4시
장소 ▍ 자유경제원 5층 회의실
주최 ▍ 자유경제원
문의 ▍ 자유경제원 정재청 연구원(02-3774-5024)
■ 사회
전희경 (자유경제원 사무총장)
발제: 김규태 (경제진화연구회 청년위원)
토론: 배예랑 (대한민국 건국회 청년단 회원)
토론: 이건희 (인천대학교 무역학부)
토론: 전계운 (충북대학교 정치외교학과)
토론: 정재청 (자유경제원 연구원)

<발제문>

김규태씨.
▲ 김규태씨.

김규태 (경제진화연구회 청년위원)

1. 우남 이승만에 대해 우리는 얼마나 알고 있을까

373만, 103만, 68만, 160만, 164만.
이 숫자는 특정 키워드로 구글검색을 돌린 검색결과다.
20세기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인물이라 할 수 있는 박정희, 이승만, 김구, 김일성, 김정일 등
각 단어로 구글검색한 결과다.
1948년 대한민국 건국 이후 67년간 국부 이승만이 한반도에 끼친 영향력은 누구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했지만, 60여 년이 지나 21세기에서 '우남 이승만’의 대중적인
입지는 박정희 김정일 김일성 보다 못하다.

그렇다면 학문적으로 우남 이승만에 대한 연구는 얼마나 이루어져 있을까.
학술연구정보서비스(RISS)를 통해 제목 및 주제어로 이승만을 입력해서 찾아보니,
1220건이 나왔다. 학위논문 136건, 국내학술논문 522건, 단행본 514건, 연구보고서 48건이다. 박정희에 대한 연구 건수는 총 2047건, 김구는 743건, 김일성과 김정일은 각각 2197건, 2405건이다. 2015년 '우남 이승만’의 학문적 입지는 김정일, 김일성, 박정희의 절반에 불과하다.

현재 우남은 대중적 입지와 학문적 입지 모두 과소평가되어 있다.
우남에 대한 과소평가를 극복하고 우남의 입지를 널리 알리는 것은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의 몫이다.
21세기를 살아가는 대한민국 청년들의 분투 어린 과업은 우남 이승만에 대한 공부와 전파에
있을 것이다. 오늘을 계기로 함께 했으면 한다.
금일 청년토론회는 공교롭게도 우남 이승만이 출생한 지 정확히 140년 되는 날이다.
140년 전 1875년 3월 26일 우남은 황해도 평산에서 태어났다. 지금의 북한 해주시다.
이제부터 그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1899년 1월 공화정을 주장하다가 한성감옥에 갇힌 이승만의 사형수 이승만의 모습.
▲ 1899년 1월 공화정을 주장하다가 한성감옥에 갇힌 이승만의 사형수 이승만의 모습.

2. 자유주의자 우남 이승만

(1) 자유를 파괴할 자유는 없다
자유는 우리가 그토록 기꺼이 스스로를 희생해서 얻은 소중한 유산입니다.
우리의 자유는 전쟁과 경제적 궁핍이 있는 기간에도 손상이 되지 않은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다른 사람은 그렇지 못했지만 자유에는 자유 그 자체를 파괴할 권리
는 포함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공산주의는 자유의 반대개념이며 모든 자유와 개인 및 단체를 즉시 파괴하기 때문에
한국에는 공산주의자가 될 자유는 존재하지 않으며, 앞으로도 그럴 자유는 결코 없을 것입니다.
- 1960년 이승만 대통령 메시지 중에서 -

우남 이승만은 한국에 공산주의자가 될 자유는 존재하지 않으며, 앞으로도 그럴 자유는 결코 없을 것이라 밝혔다. 하지만 50년도 채 지나지 않아 지금의 대한민국에는 종북을 표방하는 세력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있다. 우남의 자유주의 사상과 명백히 대립하는 존재다.


지난 2014년 12월 19일, 헌법재판소는 통합진보당 해산을 통해
우남의 자유주의(방어
적 민주주의)를 몸소 실천에 옮겼다.

북한식 사회주의 체제는 조선노동당이 제시하는 정치 노선을 절대적인 선으로 받아들이고 그 정당의 특정한 계급노선과 결부된 인민민주주의 독재방식과 수령론에 기초한 1인 독재를 통치의 본질로 추구하는 점에서 우리 헌법상 민주적 기본질서와 근본적으로 충돌한다.
피청구인은 진보적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전민항쟁이나 저항권 등 폭력을 행사하여 자유민주주의체제를 전복할 수 있다고 하는데, 이는 모든 폭력적ㆍ자의적 지배를 배제하고,다수를 존중하면서도 소수를 배려하는 민주적 의사결정을 기본원리로 하는 민주적 기본질서 에 정면으로 저촉된다.
- 2014년 12월 19일 헌법재판소의 '통합진보당 해산 결정문’ 중에서 -

1923년 <공산당의 당부당> 논문을 발표한 잡지 [태평양 잡지]  이승만이 하와이에서 발간. 표지사진은 제주도 폭포.
▲ 1923년 <공산당의 당부당> 논문을 발표한 잡지 [태평양 잡지] 이승만이 하와이에서 발간. 표지사진은 제주도 폭포.


(2) 하이에크 보다 20년 앞선 우남의 선견지명

미제스가 아버지라면, 프리드리히 하이에크(Friedrich August von Hayek,1899~1992)는
자유주의의 어머니라 할 수 있다. 하이에크의 대표 저서는 『노예의 길』
이다.
『노예의 길』은 공산주의 사회주의의 몰락을 예견한 저서로 1944년 출간되었다.
하이에크는 『노예의 길』을 통해 1930~1940년대 사회주의 공산주의 방식의 경제계획이
참혹한 실패로 끝날 것임을 예견했다.

그런데 우남 이승만은 『노예의 길』 출간 21년 전인 1923년에 이미 '공산당의 당부당’
을 써서 공산주의의 부당성을 지적했다.
우남 이승만은 공산주의의 부당성으로 다섯가지를 지목했다.
첫째, 재산을 나누어 가지자?
열심히 일한 자나 일을 하지 않은 자나 공평하게 나누어 갖게되면,
모든 사람이 일을 하지 않고 거저 얻어먹으려는 자가 나라 안에 가득 차게 된다.
둘째, 자본가를 없애자?
경쟁이 없어져 상공업 발달이 어려워지고 물질적 개명이 중지된다.
셋째, 지식계급을 없애자?
인민의 보통 상식 정도를 높여서 지금의 학식으로 양반노릇 하는
사람들과 비등하게 되자 하는 것은 가하거니와, 지식계급을 없이 하자 함은 불가하다.
넷째, 종교를 혁파하자? 종교를 없애면 인류의 도덕상 폐해가 막대해 진다.
다섯째, 정부도 없고 군사도 없으며 국가사상도 다 없이 하자?
이에 대하여는 공산당 속에서도 이론이 많을 뿐 아니라, 지금 공산당을 주장하는 러시아만 보아도 정부와 인도자와 군사가 없이는 부지할 수 없는 사정을 자기들도 모두 안다.

우남은 1923년 공산주의 사회주의의 통제경제 방식이 실패로 끝나리라 예견했다.
는 하이에크 보다 20여년 앞선 선견지명이다.

(3) 재산권을 소중히 여겼던 자유주의자 우남

프레데릭 바스티아는 저서 『법』에서 “국가가 시민 각자의 생명과 자유와 재산을 지켜
주는 일에 충실하다면, 그리고 시민들도 이 자유주의 원리를 받아들인다면 인간 사회
평온과 풍요를 구가할 것”이라고 밝혔다.

우남 또한 대통령 재임 시절, 사유재산권을 존중하는 정신을 강조했다.
1952년 전시 인플레이션으로 화폐 개혁을 단행할 때였다.
화폐 개혁 원안에는 “100 대 1환으로 통화단
위를 내리면서, 통화량을 줄이기 위해 일정한도를 초과하는 금액에 대해 2~3년간 사용을 동결한다”는 조항이 있었다.

원안의 해당 조항에 대해 이승만 대통령은 “국민이 피땀 흘려 벌어서 쓰지 않고 저축해서 모은
재산을 정부라고 해서 권력을 가지고 강제로 2년 또는 3년 동안 동결시켜 
못쓰게 한다는 것은
찬성할 수 없다”는 이유로 반대했다.
이어 이승만 대통령은 “자본
주의의 가장 좋은 점은 사유재산제도를 엄격히 보호해 주는 것이다”라고 지적하면서 “정부가 국민의 재산사용을 마음대로 제한하면 누가 정부를 믿겠느냐”고
강조했다.

결국 '2~3년간 일정 금액 이상의 사용을 동결한다’는 조항은 백지화되었고, 화폐 개혁에 대한
긴급금융조치법안과 대통령긴급명령 승인만이 통과되었다.

헌법 제23조는 재산권을 보장하고 있으며, 공익을 이유로 재산권을 제한할 경우에는 이에 대한
정당한 보상을 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1940~1950년대 온 국민에게 자유주의 민
주주의 재산권 개념이 희박하던 시절,
한반도에는 '사유재산을 철저하게 보호해야 한다’
는 의지를 지닌 대통령이 있었다.

3. “우남 이승만이 경제에 무지했다”는 오해

(1) 우남 이승만이야말로 경제대통령이었다

서두에 언급했던 인물의 입지에 있어서 박정희 대통령이 우남 이승만보다 널리 알려
유일한 이유를 꼽자면, 경제발전 리더쉽에 대한 세간의 인식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는 우남 이승만이 경제에 무지했다는 오해와도 연결된다.

그렇다면 우남은 진짜로경제에 무지했을까?
아래는 1953년 12월 10일, 이승만 대통령이 덜레스 미 국무장관에게 보낸 편지 중의 한대목이다.
"브라운슨 씨는 한국 경제의 재건을 위해 5억1천5백만 달러가 배정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뉴욕, 도쿄, 서울에 수많은 직원을 고용하려면 당연히 엄청난 돈이 듭니다.
하지만 가장 긴요한 
비료, 시멘트, 발전소 등 공장은 하나도 건설되지 않았습니다.
이들 프로젝트 중 일부라도 완성
되어 한국 경제를 도왔다면 경제 상황이 이렇게 나쁘진 않을 것입니다.
일본 등지에서 비료를 
수입하기 위해 매년 2천만 달러 이상의 돈이 한국에서 나가고 있습니다. 물론 이는 일본이나 다른 비료 수출국에게 도움이 되겠지만 한국 경제를 재건하는 데 무슨 도움이 됩니까?”

“이제까지 미국이 준 기금은 의도된 목적을 위해 전혀 쓰이지 않고 낭비되었습니다.
대부분의 돈은 일본에서 수입하는 소비재 구입을 위해 지불되어 한국의 산업 재건이 아닌 일본 경제 재건을 위해 사용되었습니다. 그 결과 한국 경제에 필수적인 공장은 하나도 재건되지 않았습니다. 미국경제협력국과 운크라 인건비는 때로는 지출의 16%에 달하고 때로는 9%에 달합니다.”


미국은 한국에 투입한 원조자금으로 한국이 국내에서 필요한 소비재를 수입하도록 몰
고 갔다.
일본을 생산기지로 삼고, 한국을 수입 소비기지로 삼는다가 미국의 동북아 
경제부흥 복안이었다.

하지만 이승만 대통령은 한국의 경제적 자립을 위해서 국내에 
생산 기반을 마련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일본으로부터 비료를 수입하는 데 들어가는 달러도 아까워했다.

결국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정부 보유 달러를 들여 철강 공장을짓고,
이어 비료공장 유리공장 시멘트 공장을 건설했다.
이어 이승만 대통령은 연료문제를 개선하기 위해 석탄을 채굴했고, 채굴한 석탄 수송을 위해
강원도를 잇는 함
백선, 영월선 열차를 개통했다.

원자력 개발을 시작한 것도 이승만 시절의 얘기다.

원자력 연구소 기공식에서 첫 삽을 뜨는 이승만 대통령.
▲ 원자력 연구소 기공식에서 첫 삽을 뜨는 이승만 대통령.


우리나라는 당시 얼마나 못 살았을까.
1941년은 일제 강점기 중 가장 경제가 좋았던 시기라고 한다.
그런데 1인당 국민소득 기준으로 따져서 1941년의 수준으로 회복된 
것은 26년이 지난 1968년이었다. 1인당 국민소득 35달러. 1940년대 후반의 남한은 지구상 최빈국 중의 하나였다.
우남 이승만은 최빈국 나라를 이끌던 지도자였다.

이승만 시대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거나 못했던 시대가 아니었다.
오히려 당시의 시대상황을 뛰어넘는 비전을 지니고, 감당하기 버거웠던 부국강병의 기초를
놓았다. 이 토
대를 발판으로 박정희 정부는 가열 차게 경제개발계획을 추진할 수 있었다.

(2) 무역대국을 꿈꾸었던 우남 이승만

1957년 9월 21일, 이승만 대통령의 어록이다.

“현재 국산품을 해외에 수출하기 시작했으며, 우리나라의 번영은 이러한 수출품을
증대시키기 위해 힘을 합쳐 노력함으로써 달성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전 국토를 폐허로 만든 3년간의 동족상잔 6.25 전쟁이 끝난 지 4년 만에, 우리나라는
다시금 수출을 시작했다. 자원빈국이며 변변한 산업시설이 없던 시절의 얘기다.

아래는 1958년 5월 31일, 이승만 대통령의 담화 중 일부다.

“상공업을 발전시켜서 우리 물산을 가지고 살며 또 그것을 외국에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이 다 잘 살도록 만들어야 될 것이니, 그러한 결심을 가지고 하면
영광스러운 역사
를 만들게 될 것이다.”

우남을 모르는 사람들이 우남을 언급하며 항상 꺼내는 말이 있다.
외교는 잘했지만 경제는 무능했다는 비판 말이다.
하지만 세간의 오해와 달리 우남은 상업과 공업의 
중요성을 익히 알고 있었으며,
수출을 독려하면서 무역입국의 중요성 또한 강조했다.
우리 한국은 특히 인구 증가율이 높기 때문에(연평균 증가율이 1.5%~2%)
우리 국민소득
은 틀림없이 이에 비례하여 증가할 것입니다.
그러나 토지의 비율이 불변인 상황에서는 노동요소를 더 높인다 해도 총생산에는 그리 큰
도움이 되지는 않을 것이며, 설사 우리가 기계화된 농기구, 비료 및 농업용 살충제 또는 배수로, 관개수로, 농업용 도로 및 기타 사회간접자본시설 등의 고정자본시설을 통한 혁명적인 기술변화 등과 같은 광범위한 <직접자본투입방식>을 채용한다 해도 부족한 토지에 풍부한 노동력의 완전한 대체는 불가능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산업화에 비중을 두어야 하는데, 이는 자본기금이 엄청나게 필요한 부분입니다. 만약 적절한 속도로 산업화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빠르게 증가하고 있는 한국의 인구는 장래에 어려운 문제가 될 것입니다.
한국의 개발계획에 있어서 가장 큰 장애물은 바로 자본의 부족입니다.
- 아이젠하워 정부 시절, '이승만 대통령이 한미관계 등에 관하여 남긴 영어 연설’ 중 -

영어 연설의 요지는, “미국의 원조기금이 축소되면서 경제의 생산부문에서 사용할 수 있는 자본이 줄어들어 산업화의 발전 속도가 주춤해졌다”는 말이다. 우남은 해당 영어 연설을 통해, 아이젠하워 정부가 한미관계를 고려하여 미 의회에 증액 요청을 하기를 희망한다고 전하고 있다.
어떻게든 자본을 끌어와 경제개발을 하려 했던 경제대
통령 이승만의 고뇌가 느껴진다.

60년이 지난 지금, 대한민국은 세계 8대 무역대국이다.
조지 워싱턴대학교 학사, 하버드대학교 석사, 프린스턴대학교 박사(사진) 이승만.
▲ 조지 워싱턴대학교 학사, 하버드대학교 석사, 프린스턴대학교 박사(사진) 이승만.

4. 2015년 한국 민주주의를 관통하는 우남 이승만의 통찰력

(1) 2015년 대한민국 포퓰리즘, 정치 세태를 향한 우남의 목소리

29살 청년 시절, 우남 이승만은 1904년 옥중에서 “나라의 흥망성쇠는 정치제도에 달려 있고,
정치제도의 성패는 국민 수준에 달려있다”고 언급했다.

1958년 대통령 시절, 연두기자회견에서는 다음과 같이 발언하기도 했다.

“민주국가 국민들은 자신들의 개인적인 욕구에 따라 행동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산주의자들처럼 적에 결사항전하기 위해 하나의 세력으로 연합을 하지는 않습니다.
따라서 민주주의 국가에서의 개인들의 행동은 그들이 속한 국가의 힘을 약화시키는
동시에 적에게 패배할 가능성을 높이는 경향이 있습니다.”

한편 우남은 일찍이 민주주의의 딜레마를 다음과 같이 토로하기도 했다.

“민주주의 최대의 약점은 일반 선거로 선출된 지도자들이
광범위한 대중의 인기에 의존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대중의 지지 없이는 아무 일도 할 수 없다.
이것이 그
들을 소심하게 한다. 그들은 어떤 코스가 옳은가를
스스로에게 묻는 대신 어떤 프로
그램이 최대의 득표를 할 것인가를 묻는다.
그러므로 민주주의 국가의 정책은 의지할 
것이 못된다.
지도자들은 오늘 약속한 것을 형편에 따라 내일 포기할 수도 있다.”


(2) 한국의 '떼법’ 민주주의, 우남의 통찰력

우남의 정치제도, 민주주의에 관한 언급은 2015년 우리나라의 거의 모든 정치 실정에 적용할 수 있다. 오늘날 정치가 가장 큰 문제로 떠오른 이유는, 국익을 뒤로 하고 당파적 당리당략에 매몰되거나 개인의 입신양명 및 정권 탈취만을 목적으로 하는 모리배들이 정치를 좌우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치인은 자신들을 뽑은 국민의 수준을 그
대로 대변한다.
결국 남 탓은 금물이고 국민들 스스로 자신의 미개함을 탓해야 한다.

2014년은 세월호 사고 이후로 '떼법’ 민주주의, 무상복지 포퓰리즘의 파도가 더욱 거세었던 한해였다. 자유는 방종으로 흘렀으며, 이익집단의 창궐로 인해 서로에 대한 세금 약탈과 법치 농락은 다반사였다.

<박근혜 대통령이든 여야든 누구나 대중의 지지 없이 아무 일도 할 수 없다>는 점이
현재 드러나고 있는 한국식 민주주의의 한계다. 소위 '민주주의의 실패시대’이며
'천민민주주의’가 도래하고 있다.
우남이 지적했던 민주주의의 딜레마가 지금 우리 곁에
서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1904년 한성감옥에서 러일전쟁 소식을 듣고 몰래 저술한 옥정저서 [독립정신] 현대판 표지.
▲ 1904년 한성감옥에서 러일전쟁 소식을 듣고 몰래 저술한 옥정저서 [독립정신] 현대판 표지.

5. 자유주의자 이승만의 독립정신, 대한민국의 원류 그리고 미래

과거로 더욱 거슬러 올라가고자 한다.
대한민국. 모든 것의 시작은 1904년 한성감옥에서였다.
29살 이승만은 옥중에서 [독립정신]을 썼다.
토론회에 참석한 우리와 엇비슷
한 연배 시절, 사형수 이승만이 죽음을 앞에 두고 밝혔던
우리나라의 근본정신이다.

실천 6대 강령 <여섯째, 자유를 소중히 여겨야 한다> 中
“설령 남의 도움을 받아 형편이 좋아지게 될 기회가 있거나 먹고사는 것이 좋아지게 되는 경우가 있더라도 그 같은 도움을 거절해야 한다. 독립심을 가지고 지식과 기술을 배워 높은 사람들이 하는 것을 본받으려 한다면 그들과 같은 지위를 얻게 될 것이다. 지난날 사회에 대해 아무런 책임을 느끼지 못하던 사람들이 차츰 변하여 자립정신을 가지고 사회에 기여할 것이다.”

통상과 교류는 이로운 것이다 中
“오늘날 세계에서 부강하고 문명한 나라들은 서로 통상하면서 교류하는 가운데 이렇게 발전된 수준에 이르게 된 것이다. 개명한 시대를 맞아 우리나라도 잘만 한다면 그들처럼 발전할 수 있고 행복해질 수 있다. (중략) 외국 사람들이 우리나라에 해를 끼치거나 무엇을 빼앗으러 오는 것이 아니다.
통상하고 교류하여 서로 이롭게 하고자 하는 것이니, 그들을 막을 수도 없고 막을 이유도 없다. 우리는 이것을 깨닫고 옛날보다 몇 배 더 열심히 일하여 그들이 하는 것을 배우고 본떠서 그로부터 이익을 얻어 그들처럼 되어야 할 것이다.”


책임을 다하지 못하면 반드시 화를 당하게 된다 中

“다른 나라 사람들이 사는 것을 보면 그 나라가 누리는 영광과 번영은 말할 것도 없고,
보통 사람들이 사는 것을 보더라도 놀라울 따름이다. 그들은 모두 직업을 가지고 있으며, 그들의 재산을 한푼이라도 빼앗아 가는 사람이 없다. 그들의 자유와 권리는 보호되며, 아무도 그것을 침해할 수 없다. 사람들은 서로 사랑하고 격려하는 가운데 행복해지고,
서로 돕고 위로하는 가운데 인정과 우애가 커진다.
상업과 무역을 권장하여 다른 나라로부터 재물과 금은보화를 벌어들이고, 공업과 농업을 진흥시켜 생활이 풍요로워지면서 사람의 가치도 매우 소중히 여긴다. 기계는 편리하고 빨라서 사람의 수고를 덜어주며, 모든 사람이 골고루 교육을 받게 되고, 도덕과 신의를 소중히 여긴다. 누가 신사숙녀인지 자연히 드러나며, 순리가 통하고 법률이 공평하게 적용되어 나쁜 사람은 머리를 들지 못하고, 약한 사람이라도 두려울 것이 없다.”


“독립심, 책임감, 자립정신을 지닌다. 통상과 교류를 통해 서로를 이롭게 한다.
재산
을 포함한 자유와 권리를 보호하며 아무도 이를 침해할 수 없다.
서로 사랑하고 격려
하며 위로한다. 도덕과 신의, 사람의 가치를 소중히 여긴다.
순리가 통하고 법률을 공
평히 적용한다.”

이는 우남 이승만이 100년 전 꿈꾸던 우리네 모습이다.
우리 세대가 아직 이루지 못한 미래라고 말할 수 있다.
1941년 출근한 영문 저서 [일본의 내막] 표지. 일본 천황주의 정체를 폭로하고 일본군의 진주만 공습을 정확히 예언.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 1941년 출근한 영문 저서 [일본의 내막] 표지. 일본 천황주의 정체를 폭로하고 일본군의 진주만 공습을 정확히 예언.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6. 우남 이승만을 기리며

(1) 예언자 이승만

김용식 전 외무장관은 자신의 회고록을 통해 1955년 진해 휴양지에서 이승만 대통령과 나눴던 
대화 한 토막을 아래와 같이 소개했다.
“자네, 내가 무엇을 기도하는 줄 아는가?
나는 늘 하나님께 우리 민족도 다른 민족들 못지않
게 잘 살 수 있는 기회를 주십시오.
그리고 그런 기회가 올 때에, 나로 하여금 알게 하여 주
십시오 라고 기도하네.”
“각하, 언제쯤 우리도 남부럽지 않게 살 수 있겠습니까?”
“한 30년 걸릴 걸세. 그 때까지는 지금처럼 바쁘게 지내야 할 걸세.”
김용식 전 외무장관은 진해에서 이승만 대통령과 나누었던 말을 1988년 올림픽 개막식을 관람하며 떠올렸다고 한다. 이승만 대통령의 예언이 이루어진 것이다.

(2) 우리에게 남겨진 자유주의자로서의 몫

2년 전 날씨가 따사롭던 6월의 어느 주말, 집 근처 광장을 지나다 6.25전쟁 사진전과 마주친 적이 있었다. 필자는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하나하나 둘러보았다.
60여 년 전 
이야기가 사진 속에 펼쳐졌다. 부서진 교회 안에서 동생을 업고 기도하던 소녀,
폐허
가 된 거리를 헤매던 고아, 강추위에 얼어붙은 한강을 건너다 울음을 터트리는 아이,
난생 처음 보는 장난감에 환하게 웃음 짓는 아이들. 사진 속 아이들은 60년이 지나
백발이 성성한 할아버지, 할머니가 되어 있다.

북한 김일성의 침략으로부터 이 나라 이 땅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전쟁이 벌어졌고,
그 결과는 참혹했다. 수백만의 이산가족과 전쟁고아를 양산했던 민족상잔의 비극이었다.
그로 인해 태어난 지 2년이 채 되지 않던 대한민국은 아무 것도 없는 '무’ 에서
다시 시작하게 된다.

하지만 시간이 흐른 뒤, 지금의 우리는 무에서 유를 창조한 '한강의 기적’ 한복판에
서있다.
우리가 이제와 할 수 있는 건, 죽음과 고초의 시대 한복판에서 피와 땀으로 생명의
길을 열었던 과거의 모든 이들을 기억하고 그들에게 감사하는 것이다.

자유주의자 우남 이승만은 그 중에서도 가장 족적이 큰 인물이다.

자유주의는 인간의 이성으로는 제대로 파악할 수 없는 복잡성, 우리를 둘러싼 거대한 관습,
자생적 질서를 전제로 한다. 자유주의는 여기서 드러나는 인간의 한계와 세상의 어
리석음에 대해 전한다. 자유주의의 요점은, 개인의 선택과 충동은 누군가로부터 강요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에 의해 자발적으로 형성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반대의 것을 주장
하는 사람들은 인간의 자유, 존엄 뿐 아니라 종국에는 생명까지 말살하려 한다.

우리 모두는 부모세대가 피와 땀으로 열었던 생명의 길 한복판에 서있다.
자유주의는 남들에게 쉽게 양보할 수 없는 삶의 준칙이다.
자유주의는 나를 자유케하는 원동력이
자 생명의 길을 지키려는 노력의 원천이다.

이미 생을 마감한 것이나 마찬가지인 '종북’을 언급할 필요는 없다.
무상복지, 포퓰리즘 민주주의의 폐해, (사회적경제 공유경제 경제민주화 마을공동체 등으로
나타나는) 
사회주의적 생활방식과 이를 주창하는 꼬뮤니스트들은 우리가 계속해서 경계해야 할
적이다. 이는 현재진행형이다.
지상천국을 만들려는 그들의 시도는 언제나 지옥으로 끝나겠지만,
이 땅 모든 이들의 자유와 생명, 재산을 지키기 위해서 우리에게 주어진 역할을 다해야 한다.
우리의 몫은 정해졌다.
동북아 3국 평화와 번형을 가져온 이승만의 한미동맹. 1953년 휴전직후 한미 상호방위조약 가조인을 지켜보는 이승만 대통령(뒷줄 가운데).
▲ 동북아 3국 평화와 번형을 가져온 이승만의 한미동맹. 1953년 휴전직후 한미 상호방위조약 가조인을 지켜보는 이승만 대통령(뒷줄 가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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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문-배예랑>
이승만의 민주주의와 우리
배예랑 (대한민국 건국회 청년단 회원)

이승만이 자유주의와 처음 마주하게 된 곳은 배재학당이었다.
배재학당은 조선시대의 최초의 서양식 교육기관이자, 국제학교로 다양한 사고와 지식, 그리고 문화를 접할 수있는 장소였다. 특히 미국에서 막 돌아온 서재필은 배재학당에서 토론식 수업을 펼쳤다.
미국의 자유민주주의 사상을 접한 이승만은 대한민국에도 자유와 평등이 꽃피는 
사회를 꿈꿨다. 나랏님을 위해 존재하는 국민이 아닌, 나라가 국민을 위해 존재하는 즉, 국민이 주인이 되는 나라를 꿈꿨다.

어쩌면 이승만이었기에 이러한 꿈을 꾸고 실현했는지 모른다.
이승만은 왕족출신에양반신분이었다. 그러나 벼슬조차 받지 못하는 몰락한 왕족이었고, 양반이지만 가난한 평민과 섞여 살았다. 누구보다 평민들, 그리고 천민들의 고통을 잘 알 수 있었다.
렇기에 꿈꾸는 양반은 꿈을 위해 움직였다.
그러나 그가 일생을 자유와 평등을 위해 살았던 이유가 그의 출생배경 뿐만이라고는 할 수 없다.

이승만의 모든 사상과 그 사상에서 비롯된 정책들은 기독교 정신을 담고 
있다.
즉 이승만의 청년시절 한성감옥에서의 회심이 본질적으로 그를 움직이게 만든 
원동력이었다.
회심은 한 사람의 생명과 가치를 소중히 여기게 되는 계기가 되었고,
더 나아가 나라를 위해 희생할 줄 아는 리더십을 만들었다.
타고난 탁월함과 천재성에 결합된 애민정신과 애국정신이 지금의 대한민국 발전에 초석을 놓은 셈이다.

해방 전, 조선시대 농가의 75%는 소작농이었다. 농민도 아닌 사람들이 독점한 토지로 인해 소작농이 끊임없이 늘어났다. 소작료는 적게는 일 년 수확물의 50%, 많게는 70%까지도 되었다. 농민들은 발달하지 않은 농업에 농사도 제대로 안될뿐더러 그나마 벌어들인 수확물의 대부분은 소작료로 내야 했다.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극에 달하던 시점이었다.

이승만은 토지가 곧 신분임을 알았다.

토지의 공평한 분배가 모든 국민을 자유와 평등으로 이끈다는 것에 확신을 가졌다. 각자의 재산으로 열심히 일해서 각자 먹고 사는 것이 자유민주주의로의 첫 걸음이었다. 국가가 개인의 사유재산을 보호할 때, 보호를 받은 개인은 마음 놓고 자신의 자본을 갖고 더 노력하고 계발해서 더 높은 차원으로 자신을 이끈다. 국가는 결국 개인의 집합체이다. 각자가 더 높은 차원으로 올라가면, 국가의 위상도 더 높은 차원으로 이끌어진다.

그래서 이승만은 제일 먼저 토지개혁을 단행한다.

1948년 7월 17일 제정된 제정헌법 86조는 “농지는 농민에게 분배하며 그 분배의 방법, 소유의 한도, 소유권의 내용과한계는 법률로써 정한다.”고 명시되어 있다. 이를 통해 농민들은 소작농으로부터 해방되었다.

토지개혁에는 이승만의 애민정신이 드러난다.

이승만은 유상몰수 유상분배 방식을 취했다. 가난하고 불쌍하다고 퍼주기 식이 아니었다. 노력을 통해 자신이 성취할 수가 있었다. 가난한 농민들은 열심히 돈을 벌어 자신의 땅을 샀다. 직접 돈을 벌고, 내서 산 땅인 만큼 더 열심히 가꾸려 노력했다. 즉 개인의 경제 자립을 도운 셈이다.
이 
토지개혁이 우리나라 지금의 시장경제의 토대가 되었음은 분명하다.

토지개혁 이외에 이승만의 애민, 애국리더십으로 빛나는 또 다른 한 가지는 교육혁명이다. 
이승만은 개인의 교화와 교육이 나라를 형성하는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생각했다. 
1904년 11월 <신학월보>에 실린 글을 보면 이와 같은 그의 신념을 잘 볼
수 있다.
“나라가 나라 노릇하자면 사람이 먼저 사람 노릇을 하게 되어야겠고
사람이 먼저 사
람 노릇을 하자면 가르치고 배우는데 있으니
대저 학교는 사람을 만드는 곳이요 또한
나라를 만드는 곳이라고도 하겠사외다.”

해방 전, 일제시대에 '교육’을 받아본 사람은 14%에 불과했으며, 문맹률은 80%가 넘었다.
건국 헌법 16조는 “모든 국민은 균등하게 교육을 받을 권리가 있다. 적어도 초
등 교육은 의무적이며 무상으로 한다”라고 명시되었다. 이승만이 실시한 의무 교육제는 모든 국민을 평등으로 이끌었다.

첫째로 무상으로 제공하는 교육이었기에 경제력
으로 인해 학교를 못 들어갈 수는 없었다. 부모의 뜻이나 가정환경과는 무관하게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둘째로는 남녀차별을 철폐한 모두에게 적용되는 교육권이었다.

나라의 주인인 국민의 사유재산을 보호하는 것이 국가의 의무이듯, 이 역시 국민의교육권에 따른 국가가 해야만 하는 응답이었다.
해방 직후와 6.25 전쟁 기간은 대한민국의 역사상 가장 가난한 시절이었지만 이승만은 교육에 정부 예산의 10% 이상을 투자하였으며 그 결과 초등학교 취학률이 96%로 올랐다.

이승만이 물러날 당시, 대한민국의 대학생 비율이 영국보다 많았으며 여대생
도 이승만 집권 초기에 비해 17배나 늘었다. 뿐만 아니라 이승만은 유학, 연수 등의 다양한 형태의 외국 교육 프로그램을 제공했고, 자그마치 2만여 명이나 교육을 위해 미국으로 보냈다.

또한 문맹퇴치 운동을 대대적으로 일으켜 성인들에게도 교육의 장
이 열렸으며 80%가 넘던 문맹률은 그가 물러날 때엔 20% 이하로 감소했다.
조선시대에는 양반만이 글을 읽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승만이 불러일으킨 교육 열풍으로 인해 모두가 글을 읽게 되었으며 이를 통해 출신성분으로 인해 대물림 되는 계급제가 사라졌다.
덕분에 꿈을 꾸고 도전 하면 이룰 수 있는 사회가 되었다. 토지개
혁과 더불어 국민 한 사람을 자립할 수 있게 만드는, 사람을 키우는 보조 장치의 역할을 만들어 준 셈이었다.

 이렇게 키워진 인재들은 박정희 대통령 때 '한강의 기적’을 
이끌었다.
1914년 하와이 한인중앙학교 교장 이승만. 한국인 최초의 남녀공학을 단행하였다.
▲ 1914년 하와이 한인중앙학교 교장 이승만. 한국인 최초의 남녀공학을 단행하였다.

결과적으로 이승만이 이끌었던 토지개혁과 교육혁신이 결국은 대한민국 시장경제의 초석이 되었음을 볼 수 있다.
토지개혁은 농민에게 토지가 돌아간 것으로 끝이 아니
었다. 땅을 판 자본가는 기업인이 될 수 있었고, 자본가들이 기업인이 되면서 상업과 공업이 발전하기 시작했다.
더불어 교육혁신으로 인해 지식인과 전문가들이 늘어나면
서 상업과 공업의 양뿐만 아닌 질도 개선되었다. 이렇게 발전한 상업과 공업을 통해 무역을 하면서 국가 경제가 발전했다.
 현재 대한민국은 세계 8대 무역대국이 되었다.

지금 이룬 대한민국의 압도적인 성장은 민주주의를 향한 이승만의 발걸음으로 인해 가능했다.
그는 개인의 자립정신과 책임감을 통해 국가를 이끌 수 있는 국민을 키우
고자 했다.
그러한 국민을 키우기 위해선 개인의 권리를 보호해주고 권리에 알맞은 
정책이나 제도를 제공하는 국가를 만들고자 했다. 이렇게 세워진 국민들이 결국은 나라를 세우는 애국자임일 것을 기대했기 때문이다. 당장 맺혀지는 열매가 보이지 않아도, 지금의 희생으로 빛날 후대의 열매를 위해 자신의 욕심을 비울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대한민국 사회는 건국 대통령 이승만의 기대와는 다른 민주주의의 모습이다.
국가를 이루는 개인은 탐욕에 눈이 멀어 이기적으로 국가가 아닌 자신의 사
유재산만을 위해 살아간다. 언젠가부터 개인의 권리만 중요시되었고 책임이란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
더 나아가 국가가 모든 것을 제공 해주길 원한다.

예를 들면 지난 
2월, 연예인 김제동은 방송에서 '청년들의 데이트 비용도 정부가 부담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라는 발언을 했다. 물론 논란이 있었고, 모두가 동의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
영향력이 큰 연예인의 발언을 통해 대한민국 국민의 민주주의 의식이 어느 정도인
지를 확인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이는 개인의 문제만은 아니다. 정부는 국가와 국민을 위해서가 아닌 자기 자신을 위한 정책을 펼치고 있다. 국익보단 자신 역시 먼저 국민이 되길 자처한다. 이승만 대통령과 같이 국익을 위한 희생정신을 찾아볼 수가 없다.

즉, 국민과 국가를 사랑하는 애민정신과 애국심에서 비롯된 리더십이 없다.

이러한 정부의 이기심과 더불어 포퓰리즘(Populism)은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망가뜨리고 있다. 정부는 대중의 지지 없이는 아무 것도 하지 못한다. 계속해서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국익을 위해 희생이 요구되는 정책보단 대중에 입맛에 맞는 정책들을 공략으로 내놓기 일수다.

이승만이 처음 꿈꿨던 민주주의는 무엇일까.

이승만은 올바른 개인의 집합체가 올바른 국가를 이룰 수 있다고 믿었다.
청년 시절 한성감옥의 이승만은 종교를 통한 개인의 교화가 민주주의의 시작점이라고 생각했다. 즉, 개인의 성품이 가정과 사회와 국가를 이루는 가장 중요한 덕목임을 주장했다.
아무리 경제적 자립이 주어지고, 교육을 많이 받는다고 하더라도, 사람이 먼저 되어야 이 또한
자신을 포함한 모두에게 유익이 된다.

국민의 수준이 국가의 수준을 대변한다.
우리는 국가를 탓하고 역사를 탓하기 전에 자기 자신을 돌아봐야 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민주주의가 죽었다”라고 말하기 전에,
나는 진정으로 살아있는 사람인지를 돌아봐야 한다.

난세가 이승만이라는 영웅을 낳았듯이, 지금의 시대는 청년들을 일으키기 좋은 시기이다.
우리는 수많은 정보들과 씨름한다. 분별력과 통찰력은 오늘날 청년들에게 없어
서는 안될 요소다. 그렇기에 청년들은 배움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

청년 이승만의
탁월함도 결국은 겸손한 배움에서 나온 자산이다.
뭘 알아야 싸우지 않겠는가. 자유민
주주의를 지키려면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깊은 이해가 필요하다. 인터넷과 SNS의 발달은 청년들이 활동하기에 좋은 여건을 만들었다. 그저 남들의 생각이나 의견을 보고 '좋아요’를 누르며 공감하는 정도로는 부족하다.
우리는 분별력과 통찰력을 키워야 한
다. 깨어있어야 한다.
깨어있는 청년들이 깨어있는 생각을 세상 곳곳에 뿌릴 때 세상
에 찌들어 앞을 보지 못했던 국민들을 깨워 나갈 거라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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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문-이건희>
한국의 청년들이 우남 이승만을 제대로 알아야 
대한민국의 미래가 보인다
이건희 (인천대학교 무역학부)

대한민국의 초대대통령이자 건국대통령은 바로 우남 이승만이다.
우남 이승만의 업적은 역대 대통령 중에서 가장 빛난다고 할 수 있다.
일제치하에서 해방된 뒤, 혼란 속
에 빠져있는 정국에서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를 건국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건국되지 않았다면, 후대 대통령들이 이룰 수 있던 것은 아무것도 없었을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시장경제와 자유민주주의를 기반으로 한 대한민국을 건국하지 않
았다면 지금의 대한민국은 없었을 것이다.
1948년 8월15일 중앙청에서 열린 대한민국 건국 선포식. 두루마기를 입은 이승만 대통령이 건국연설을 하고 있다.
▲ 1948년 8월15일 중앙청에서 열린 대한민국 건국 선포식. 두루마기를 입은 이승만 대통령이 건국연설을 하고 있다.

자본주의에 대한 우남의 믿음 그리고 통찰력

우남 이승만은 시장경제와 자유민주주의를 한반도에 건국하기란 쉽지 않았다.
38선 이북에는 김일성이 버티고 있었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38선 이남에도 오히려 사회주의를 원했던 사람들이 많았다. 1946년 미군정청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알 수 있다.

問三, 貴下의 贊成하는 것은 어느 것입니까
가. 資本主義 1,189명(14%)
나. 社會主義 6,037명(70%)
다. 共産主義 574명(7%)
라. 모름니다 653(8%)

자본주의에 찬성하는 사람이 1,189명으로 (14%), 사회주의에 찬성하는 사람들은 6,037명 (70%), 공산주의에 찬성하는 사람들은 574명(7%)이었다. 즉, 사유재산권이 인정되지 않고 인류를 퇴보시킨 공산주의 및 사회주의에 찬성한 사람들이 77%나 됐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자본주의를 기반으로 건국되기란 
참으로 힘들었을 것이다. 아마 투표나 여론조사를 반영한 건국이 이루어졌다면, 대한민국은 북한과 별 다를 바가 없었을 것이다.

시작부터 힘들었던 대한민국에 자본주의 뿌리내리기는 이승만이 없었다면 불가능 했
을 것이다. 우남은 그의 저서들에도 잘 나와 있듯이 예전부터 공산주의와 사회주의의
문제점을 정확히 꿰뚫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독립운동을 하면서도 공산주의자들과
대립했다.

김구처럼 북한과 타협하려고 하지 않았다.
우남은 한민족을 위한 길이 시장경제라는 것을 일찍이 알았기 때문이다.
만약 우남이 공산주의자들과 타협을 했다면, 대한민국
은 지금과 같은 번영을 누릴 수 없었을 것이다. 우남의 뛰어난 통찰력과 지력이 지금의 대한민국이 존재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한 것이다.

김일성을 뒤따르는 김구(오른쪽). 1948년 대한민국 건국을 위한 총선거를 반대한 김구는 김일성과 협상하겠다며 평양에 갔다.
▲ 김일성을 뒤따르는 김구(오른쪽). 1948년 대한민국 건국을 위한 총선거를 반대한 김구는 김일성과 협상하겠다며 평양에 갔다.


시장경제, 대한민국의 풍요 그리고 현재

한강의 기적은 시장경제를 기반으로 한 대한민국이 건국되었기에 이룰 수 있었던 기적이다.
당시의 여론대로 시장경제가 아닌 사회주의나 공산주의 체제인 대한민국이 
건국되었다면, 지금의 풍요는 누릴 수 없었을 것이다.

경제학적으로나 역사적으로나 친(親)시장적인 제도를 가진 국가일수록 부국이 되는 것이 증명되었다. 규제가 적고 관세가 적을수록 그리고 기업들이 활동하기 좋은 환경을 가진 국가일수록 부국이 된다. 프레이저연구소에서 발표하는 경제자유지수를 봐도 현재 부국들은 경제자유지수가 높은 편에 속한다.

대한민국은 한반도 역사 상 가장 강한 나라이며, 부국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점점 그 풍요의 빛도 점점 희미해져 가는 중이다.
다름 아닌 과잉입법에 찌든 국회의 과잉
규제 때문이다.
정확히 말하면, 기업의 활동을 점점 옥죄고 있는 정부와 국회의 모습
이 대한민국 경제의 빛을 잃게하고 있다.

우남 이승만은 공산주의자와 사회주의자들과 맹렬히 싸우며 이 땅에 힘겹게 시장경제를 겨우
안착시켰다. 하지만, 지금의 지도층들은 오히려 황금알을 낳는 거위의 배를 
가르는 행위를 하고 있는 것이다.

우남이 목숨 걸고 지키려고 했던 시장경제를 '경제
민주화’, '무상복지’ 그리고 '동반성장’이라는 칼로 난도질하고 있는 중이다.
그 결과, 대한민국의 경제성장률은 점점 하향세를 향하고 있다.

한국경제연구원에서는 한국의 경제성장률을 3.4%로 하향조정했다.
최경환 경제부총리는 경제를 살리려고 애
를 쓰지만, 효과가 신통치 않다.
정부와 국회의 시장에 대한 개입은 자생적 질서를 움츠리게 하기 마련이다.
한 나라의 자생적 질서가 개입으로 인해 혼란스럽게 된다면, 그 나라의 경제는 뒤흔들리기
마련이다.
대한민국의 경제가 점점 쇠퇴하고 있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알고 있다.
경제전문가들도 여러 가지 처방을 내놓고 있다. 정치인들도 대통령도 경제살리기에 급급하다.
하지
만, 아이러니하게도 지금의 대한민국의 정부와 국회가 오히려 대한민국의 숨통을 조이고 있다.

대한민국 청년들이 해야할 일

빛을 잃어가는 한국경제에서 한국의 청년실업이 점점 늘어만 가는 추세다.
한국의 청년들은 계속 취업을 하려고 노력하고 삶을 향해 발버둥치고 있지만, 정작 자신들이
원하는 일자리 질 좋은 일자리는 생겨나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정부에게 계속해서 자신들을 위한 정책을 내놓으라고 하면 해결이 될까?
국회의원들에게 해결해달라고 애원하면 이 땅의 청년들이 과연 일자리를 얻을 수 있을까?

그렇
지 않다. 일자리는 기업들이 만드는 것이다.
정부는 일자리를 만들어 낼 수 없다. 
대한민국의 청년들은 자신들의 미래를 위해서 포퓰리즘에 현혹되지 않는 지력을 갖춰야 한다.
그리고 반(反)시장적인 정책에 환호하면 안 될 것이다.

역사적으로 밝혀졌듯
이 경제성장은 친(親)시장적인 정책, 즉 자유주의적인 정책이 수행될 때
이루어진다. 
대한민국 청년들은 자유주의의 가치를 깨달아야 자신들의 미래가 밝아진 다는 것을 직시해야 한다.
우남 이승만이 공산주의와 싸워 이 땅에 시장경제를 심었듯이,
대한민국의 청년들은 포퓰리즘 정책들, 반(反)시장적인 정책들에 완강히 맞서 싸워야 한다.
청년들은 자신
에게 빵을 달라고, 보조금을 달라고 정부를 흔들면 안 된다.
청년들은 시장에 개입하
는 정부와 국회를 보고 침묵하거나 동조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자신들에게 
이로운 것이 아닌 해롭다는 것을 알아야한다.

미제스가 경고했듯이 개입주의는 필연적으로 시장경제를 뒤흔든다.
그리고 개입주의는 곧 사회주의로 가는 길이다. 사회주의는 퇴보의 길이다.
이미 역사가 그것을 증명
했다.
대한민국의 청년들은 시장경제에 대해 정확히 이해하는 것이 자신들을 위한 길
이며 더불어
대한민국을 위한 길이라는 것을 가슴 속에 새겨야한다.

우남은 자신의 저서에서나 연설에서나 국민들의 의식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국민들이 자신들을 위한 길이 무엇인지 알고 그 길로 가려고 노력해야만 자신들과 국가의
운명을 바꿀 수 있다고 했다. 우남의 이러한 주장은 알렉시스 드 토크빌의 '모든 민주주의에서 국민은 그들의 수준에 맞는 정부를 가진다.’라는 말과 비슷한 의미를 지닌다.
국민들의 의식이 정부에 미치는 영향이 어마어마하다는 것이다.

국민들이 풍요로 나아가는 열쇠인 친(親)시장적인 생각을 갖지 않는다면, 정부의 경제에 대한 개입주의는 계속 된다. 결국, 그 나라는 쇠퇴할 것이다. 경제력이 줄어드는 나라에서는 청년들도 희망을 가질 수 없게 된다. 청년들이 희망을 잃고 활동하지 않는다면 그 나라에 미래는 없을 것이다. 지금부터라도 국민들의 인식이 바뀌어야 한다.

특히, 반(反)시장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는 청년들이라면 하루빨리 생각을 바꿔야 
할 것이다.
반(反)시장적인 사고로는 풍요를 누릴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한다.

시장경제와 자유민주주의의 중요성을 일찍이 깨달은 우남 이승만의 탁견은 지금의 대한민국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그리고 앞으로도 유효할 것이다.
대한민국의 청년들은 우남을 공부해야 한다. 그리고 우남에 대해서 정확히 알아야 한다.
대한민국의 청년들
도 우남처럼 시장경제의 중요성을 인지해야한다.
그 것만이 이 땅의 청년들이 미래에 
풍요를 누릴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우남을 보면 대한민국이 보이고 대한민국의 미래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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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문-전계운>

지속가능한 번영을 누리고자한다면
우남 이승만대통령을 넘어선 
청년 자유주의자들이 많이 나와야 한다

전계운 (충북대학교 정치외교학과)

1. 들어가며

먼저 우남 이승만대통령 탄신 140주년을 맞아 <청년, 이승만과 함께 자유주의 날개를
달다.> 토론회에 토론자로 설 수 있어서 매우 영광이다.
이 땅에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체제의 초석을 다진 자유의 아버지(The Father of the Freedom) 우남 이승만대통령의 정치사상과 업적을 재조명하는 움직임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것을
보면서 다소 안도감을 느끼고 있다.

자유주의의 흐름을 이어나가기 위해서는 원류를 찾고 연구하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고전적 자유주의(Classical Liberalism)의 대표적 도덕 철학자이자 경제학자인 애덤스미스로부터 후학들이 학문을 발전시켜 루트비히 폰 미제스, H.A 하이에크, Murray Newton Rothbard와 같은 훌륭한 자유주의 학자들을 탄생시켰듯이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자유주의를 접하고 시장경제와
사유재산을 강력히 수호해온 우남 이승만대통령
을 연구하는 일은 한국에서의 자유주의의 흐름을 유지하면서 이승만대통령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바로잡을 수 있을 것이다.

김규태 경제진화연구회 청년위원의 발제 <우리는 우남 이승만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
을까?>를 보며 본 토론자는 내용을 덧붙여 세간에 잘 알려지지 않은 이승만 대통령의
대미투쟁기와 정치사상 및 현실인식에 대해 짧은 지식이지만 발표해보고자 한다.

2. 우남의 대미 투쟁기

많은 사람들은 이승만 대통령을 친미파(親美派)라고 한다. 그래서 건국과정에 있어서 철저히 미국의 등을 업고서 정권을 잡았다는 주장을 한다. 하지만 이는 역사를 제대로 모르고 하는 말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1904년 한성감옥에서 출옥 후 조지워싱턴, 
하버드, 프린스턴대서 수학(修學)을 한 뒤 YMCA에서 교육활동을 하다가 기미년 만세운동이 일어난 그해 1919년 4월 11일 상해의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국무총리에 추대되고 8월 25일 워싱턴 DC 구미위원회를 설치하면서 대통령직에서 하야 직전까지 미국과 끝없는 투쟁기를 보냈다.

그는 틈만 나면 가쓰라-태프트 밀약의 사례를 들며, 자유민주진영의 리더인 미국이 자유를 수호해야할 책무를 버리고 조-미 수호통상조약의 약속을 어기는 바람에 대한인(大韓人)들은 제국주의압제와 공산도당들에게서 고통과 신음 속에서 살아왔다며 미국정부를 힐난하고 신의를 보여줄 것을 요구하며 워싱턴에 있는 국무부관리들에게 매섭게 호통을 친 진정한 자유인(Libertarian)이었다. 친미파(親美派)라는 주장은 한마디로 어불성설인 것이다.

(1) 미국정부에게 무기요구와 공산주의의 야욕을 경고
한국 사람들은 일본인으로부터 끊임없이 받아온 모욕과 부당한 처사들이
가슴 속 깊이 쌓여 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한국 사람들은 1905년 일본의 굴레에 자신들을 넘겨준 미국 정치가의 배신에 분개하고 있소. (중략) 당신은 미국 정치가의 그런 행동이 한국 사람들 사이에서 미국에 대한 좋은 감정을 일으키고 미국과의 통상관계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시오?
또 그런 행동이 극동에서 평화의 대의(大義)를 증진시킬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십니까? (중략) 만약 미국이 한국 사람들이 제대로 싸울 능력이 없다고 생각해서 무기대여 원조를 받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한다면, 그럴 경우에도 한국국민들에게 공정함을 보여주기 위한 명분으로도, 몇 푼어치 안 되는 2,3천 발의 소총탄약만이라도 민주주의란 무기고에서 그들에게 선물로 제공하는 것이 고려되어야 할 것이오.
오히려 한국은 공동 참전국 축에도 끼지 못하고 있소. 따라서 공식적으로는 한국이 미국의 적이 되어 있는 셈이오. 왜 그리되어야 한단 말이오?
                     - 1945년 4월 9일 정치고문 로버트 올리버에게 보내는 편지 중-1)


2차세계대전중에 한반도는 “일본의 특수 보호지역”으로서 사실상 일본인과 더불어 조
선인(朝鮮人)도 미국의 적이었다. 종전 후 군사재판이 열린다면 한반도에 있는 조선인(朝鮮人)들은 전범국을 도운 죄로 처벌 받을 위기에 처해있었다.

그렇게 된다면 독립
운동을 했던 이들이 세계만방에 독립의 정당성을 외칠 수 있는 힘을 잃게 된다. 이를 미리 꿰뚫어 본 우남 이승만 대통령은 대한인(大韓人)의 유구한 역사를 미국의 대중에게 알리는 운동2)을 하는 한편, 워싱턴 국무부에 로비를 적극적으로 펼치며 대한인(大韓人)들을 무장을 시켜줄 것을 요구한다.

워싱턴 국무부로서는 매우 황당한 요구였을 것이다. 한반도내에서 대표성이 불분명한
“이승만”이라는 사람의 말만 듣고 무기를 원조해주기는 매우 어려웠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무기요구는 건국 이후 국군을 30개 사단으로 증강하고 중무장을 시켜달라는 요구로 더욱 크게 발전한다. 그의 운동이 우리 모두를 살렸다.
이런 업적은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다.
1) 『건국과 나라 수호를 위한 대미투쟁(로버트 올리버 著, 비봉)』 42p. 참조
2) “한국은 일본의 숙적이다.(She’s Japan’s Oldest Enemy)”라는 제목으로 1943년3월7일자 <워싱턴 포스트>에 실렸다. 뒤이어 8월 8일과 12월 8일에도 실렸으며, 이듬해 7월 30일 <아시아와 미국>紙 “한국: 소홀히 다루어진 동맹국(Korea: Neglected Ally)”을, <월드 어페어스>紙 “한국, 미국이 망각한 나라(Korea, The Country America Forgot)”가 실렸다. 『건국과 나라 수호를 위한 대미투쟁(로버트 올리버 著, 비봉)』33p. 참조

한국은 지금 우리 형편으로 공산당을 원치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세계 각국에 선언합니다. -1948년 12월 19일 편지 중-

자유와 공산주의는 상극이다. 이 두 가지는 합쳐질 수가 없다.
공산주의와 타협은 불가능하다. 그것은 마치 기름과 물을 섞으려는 것과 같다.
                                   -1953년 휴전협약 조인을 앞두고 반대성명을 내며-

우남 이승만대통령은 일찍이 공산주의의 위험성을 알고 있었다.
1923년도에 이미 <왜
공산주의로는 안 되는가?>라는 '공산당의 당부당(當不當)'을 쓴 뒤
1933년 그는 스위스 
제네바와 오스트리아 빈을 거쳐 모스크바로 방문했던 일이 있었는데
그곳에서 짧게 
체류했지만 강한 인상을 받았다고 한다.
이렇게 기록을 남겼다.

“내가 모스크바에서 
보고 느낀 점은 오스트리아, 헝가리 등 유럽 농가와 비교했을 때
러시아 농가가 가장 
빈약하다는 점이다. 기차에서 만난 미국인들은 러시아 길거리에서 굶어 죽은 사람을 자주 보았다고 하였다.”

노동자와 농민의 천국이라는 소련에서 노동자가 굶어 죽어 죽는 것을 보곤 공산주의의 허구와 본질을 몸으로 깨닫게 되자 그는 공산주의(사회주의)를 평생 싸워야할 대상이라 했다.

조지프 슘페터(Joseph Alois Schumpeter)나 폴 새뮤얼슨(Paul Anthony
Samuelson)와 같은 경제학자들이 사회주의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를 하고 사회주의&공산주의가 마치 신(神)이 내린 이념인 것처럼 추앙받던 시대에서 대단한 혜안을 가졌다고 볼 수밖에 없다.

(2) 미군정과의 갈등
우리가 미군정을 지지하지 않으면 자기들은 철수하고 공산주의자들이 내려올 거라고 하는 말을 여러 번 들었소. 그러나 나는 그들에게 말하기를 당신들은 자신에게 알맞게 마음 내키는 대로 할 수 있으나 당신네가 한국에 와 있는 목적은 오직 한국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명심하라고 하였소. 그리고 우리 또한 우리들의 목적을 위하여 싸우고 있는 것 못지않게 그들을 위해서도 싸우고 있는 것이니 어떤 식의 공갈도 여기에서는 소용이 없소. 우리는 '만일 한국 사람들이 복종하고 협력하지 않으면 자기들이 힘을 행사하겠노라’는 식의 성명서로 미군정이 공갈을 치는 일에는 우리는 이제 신물이 나고 피곤합니다. 그리고 여러 번에 걸쳐 자기들이 미국으로부터 '쏴 죽이라’는 명령까지 말한 적이 있소. 3)-1948년 3월 2일자 로버트 올리버에게 보내는 편지 中-

우남 이승만 대통령이 친미파(親美派)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무색해지는 대목일 것이다.
사실, 조금 더 시간을 뒤로 돌아 이야기를 한다면 하지의 미군정은 우남이 환국 
전부터 한반도에 들어오지 못하게 방해공작을 하기도 했다.
미군정의 입장에서 이승
만은 '타협 따윈 할 줄 모르는 고집불통 늙은이’라 소련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고 한반도 내 혼란만 가중시킬 것이 분명하므로 중도 좌파인 여운형과 중도 우파인 김규식을 중심으로 좌우합작을 통해 연립정부를 구성하는 방안으로 추진해나가고자 했다.

그러자 이승만은 “맹렬히” 반대했다. 연립정부는 결국 공산주의에게 모
든 것을 내주는 것이며,
미국이 또 다시 한번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재현한다고 끝없
이 미군정과 워싱턴 국무부 관리들을 괴롭혔다.

그리고 정치적 승부수로 정읍에서 남한 지역만이라도 자유민주국가를 세울 것을 주장하는 “정읍발언”을 했다. 이승만의 이러한 조치는 워싱턴의 국무부를 경악케 했다. 하지만 결국 이승만의 혜안은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했다.

1947년, 좌익
과 연립정부를 세웠던 동유럽은 모두 공산화되었다.
이후에 1952년 전쟁 중 직선제 
개헌과 반공포로 석방은 이승만 대통령을 체포하고 한국을 다시 미군정하에 두는 계획 “에버레디 작전(Operation Ever-ready)"을 세웠을 정도로 미국과의 갈등은 첨예하였다.

3. 우남의 정치사상

(1) 자유주의
이승만 대통령은 자유(自由)라는 개념을 배재학당에서 서재필을 통해서 처음 접했다고 한다.
과거시험 준비생 이승만으로 하여금 위정척사에 집착하는 보수적 유교 사고와 
결별하게 만들었다4)는데 여기서 이승만이 배운 자유는 인위의 자유(Liberty)가 아닌 천부의 자유(Freedom)이었다. 그래서 누구든지 법의 테두리 안에서 자유(재산권)를 보장 받는 로크의 권리이론과 경제적 자유를 추구하는 애덤 스미스 고전경제학의 인식을 가지고, 헌법에도 이를 골자로 하여 사망하기 직전까지 그 흐름은 계속 유지했다.

(2) 머리는 서향, 가슴은 동향
“이 대통령의 정치사상은 '서향(西向)주의’와 동시에 유교전통이 끈질기게 작용했다.
그의 머리는 서향했지만 폐부(肺腑)는 동양에 머물고 있었고, 동과서의 융화(融和)나
퓨전(fusion)을 시도했다. 이 대통령은 서향식 민주발전을 역설하면서도 동방예의지국
전통의 부활과 진흥을 바랬고, 기독교와 유교 사이에 근본적 모순이 없다고도 주장했다.5)”

로버트 올리버의 『이승만 없었다면 대한민국 없다.』에 나온 자료를 살펴보면 이승만 대통령은 동양철학, 공자의 사상의 영향도 받았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기독교의 가부장적 사상과 유교사상은 별 다른 차이가 없다고 보았고 머릿속으로는 끊임없이 자유민주를 이야기하면서도 가슴속으로는 민족주의를 품으며 유교적 전통질서의 부활을 꿈꾸었다.

4) 김학은, 『이승만 자유주의의 기원』 천부의 자유 4p. 인용
5) 김한교 University of Cincinnati 정치학 명예교수, 『이승만 정치사상의 근간, 민족주의와 민주주의』

4. 결어

얼마 전 두산 백과에서 제1공화국 정치와 사회상이라는 키워드를 보았다.
내용이 매우 가관이었다. “건국 초기의 혼란 속에서 6 ·25전쟁을 겪고 난 정부로서는 전후복구
라는 시급한 난제를 안고 있었다. 그러나 이승만을 중심으로 하는 집권당은 전후복구보다는 장기집권에 더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로 시작하며 시종일관 제1공화국(이승만 정부)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담긴 내용이었다. 한국 현대사를 배우는 청소년들이 이승만 대통령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통탄을 금치 못할 일이다.

날조와 부정
으로 점철된 역사교육은 결코 바람직하지 못한 현상이다.
그의 쓸쓸한 말년을 생각해
서라도 진실을 바로잡아 이승만대통령의 명예를 회복해야한다.

이승만 대통령은 민족주의를 품으며 자유민주제도를 통한 대한민국의 번영을 꿈꾸었다.
민족주의가 한국 성장의 밑거름이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확실한 것은 자유주
의의 핵심 가치인 경제적 자유의 보장을 함으로써 눈부신 번영을 이루어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우리가 이러한 번영을 계속해서 구가하기 위해서는 이승만 대통
령을 뛰어 넘는 청년 자유주의자들이 많이 나와야한다. 먼저, 민족주의적(국가주의적) 사고방식을 탈피해야 한다.
이것은 자유주의로 가는 첫걸음이다.
이것을 탈피하지 못하면서 경제적 자유를 지향한다는 이유로 자유주의자로 불리는 웃지 못할 일이 벌어지고 있다.(혹자는 이런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을 한국형 자유주의자라고 한다.)

시대가 바뀌었다. 글로벌 시대, 하루하루가 혁신과 변화로 일렁이는 시대
다.
사해동포주의를 지향하며 경제적으로도 자유주의적인 움직임을 끊임없이 취해야 
한다.
또한 비자유주의적 정책과 행태에 대해서는 절대 묵인해서는 안 된다.

이승만대통령은 인민군의 기습 남침으로 인해 국군의 방어선이 무너졌을 때 이런 말을 남겼
다. “자유인은 결코 항복하지 않는다.” 자유(自由)를 향한 진리와 진실 수호를 위해 싸워야 할 몫은 청년 자유주의자들에게 남겨졌다. 주사위는 던져졌다.
---------------------------

<토론문-정재청>
청년들에게 우남 이승만의 의미를 정확히 각인시켜야

정재청 (자유경제원 연구원)

김규태 청년위원의 발제문을 보고 자유주의 사상가로서 또 근대화 혁명가로서 국제정치는 물론 경제 분야에까지 우남 이승만이 가진 선견지명과 통찰력을 또 다시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우남 이승만은 알면 알수록 대단한 인물이라는 점을 실감하게 된다.
그러나 대한민국 국민들은 이런 건국대통령 이승만에 대해 잘 알지 못하며 오늘이 그의 탄신 140주년이라는 사실도 알지 못할 것이며 관심도 없을 것이다.

대한민국 국민들 특히 20∼30대 청년들이 아는 우남 이승만의 모습은 어떤 것일까?
아마도 그의 이름조차 모르는 경우도 있을 것이고 이름을 안다고 해도 그의 인생에 대해 제대로 아는 청년들은 드물 것이다.

하다못해 그가 29세에 한성감옥에서 썼던
『독립정신』이라는 책의 존재 여부는 물론 그 책이
대한민국의 역사와 나 개인에게 가
져다주는 의미는 무엇인지 알지 못할 것이다.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 진가를 알아보
지 못하고 좌익들의 온갖 왜곡과 선전선동에 의해 그의 모습을 다르게 보는 것이다.

흔히 '아는 만큼 보인다’고 한다. 그것은 대한민국 청년들이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가 어떤 의미인지 알지 못하고 그것이 나 개인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모른다는 사실에서 그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헌정질서로 한 근대국가 대한민국의 가치또한 알 수 없을 것이고 그 것을 이룩한 우남 이승만이라는 인물의 가치도 알아보지못할 것이다.
지금은 최고의 에너지자원이 된 석유도 그것의 가치를 알지 못했던 시
절에는 그저 냄새나는 액체에 불과했을 것이다. 따라서 우남 이승만을 제대로 알리려면 그가 대한민국 역사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청년들에게 제대로 각인시키는 일부터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우선 기존의 청년들이 우남 이승만이라는 인물에 대해 가지는 이미지는 다음과 같을 것이다.
(이는 필자의 주관적인 예측이다.)
먼저 사실 왜곡 등에 의해 부정적으로 알려진 측면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첫 번째, 민족 분단의 원흉이다.
두 번째, 부정선거로 4.19혁명에 의해 쫓겨난 반민주 독재자이다.
세 번째, 항일독립을 적극적으로 하지 않았으며 친일파였다.
네 번째, 친미주의자, 반공주의자였다.
그리고 아직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긍정적인 측면은 다음과 같다.

첫 번째, 북학파 실학사상과 개화파를 이은 근대적 지식인이자 대한민국 최초의 자유주의자로 평가될 수 있는 선구자이다.
두 번째, 해양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잘 알았으며 대륙문명에서 해양문명으로 문명사적 대전환을 이루었다.
세 번째, 한미방위조약을 통해 안보를 확립하여 경제발전에 매진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했다.
네 번째, 교육정책을 통해 인재를 육성하여 근대화, 산업화를 위한 인적자원을 구축했다.

이 밖에도 여러 사항들이 많겠지만 이는 장기간에 걸친 연구와 홍보를 통해 정립되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본 토론문에서는 우남 이승만 개인 즉 인물에 대한 긍정적 이미지의 각인에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우선 우남 이승만이라는 인물이 청년들에게 긍정적으로 어필할 수 있는 장점은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먼저 그가 배재학당이라는 한국 최초의 서양식 근대교육기관에서 서양의 문물과 근대정신을 배우고 익힌 개화파 지식인이라는 점이다.
조선이 일본에 의해 식민지가 된 것은 그들보다 근대화 즉 개화에 늦었기 때문이며
그런 시대에 근대정신과 서양의 지식을 제대로 익혔던 그의 근대지식인으로서의 면모는 평가할 가치가 있다. 또한 그는 만민공동회의 연사로 나선 청년지도자였으며
[매일
신문]이라는 한국 최초의 일간신문을 창간한 언론인이었다.

한성감옥에서 그가 쓴 『독립정신』은 옥중에 쓴 혁명가의 책으로서도 훌륭하다.
그는 무지몽매한 일반 백성들을 계몽시키기 위해 세계와 문명에 대해 소개하고 정체제도를
전제정치, 입헌군주정치, 민주정치 세 가지로 구분하여 장단점을 소개한다.
특히 민주주의에 대한 이론을 체계화한 것이 특징이다.
그의 정치철학은 나라의 독립을 수호하
고 이를 위해 민주적인 제도로 개혁,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여 자유롭고 부강한 나라를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한다는 점에서 매우 근대적이고 개혁적이다. 6)

로버트 T. 올리버는 이승만을 “제퍼슨 자유주의 정치경제 철학자”라고 묘사하였다고
한다. 연세대 경제학부 김학은 명예교수는 우남 이승만의 박사논문 『미국영향 하의
중립』이 칸트의 『영구평화론』의 큰 영향을 받았다고 평가한다. 7)

그리고 무엇보다 그가 조지 워싱턴 대학, 하버드 대학, 프린스턴 대학에서 각각 학사, 석사, 박사학위를 받았다는 점이 눈에 띈다. 이곳에서 그는 서양의 철학, 역사, 정치, 경제, 국제법 등을 공부하였으며 이는 대한민국을 건국한 대통령으로서만이 아니라 자유주의 사상가이자 국제정치학자로서 이승만의 학자적 면모를 볼 수 있는 단서가 된다.
사실 우남 이승만은 '대통령’이라는 호칭보다 '박사’라는 호칭으로 더 자주 언급 
되었었다. 국민들은 그를 '이승만 박사’라고 불렀다. 한국인 최초의 국제정치학 박사, 그것도 미국 동부 8대 명문 아이비리그에 속하는 프린스턴 대학에서 국제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는 것은 그 당시로서는 물론이고 지금의 기준으로도 놀라운 일이다.
그리고 프린스턴 대학은 '스코틀랜드 계몽주의’를 건학이념으로 한 학교라는 점에서 더 의미가 있다. 이승만에게 영향을 준 철학자 칸트 역시 스코틀랜드 계몽주의 철학자였던 흄과 스미스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프린스턴 대학의 교과목은 스코틀랜드 계몽주의의 핵심적인 학교인 에든버러 대학과 글래스고 대학의 교과목을 모델로 하였다고 한다.

스코틀랜드는 약소국으로서 강대국 잉글랜드
의 식민지(일본의 식민지였던 한국의 처지와 묘하게 흡사하다)였지만 자유와 교육의 발상지이자 자유주의 사상의 본고장이었다. 자유주의 사상가이자 오스트리아학파 경제학자인 프리드리히 A. 하이에크는 스스로 스코틀랜드 계몽주의 전통의 자유주의를 계승한다고 자처한다.

프린스턴 대학 6대 총장으로서 프린스턴 대학이 스코틀랜드 전통을 가지는데 큰 역할을 한 존 위더스푼(John Knox Witherspoon: 1723∼1794)은 스코틀랜드 출신으로 애덤 스미스의 스승이자 스코틀랜드 계몽주의의 창시자인 프랜시스 허치슨(Francis Hutcheson: 1694∼1746)의 제자이다. 그리고 위더스푼의 제자 제임스 매디슨(James Madison: 1751∼1836, 미국 제4대 대통령)은 미국 헌법의 아버지라고 불린다. 토마스 제퍼슨(Thomas Jefferson: 1743∼1826, 미국 제3대 대통령)의 스승 역시 스코틀랜드 애버딘 대학 출신이었다고 한다.

즉 이들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Founding 
Fathers)과 대한민국의 건국대통령 이승만에게는 '스코틀랜드 계몽주의’라는 공통분 모가 존재하는 것이다.
미국과 한국 모두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라는 가치를 공유
하고 있다. 그리고 대한민국은 스코틀랜드 계몽주의 철학의 영향을 받은 미국 국제정치학 박사 이승만이라는 건국대통령을 통해 선진적인 사상과 이념을 바탕으로 한 근대국가를 건국할 수 있었다.

이것이 근대화의 초석이 된 것이다. 대한민국이 산업화와 
민주화, 근대화, 문명화를 모두 이룬 것은 절대 우연이 아니다. 8)

대한민국의 청년들은 이제 우남 이승만을 제대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
좌익 선동가들의 선전선동에 그만 속고 그의 진면목을 알아볼 때가 되었다.
그리고 허치슨, 흄, 스
미스, 리드 등 스코틀랜드 계몽주의 철학자들과 토마스 제퍼슨, 제임스 매디슨, 알렉산더 해밀턴, 벤저민 프랭클린, 존 위더스푼 등 미국의 건국세력이 우남 이승만과 공유하는 자유주의 사상에 대해 하루 빨리 눈을 뜨는 계몽의 시대가 실현되면 좋겠다.

우남 이승만이 대한민국 청년들에게 말하고 싶은 말은 아마 “깨어나라!”일 것이다.

6) 이승만, 『풀어쓴 독립정신』, 풀어쓴이 김충남·김효선, 청미디어, 2008, 18∼20쪽 참조
7) 김학은, 『이승만의 정치·경제사상 1899∼1948』, 연세대학교 대학출판문화원, 2014, 3∼10쪽 참조8) 김학은, 『이승만의 정치·경제사상 1899∼1948』, 연세대학교 대학출판문화원, 2014, 148∼174쪽 참조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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