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이 자유와 교류를 넓히면 물론 좋지만
독재로 가는 통일이라면 모두 불행해져요
영화 〈영웅: 천하의 시작〉에서 주인공 무명(이연걸 분)은 이른바 ‘10보 암살’의 귀재다. 열 걸음 안에 있는 상대는 어떤 실수 없이 죽일 수 있다. 진시황은 그런 무림 자객들의 움직임을 감지하고 자신의 주변 100보 안에는 아무도 들이지 않는다. 무명은 천신만고 끝에 진시황의 10보 안으로 접근해 그를 죽일 수 있는 기회를 얻지만 영화의 마지막 순간 암살을 포기하고 만다. 무명은 왜 그런 선택을 했을까?
중국 진나라의 의미
무명은 진시황을 만나러 떠나기 전 오랜 기간 황제를 죽이기 위해 노력해온 파검(양조위 분)을 만난다. 그런데 뜻밖에 파검은 진시황을 암살하려는 무명을 만류한다. 무명이 이유를 묻자 파검은 조용히 모래에 ‘천하’라는 글자를 써 자신의 마음을 보여준다. 통일로 강력한 중국을 건설해야 하니 비록 진시황이 잔인한 독재자라 할지라도 그를 죽여선 안 되며 그를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파검의 뜻이자 이 영화의 감독 장예모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통일은 무조건 좋은 것도, 무조건 나쁜 것도 아니다. 사람의 자유를 넓히고 교류를 늘리는 통일은 좋지만, 자유를 제한하는 통일은 바람직하지 않다. 통일이 시장의 확대 과정을 통해 사람들의 교류를 늘리고 삶을 넉넉히 하는 데 도움을 준다면 경제자유가 높아져 순기능이 크다. 반면, 통일로 인해 대내외적인 경쟁 압력이 감소해 정치경제적 자유가 위축된다면 이는 삶의 질을 떨어뜨려 모두를 불행하게 만들 수 있다.
유럽의 도시국가들
로마 이후 서양 문명권에선 거대한 통일제국이 출현하지 않았다. 유럽의 도시국가들은 더 나은 도시를 만들기 위해 치열하게 경쟁했다. 그래야 더 많은 상인을 자기 도시로 유치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상인들은 치안, 법제, 기업 환경이 좋은 도시를 찾아 끊임없이 이동한다. 경제학에서 말하는 이른바 ‘발로 하는 투표’다. 상인들이 내는 세금은 도시국가의 주요 재원이었고, 많은 경우 도시국가의 지배 집단은 상인들 자신이기도 했다. 이렇게 자유롭게 경쟁하는 도시국가의 품에서 유명한 르네상스가 태동했다.
통일 제국으로 유명한 중국도 원래는 유럽과 사정이 비슷했다. 춘추전국시대 중국을 보면 수많은 작은 나라들로 알록달록한 게 오늘날 유럽 지도와 퍽 많이 닮아 있다. 기원 전후로 500여 년이나 이어진 춘추전국시대는 단순한 분열기가 아니었다. 도가, 묵가, 법가, 유가 등 제자백가라는 사상의 경연장이 열려 철학과 윤리가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인간의 머리에서 나올 수 있는 사상은 거의 다 나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오늘날에도 ‘춘추전국시대’라는 표현은 어떤 분야에 수많은 참가자가 모여 무한 경쟁하는 상황을 비유하는 말로 흔히 쓰인다. 가령 프로 스포츠에서 “이번 시즌은 팀 간 전력이 상향 평준화돼 춘추전국시대가 예상된다”라는 기사가 그렇다. 분열의 시대라고 꼭 부정적인 뉘앙스만 있는 건 아니다.
관료주의와 기업가정신
하지만 그 뒤 중국은 유럽과 다른 길을 걸었다. 위진남북조시대를 끝낸 6세기의 수나라부터 마지막 청나라에 이르기까지 왕조는 바뀌었지만 대륙 전체는 대체로 통일된 체제를 유지했다. 더는 춘추전국시대와 같은 분열의 시대는 오지 않았다. 사상의 자유도 사라졌다. 진시황의 분서갱유가 대표적이다. 진나라 땐 잠시 법가가, 한나라 이후엔 유가가 중국인의 사상을 지배했다.
언뜻 생각하기에 분열이 없으니 사람들이 살기 좋았으리라고 볼 수 있지만 인간의 일이란 게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니다. 중국의 거대한 도시들은 지중해 유럽의 도시국가들처럼 치열하게 경쟁할 필요가 없어졌다. 더구나 도시의 지배자들은 대개 중앙정부가 파견한 직업 공무원이었다. 르네상스 시기 유럽의 도시가 상인들의 기업가정신으로 운영될 때 중국의 도시들에선 관료주의가 득세했다. 근대 이후 서세동점의 역사는 어쩌면 진시황의 천하통일때 예견돼 있었는지도 모른다.
■ 기억해주세요
통일은 무조건 좋은 것도, 무조건 나쁜 것도 아니다. 사람의 자유를 넓히고 교류를 늘리는 통일은 좋지만, 자유를 제한하는 통일은 바람직하지 않다. 통일이 시장의 확대 과정을 통해 사람들의 교류를 늘리고 삶을 넉넉히 하는 데 도움을 준다면 경제자유가 높아져 순기능이 크다.
최승노 자유기업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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