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우리가 혁명적이라고 부르는 것이 내일에는 보수적인 것이 될 것이다. 우리는 혁명 자체가 아니라 혁명의 이념을 찾고 있다. 우리는 이 혁명의 이념을 보수주의 이념과 결합할 것이다. 우리는 혁명적 이념을 우리의 삶을 회복할 수 있는 상태에 이를 때까지, 혁명적이지만 보수적으로 추구할 것이다.”
-묄러 반 덴 브룩(Arthur Moeller van den Bruck) 「제 3 제국」 中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한 독일은 암울했다. 평화합의안은 독일에게 가혹했다. 전쟁에 대한 비난을 감수해야만 했고 수천 명의 사람들이 가난과 기아에 시달렸다. 유행성 인플루엔자로 많은 사람들이 사망했다. 1926년, 독일이 전쟁 배상금을 지불할 수 없게 되자 프랑스와 벨기에가 전쟁배상금을 대신하여 독일의 자원을 가져갔다. 그것으로 부족하자 독일에서 가장 부유한 산업 지역이었던 루르지방(Ruhr)을 점령했다. 독일의 산업은 나락으로 떨어졌다. 경제는 곤두박질쳤으며 하이퍼인플레이션이 시작됐다. 독일 국민들의 분노와 좌절감은 극에 달했다.
그런 와중에 독일의 저명한 우파 지식인들로부터 독일 국민들이 환영할 만한 주장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들의 주장은 '독일의 패배는 군인들의 책임이 아니라, 전쟁 중에 후방에서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정치 모리배들의 작당으로 인한 패배’라는 것이었다. 그런 주장자들 가운데는 우리에게는 '서구의 몰락’이라는 명저로 잘 알려진 슈펭글러도 있었다. 실제로 독일은 제1차 세계대전이 한 창인 가운데 황제 빌헬름 카이저가 퇴위하는 사건을 맞았다. 사회민주주의자들과 공산주의자들은 '자유’와 '해방’을 내걸고 제국타도에 나섰다. 독일은 이들을 '자유주의자’라고 불렀다. 독일 공산주의 운동의 꽃이었던 로자 룩셈부르크의 영향력도 컸다. 그녀는 전쟁 중에 젊은 노동자 계급을 징병하는 것에 대해 반대했다.
1919년 11월, 독일 카이저 제국이 몰락하고 사회민주당이 의회를 장악해 바이마르 공화국이 들어섰다. 정당들이 난립한 가운데 독일의 우파 지식인들은 의회민주주의를 정면으로 부정하는 주장을 내놨다. 이들의 주장에 의하면 의회민주주의는 독일식 전통을 반영할 수 있는 제도가 아니었다. 당시 산업 후진국이었던 독일에는 영국이나 프랑스처럼 '아래로부터의 혁명’이라는 역사적 경로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들 독일의 우파 지식인들은 독일식 정치체제는 volks라는, 독일 역사와 문화의 공통 기억을 갖고 있는 민족이 중심이 되고, 이들이 기꺼이 따르려 하는 현명하고 도덕적인 엘리트가 지도자로 등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자신의 정치적 개혁 운동을 '보수혁명(Konservative Revolution)이라고 명명했다.이러한 보수혁명의 주창자들은 무엇보다 독일의 자본주의를 비판했다. 모든 것을 사고파는 자본주의가 독일의 전통을 파괴하면서 의회는 이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협잡꾼들의 게임장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한 의회는 독일과 역사적 경험이 다른 영국과 프랑스와 같은 외국의 것이고 이들 나라 의회는 자국에서는 자유와 평등을 외치면서 독일에는 협박과 착취를 일삼는 표리부동하고 타락한 정치집단이라는 비난을 퍼부었다. 따라서 독일에는 '독일식 정치’가 필요하며 의회는 더 이상 필요가 없다는 주장이었다. 이러한 보수혁명론의 주창자들 중에는 앞에서 언급한 슈펭글러 외에 칼 슈미트와 같은 당대의 독일 지성들이 포진해 있었다. 그렇다고 독일의 보수혁명론자들이 과거의 군주제로 돌아가자는 것은 아니었다. 이들은 그런 주장자들을 '반동’이라고 불렀고, 독일은 돌아가야 할 만한 모범적인 정치적 전통이 없기에 공화주의적인 미래로 나아가야 한다고 했다. 그렇기에 '보수’와 '혁명’이라는 서로 부딪히는 두 개의 개념이 결합된 것이었다.
독일 대중들은 보수혁명론에 크게 공감했다. 독일 국민들은 개인주의가 기초가 되는 자본주의 산업화로부터 불안감을 크게 느꼈던 터였다. 이들에게 자유주의는 사회주의만큼이나 불길한 존재였다. 따라서 '민족’이라는 귀속감을 제공한 보수혁명론은 공산주의나 자유주의보다 더 친근하며 매력적인 것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그 열매는 히틀러의 나치당에게 돌아갔다. 여기에 반발했던 보수혁명주의자들은 체포되거나 추방됐다. 보수혁명이 의도하지 않게 나치의 등극에 길을 열어 준 셈이었다.
독일 부흥을 이끈 '질서자유주의’
제2차 세계대전이 다시 독일의 패배로 돌아간 후, 독일에서는 나치에 대한 반성이 일면서 보수혁명자들이 그토록 비난했던 자유주의 정치 세력이 집권했다. 이들 중에는 '라인 강의 기적’이라는 독일 경제부흥에 정치경제적 철학의 토대를 마련한 발터 오이켄(Walter Eucken)이 있었다. 오이켄의 자유주의는 미제스-하이에크의 영미식 자유주의와는 같으면서도 달랐다. 이를 '질서자유주의(Ordo Liberalism)'이라 부른다.
오이켄은 시장과 사회를 경쟁하는 두 질서로 파악했다. 국가는 여기에 공정한 규칙의 제정자이자 시장과 사회 모두에 조정자로서 개입하되 어느 한 쪽을 희생하며 주도할 수는 없다는 원칙을 정당화했다. 오이켄은 국가가 지대를 추구하는 시장의 독점도 견제해야하지만 동시에 정치에서도 자유를 억압하는 정치세력의 독점도 막아야 할 의무가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면 오이켄은 나치 집권기에 자유주의자로서 무엇을 했던가.
오이켄은 조국을 버리고 망명하거나 비겁하게 숨지 않았다. 그와는 반대로 오이켄은 개인적으로 자유와 인권, 그리고 민주주의를 위해 전체주의적, 독재적 정권에 반대하는 활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했다. 오이켄은 본회퍼와 함께 반나치 프라이부르크 저항운동의 핵심인물에 속했다. 오이켄은 고백교회 구성원이었고, 나치의 획일화 정책과 총통원리에 동조한 프라이부르크대학교 총장, 하이데거에 대한 강한 반대자 중 한 명이었다. 오이켄은 나치정부 시기에도 자신의 질서자유주의 입장을 분명하게 표명했다. 그 대가로 오이켄은 유태인이 아니었음에도 유태인에 우호적이라는 이유로 나치 인종법에 따라 차별된 인종집단으로 분류되었다.
오이켄은 나치로부터 수차례 살해 위협을 받았고, 본인 저서 『국민경제 어디로?』 제2판은 출판금지 되었다. 오이켄은 1944년 7월 20일의 히틀러 암살기도사건 실패 후 고문 위협 하에 심문 받았으며 감금되기도 했다. 오이켄의 질서자유주의는 1948년 독일 경제장관인 에르하르트(L. Erhard)의 경제자문위원회의 일원으로 참여하면서 빛을 보기 시작했다. 당시 독일 전후 경제 방향을 놓고 시장경제와 사회주의 사이에서 방황하던 독일 정부에 오이켄의 질서자유주의는 적실한 방향을 제시했던 것. 1975년 당시 경제장관인 프리드리히(H. Fridrich)는 연방의회에서의 연설에서 이렇게 표현했다.
“오이켄을 통해 우리는 모두 어떻게 하는 것이 질서 정책적으로 사고하는 것인지를 배웠습니다. 특히 우리는 그로부터 우리 국민경제를 시장과 자유로운 가격을 통해 분권적로 운영해야 하며 경쟁을 확립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라는 것도 배웠습니다. 우리 독일인이 현재 이룬 업적은 바로 오이켄과 질서자유주의가 끼친 영향과 성과입니다.”
제1차 세계대전 패망 후 사회주의와 함께 자유주의를 비난하며 독일의 민족주의와 국가주의가 결합한 우파의 보수혁명은 독일 대중들을 사로잡았지만 그 결과는 괴물 나치즘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으로 패망한 독일을 부흥시킨 사상은 영미식 자유주의가 아니라 독일식 질서자유주의였다. 거기에는 어쩌면 지적인 독일 보수혁명 주창자들이 정치적 실패에도 불구하고 남긴 하나의 긍정적인 유산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다름 아닌 '독일에는 독일식 정치가 필요하다’이며 '신(神)은 인간을 창조하실 때 거기에 합당한 질서도 주셨다’는 도덕적 성찰일 것이다.
오늘 한국의 보수와 자유주의자들에게 던지는 메시지가 결코 가볍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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