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도] < 조윤희 칼럼 > ‘억울한’ 경쟁을 위한 변명

자유경제원 / 2015-05-08 / 조회: 2,711       업코리아

 ‘억울한’ 경쟁을 위한 변명 

  

   
▲ 조윤희 부산 금성고등학교 교사

사전에서 '인성’을 찾으면 '사람의 성품’이라고 되어 있다. 그리고 이어놓은 예문은 이렇다. 

'과도한 학업 경쟁은 학생들의 인성을 파괴할 우려가 있다.’

'과도한’이란 수식어가 붙어 있지만 '경쟁’은 인성을 파괴할 우려가 있는 것으로, 마치 인성과 경쟁은 대척점에 배치된 단어로 느끼기에 충분하도록 표현되어 있다. 학교에서 일어나고 있는 학교폭력의 문제가 심각해 질 때마다, 군대에서 관심 사병이 늘어 사고가 터질 때마다 교육의 방향이 '경쟁’일변도이기 때문이라는 말로 경쟁은 모든 원죄를 뒤집어 써야 했다.  

덕분에 언제부터인가 경쟁과 무관하게 사는 법, 경쟁하지 않는 삶의 강조가 '인성교육’처럼 오해되기 시작했다. 사람의 성품을 바로 세우기 위한 것이 왜 경쟁과는 무관한 것이어야 하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시민들을 제일 처음 사회화시키는 공식적 사회화기관(학교)에서 경쟁을 이렇게 부정적으로 학습하고 있는데 아무리 경쟁이 아름다운 것이라고 이야기 해봐야, '경쟁’과 '불공정한 경쟁’이 서로 다르다고 외치는 것은 공허한 울림이 되고 만다. '그릇된 인성교육’에 딴지를 걸면서 경쟁에 토대를 둔 '올바른 인성교육’ 이야기를 시작하려고 한다. 

사회문화 교과서에 나타난 경쟁 

현재 고등학교 교과의 내용은 2009 개정 교육과정에 따라 교과서의 내용이 개편되었으며 그 내용을 기준으로 교과서가 집필되고 검정이 되었다. 2011년에 검정된 교과서에는 사회적 상호작용을 다루는 단원에서 '경쟁’을 다루었다. 사회적 상호작용의 종류는 협동, 경쟁, 갈등의 세 가지가 있으며, 경쟁은 '동일한 목표를 상대방보다 먼저 달성하게 위해 각자 노력하는 상태’라고 정의되어 있고, '규칙을 지키지 않는 경쟁이 갈등으로 전환될 수 있다’고 서술하고 있다. 경쟁의 적절한 사례로 스포츠 경기를 예로 든다. 규칙이 지켜지는 운동경기는 적절한 경쟁으로서 사회 속에서 상호작용을 하는 좋은 통로가 된다는 것이다. 

교과서에 묘사된 경쟁은 휘슬을 부는 심판의 주도와 엄정한 관여에 의해 그라운드를 종횡무진 누비는 선수들의 'fair play’로 그려진다. 이런 운동경기에서 경쟁이라는 사회적 상호작용이 일어나며 사회적 존재로서의 인간에게 경쟁이란 협동과 마찬가지로 매우 중요한 상호작용이라고 언급한다. 도리어 이 경쟁이 과도해져서 '갈등’으로 진행되면 사회적 통합을 저해하거나 사회를 파괴시킬 수도 있다는 지적을 한다. 하지만 갈등이 꼭 부정적인 측면만을 보이는 것은 아니어서 국가적 차원의 문제나 어려움에 봉착하면 내부적으로 오히려 사회구성원의 협동을 이끌어 낼 수 있는 계기가 될 수도 있고 사회에 역동적 자극을 줄 수도 있음을 적시한다. '비온 뒤의 땅이 굳어진다는 것’이다.

이처럼 사회적 상호작용에 대한 '교과서적’인 언급에서는 경쟁이 '공정한 축구경기’처럼 묘사되어 있다. 그러므로 사실 책 속에서 만나지는 경쟁은 어떠한 가치도 개입되지 않은 중립적 개념으로 존재한다. 심지어 갈등마저도 사회에 역동적 변화를 몰고 올 수 있는 순기능이 있다고 언급된다. 그러나 책 속에 표현된 경쟁에서 현실로 눈을 돌리는 순간 우리의 현실 속 경쟁은 온통 저주받을 대상으로 돌변하고 마는 것이다. 

학생들이 사회문화 교과서 밖에서 만나는 경쟁의 의미는 사회 불평등의 첫 단추와 같다. 이는 갈등론적 시각에 충실한 언급이라고도 볼 수 있다. 갈등론적 시각에 따르는 교육이 대체 무엇인가. 교육이란 무릇 '된 사람’을 길러내야 하는 것임에도 경쟁은 당장 눈앞에 보여지는 결과물로만 교육을 평가하고자 하는데다가 그 잣대는 사회의 기득권을 선점한 자들의 독점적 기준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경쟁을 부추기는 것은 잘못되었으며 도무지 교육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그런 '속물적’인 잣대로 교육을 재단하려는 경쟁 탓에 지금까지의 우리교육이 모두 망가지고 엉망이 되어 버렸다는 것이다. 이쯤 되면 교과서 안에서 다루어진 경쟁의 순기능은 간 곳이 없고 경쟁은 교육부재의 원죄를 온통 뒤집어 쓸 수밖에 없어진다. 경쟁 자체가 아니라 왜곡되어지거나 공정성이 사라진 경쟁의 뒤틀린 경쟁의 모습을 두고 애초 경쟁이 그렇기라도 한 듯 온갖 돌팔매질을 하는 것이다. 도리어 경쟁이 사라져버리는 사회가 어떤 모습이 될지 생각하면 더 끔찍할 것이건만 경쟁이라는 이름에 대해 잘못된 인식은 우리에게 무턱대고 경쟁의 부작용만 주입하여 경쟁없는 사회가 되는 것이 순수한 교육의 본 모습이고 바람직한 인성교육인 듯 왜곡을 거듭해오고 있는 것이다.

사회문화 교과서에서조차 사라지는 경쟁 

그러나 어떻든 2011년에 개정될 당시에는 이러한 경쟁의 의미가 교육과정에 포함되어 교과서 내용에 서술되어 있었으나 2013년부터 배포되는 교과서에서는 사라져버렸다. 따로 가르치지 않아도 당연하게 인지될 내용이라는 의미일 수도 있으나 '경쟁’이 사회에서 가질 의미에 대해 더는 학습요소로서 공식적으로 언급할 단원마저 사라지게 된 것이다. 

중요한 사회적 사호작용의 유형으로서의 경쟁은 이제 그것을 언급하는 교사의 '재량’에 따라 '필요악’으로 언급되거나 불공정한 메카니즘과 동일시되어도 그 의미가 교정될 어떤 기회도 가질 수 없게 된 것이다. 경쟁은 이제 부정적인 설명으로 점철되어도 교정되거나 바로잡을 기회를 수업시간에는 얻을 수 없게 되었다. 

역사교과 곁눈질로 바라본 경쟁 

1894 갑오개혁. 우리나라 신분제 폐지의 공식적 시작은 갑오개혁으로 부터로 인정하고 있다. 이러한 신분제 폐지의 개혁이 근대와 전근대를 가늠하는 중요한 기준으로 작용한다고 한다. 전근대 시대에는 신분제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기에 공정한 경쟁의 기회를 얻을 수 없었던 시대였고, 과거제같은 등용문이 허락되지 않는 '닫힌사회’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과거제와 같은 場의 보장이 바로 근대화의 중요한 척도라는 사실만 보아도 치열한 경쟁이 시대의 변화를 이끄는 중요한 견인차이며 필수적인 관문이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는 것이 아닐까싶다. 우리의 역사 속에서도, 이웃 나라 중국의 역사 속에서도 신분을 뛰어넘는 평등은 결국 '경쟁’의 보장으로부터 시작되었음을 인정해야 하지 않을는지.

역사교과에서는 어떻게 다루는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같은 사회과 교사와의 대화를 통해 논의를 해보아도 신분제의 철폐가 우리의 역사에서 중요한 분수령이 되었음을 인정하면서도 그것이 '경쟁의 시작’이라는 시각에는 선뜻 동의하지 않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경쟁이라는 단어가 주는 선입견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었을까 조심스레 짐작해본다. 

물론 사회문화 교과에서는 역사적 변화를 다루지는 않는다. 다만 '사회이동과 사회계층구조’를 통해 신분제 사회에서 개방적 계층구조로의 변화가 '바람직한 사회변화’로 이야기 하고 있으며 이러한 관점이야말로 '경쟁사회’로의 이동을 전제로 하고 있다고 지적해야 옳지 않은가 하는 생각을 갖게 되는 것이다. 물론 사회문화 교과서는 '경쟁사회’로의 이동이라고 다루고 있지는 않다. 하지만 폐쇄적 계층구조가 개방적 계층구조로, 하층민의 비율이 높은 '피라미드형 계층구조’에서 '다이아몬드형 계층구조’로의 변화를 바람직한 사회변화로 인정하는 것이라면 경쟁이 보장되는 사회로의 변화야말로 바람직한 구조로의 사회변화라는 사실이 지적되어야 하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보게 된다.

'경쟁’의 오해를 넘어서기 

이쯤 되면 경쟁이 도대체 왜 그렇게 늘 오해를 사는지 의문이 생길 수밖에 없다. 사실 학교 현장에서 만나게 되는 교직원들은 사회에서 어느 정도는 '경쟁’의 관문에서 실패 쪽 보다는 성공의 경험을 더 많이 한 사람들일지 모른다. 그럼에도 '경쟁’이 교육을 망친 주범이기라도 한 듯 열을 올리는 것을 목도할 때가 많다. 그러나 과연 우리 학생들이, 나아가 우리 사회가 '경쟁 없는 사회’에서 지금까지 살게 되었다면 어땠을 것인가 하는 질문에는 답을 줄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경쟁이 우리 사회를 근대화된 사회로 '전이’시키는 중요한 '견인차’였을지 모르는 진실 앞에서도 경쟁을 오해하는 착각은 어디에서 비롯되었을까. 

보다 논리적이고 분명한 설명을 위해 고민하던 중 '경쟁은 아름답다’라는 책에서 답을 찾게 되었다. 경쟁이라는 단어에 가졌던 고정관념에 자신들의 편견까지 버무려 일선현장에서 '오도된 경쟁’을 마치 경쟁의 민낯이라도 되는 양 착각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책 속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경쟁이 문제가 아니라 '불공정한’ 경쟁이 문제이며, 생물학적 생태계의 경쟁과 사회적 경쟁의 의미는 그 목적이 다름을 이해해야하며, 경쟁이란 '상태’가 아닌 '과정’이라는 사실에 대한 명확한 해명이 필요함을 알 수 있었다. 


-경쟁은 피할 수 없는 본능에 가까운 것이다. 하지만 경쟁을 완화도 피하기도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도리어 자유다 (신중섭).  

-경쟁이 유효하게 작동하려면 세심하게 배려된 법적 틀이 필요하다. 게다가 과거든 지금이든 법 규칙이 중대한 결함을 갖고 있다. 자유주의자들이 반대하는 것은 경쟁보다도 열등한 방법들이 경쟁을 대체하는 것들에 반대할 뿐이다 (신중섭). 

게다가 사람들은 특히 교육 분야에서 경쟁에 대해 극도의 오해를 하고 있다. 상대적 박탈감과 같은 심리적 요인을 경쟁에 분풀이를 하는 것이다. 이쯤에서 복거일 선생님의 경쟁에 대한 설명은 매우 설득력을 갖는다. 

- 진화론의 핵심개념은 자연선택이며 이는 엄밀히 말하면 제거 혹은 도태과정을 일컫는 것이다. 대저 진화란 변이-선택-전파의 과정을 거치게 된다는 것인데, 그 과정을 거쳐 자연스럽게 사회에는 위계라는 것이 생겨났다. 게다가 인간은 뇌구조상 사회전체의 향상이나 정체이익의 증가엔 관심이 없고 자신이 상대적 우월과 지위 소득에만 관심을 가지게 되어 있다. 늘 이렇게 비교를 하며 살게 마련인 인간은 자신보다 처지가 나은 사람에 대해 부러움과 미움을 동시에 품는다. 그러면서 차이가 나는 처지를 만든 것이 체제 탓이라는 원망을 하며 보다 '평등’한 사회의 청사진을 내놓은 사람들을 추종한다. 이런 부러움의 정치가 가장 강력하게 불거지는 분야가 바로 교육이다. 인간은 자신의 종을 우월하게 물려주고 싶은 강력한 욕구를 가지며 그러한 본능에 따라 부모들이 자식에게 좋은 교육의 기회를 물려주고 싶어 한다. 이는 교육이 사회적 지위를 결정하는 매우 중요한 요소임을 전제로 한 것이다. 어느 누구도 자신의 자식에게 가난의 세습을 불러올 열등한 교육을 원하지 않는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내 자식이 가장 좋은 교육을 받을 수 없다면 다른 사람들의 자식들도 그것을 받을 수 없다’는 논리다. 그 결과는 자명하다. 그러므로 '교육의 하향 평준화’의 등장은 정해진 수순을 밟고 있는 것으로 보아도 좋다. 이는 우리나라 뿐 아니라 영국의 경우에 매우 전형적으로 나타난다(복거일).


그래서 사람들은 애초에 경쟁이 존재하지 않았던 원시공동체로의 회귀를 꿈꾼다. 이상적인 사회는 그렇게 경쟁이 없었던 시대였던 것처럼. 그래서 '공동체’를 이야기 하고 '사회적’기업을 이야기 하고 '협동조합’을 이야기 한다. 경쟁 따위는 발붙일 수 없는 아름다운 사회가 아닌가! 하지만 '아름다운 공동체’로의 회귀는 사실 상 레토릭에 지나지 않는다. 이미 태어나 장성한 어른이 어머니의 자궁으로 회귀할 수없는 것만큼이나 불가능하다. 

원시공동체로 회귀하면 '경쟁 없는 사회’로의 복귀가 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과거 원시시대의 생존자만큼만 남고 나머지 대다수의 인류를 '제거’한 후에나 가능할 이야기다. 말이 되지 않고 공허한 이야기만 반복되고 있으니 시간낭비일 뿐임에도 심지어 교사들도 그렇게 공허한 레토릭에 기대어 교육을 하고 있다. 특히나 사회과에서 아름답게 포장해 경쟁을 가리고, 심지어 경쟁을 폄훼하여 가르친다. 당당하게 경쟁을 통해 성취하고 앞으로 나아가야 함에도 경쟁이 두려운 탓일지 모르겠다. 그렇게 '인성교육’이 이루어지고 있다. 답답한 현실이다. 
 

아름다운 경쟁을 위하여 

경쟁이 아름답다는 사실을 확인하면서 드는 생각은 그렇다면 왜 우리 사회는 그 아름다운 경쟁을 믿지 못하느냐는 것이다. 운동경기를 하며 치열하게 경기를 하는 동안 선수들은 게임의 규칙을 의심하지 않는다. 반칙을 저지르는 선수가 벌을 받을 것이며 심지어 퇴장을 당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기 때문에 치열한 경쟁을 당당하게 치러낸다. 열심히 뛰고 달리는 동안 누구도 특정 대상에게만 유리한 규칙의 적용을 받지는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게임을 유지하게 하고 선수 모두가 최선을 다하게 하는 것이 아닐는지. 

우리 사회는 특히 학교는 게임의 규칙에 대한 믿음을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 아닐까. 경쟁자체를 믿지 못하기보다 규칙을 지켜주어야 할 '심판’에 대한 불신, 게임의 '규칙’에 대한 불신, 그것이 결국은 경쟁이 냉혹한 것이며, 부당한 강요이며 강제라는 그릇된 고정관념에 묶어놓기 시작한 것은 아니었을까. 

당당한 경쟁을 통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경기를 치러내는 선수들에게 우리는 갈채를 보낸다. 그 경기는 아름답다. 경쟁이 아름다운 순간이다. 우리 사회의 경쟁과 fair play를 하는 경기가 다르지 않음에도 우리는 이중 잣대로 경쟁을 바라본다. 그 이유는 앞서 지적했듯 전번반적인 불신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싶다. 

불신의 근원은 또 어디에서 왔을까. 정치권과 정부가 상당부분 원인을 제공했다는 말은 하기도 쉬운 말이고 일견 틀리지 않은 지적일수 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우리 스스로가 상대를 신뢰하지 못하는 불신의 장벽을 치고 있으며 나 자신부터 타인에게 신뢰를 주지 못하는 사회의 일원으로 기능하고 있을지 모른다. '죄수의 딜렘마’는 결국 서로를 믿지 못할 때 서로에게 가장 나쁘게 작용한다는 사실을 떠올릴 필요가 있다. 내가 상대에게 신뢰를 주지 못하면서 상대의 신뢰를 기대한다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가. 

본래 아름다운 경쟁. 인류의 거듭된 진화로 이미 검증되었으며 그 길을 묵묵히 가고 있음에도 우린 그 경쟁을 오해한다. 생물학적으로 뿐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경쟁이 없이는 인류의 생존과 발전이 불가능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음을 뻔히 보면서도 인정하지 못하고 억지를 부린다. 심지어 실하게 맺힌 경쟁의 열매를 따먹고 누리면서도 그 경쟁을 폄훼하고 외면한다.    나부터 다져가는 신뢰구축에 덧붙여 사회적으로 경쟁이 단단히 뿌리를 내릴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올바른 교육을 통해 잃어버린 경쟁의 바른 이름표를 되찾아 주어야 할 것이다. 우리가 사회에서 말하는 경쟁은 남을 제거하고 자리를 차지하는 'zero-sum game’이 아니라 'positive-sum game’으로서 경쟁의 최종목적은 승자를 가리기위한 것이 아니라 다른 구성원의 목적을 효과적으로 달성하도록 도와주는 것이라는 이야기를 새겨야 할 대목이다. 

- 생물학에서는 적자생존의 법칙에 따라 이 되는 영합의 게임이지만 인간사회의 경쟁은 양합의 게임으로서 이런 점이 바로 인간이 다른 짐승과 달리 인간답게 하는 특정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이 때의 치열한 경쟁이란 다른 사람이 아닌 내가 거래 상대방과 협동하기 위한 위치를 확보하기 위해 다른 사람보다 자원을 더욱 효율적으로 활용하려는 최선을 다하려는 것을 의미한다 (김영용).

물론 내가 남과 거래를 위해 협동하는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한 모든 행동이 허용되는 것은 아님 또한 잊어서는 안 된다. 정교하고 공정한 법질서가 전제되지 않는 경쟁은 무질서와 탈법, 약육강식의 아수라장이 될 수도 있음이다. 사실 경쟁에 대한 오해가 이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므로 시장에서의 경쟁은 법의 지배가 뜻하는 정의의 규칙에 따라야하며 정의를 어길 시, 처벌 내지는 퇴출까지 당할 수 있다는 강력한 규칙이 사회구성원 모두에게 합의되어야 할 것이다.

- 사실 상 경쟁이란 것은 도덕적 기초 위에 세워지는 것이다. 타인을 강탈하지 않고 노예처럼 다루지 않겠다는 약속에 기초하며 이것이 지켜지지 못할 경우 시장에서 퇴출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김영용). 

이렇게 개인적인 신뢰구축의 토대를 다지고, 사회적 안전망으로서 복지를 갖춘 상태에서 경쟁의 올바른 의미전달을 교육으로 확대시켜 나간다면 설사 그것이 느린 걸음일지라도 서서히 제자리를 찾아가리란 생각이다. 사회적 상호작용으로서의 경쟁. 우리사회의 발전과 진화를 가져올 가장 강력한 에너지가 온갖 오해와 왜곡으로 폄훼되는 현장에서 그 억울함을 변론(?)하다 보니 사설이 길어지고 말았다. 어쩜 가장 느리지만 가장 확실한 방법은 교육밖에 없음을 믿기 때문이다. 그것이 가장 확실하고 올바른 인성교육이라 믿기 때문이기도 하다. 

  

참고문헌. 신중섭 편저, 경쟁은 아름답다. 북앤피플, 2014

  

조윤희 
부산 금성고등학교 교사 
자유경제원 세상일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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