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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족노조의 출현

글쓴이
고광용 2026-05-15 , 그린포스트

삼성전자 노조의 성과급 요구 사태는 단순한 임금협상 갈등이 아니다. 한국 노동시장이 이미 '노동자 대 사용자’라는 단순 구도를 넘어, 노동자 내부의 신분화와 계급화 단계로 접어들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이다. 최근 삼성전자 노사 사후조정은 성과급 산정 방식을 둘러싼 이견 끝에 최종 결렬됐고, 노조는 영업이익 연동형 성과급 확대를 요구해 왔다. SK하이닉스 역시 사상 최대 수준의 성과급 지급 사례로 삼성전자 노조 요구의 비교 기준이 되고 있다.


이제 한국 노동시장은 세 층으로 나뉘고 있다. 최상층에는 삼성전자·SK하이닉스와 같은 글로벌 초우량 기업 노조가 있다. 이들은 이미 높은 임금, 안정된 고용, 압도적 복지, 세계적 기업 브랜드의 수혜를 누린다. 그럼에도 기업의 영업이익 일부를 사실상 당연한 배당처럼 요구한다. 이들은 더 이상 전통적 의미의 '귀족노조’가 아니다. 기업 성과의 상당 부분을 요구하면서도 투자 실패와 경영 리스크는 부담하지 않는, 말 그대로 '왕족노조’에 가깝다.


그 아래에는 대기업·공공부문 중심의 1차 노동시장 노조가 있다. 이들은 기존에 '귀족노조’라 불려왔다. 정규직 보호, 높은 임금, 강한 교섭력, 고용 안정성을 바탕으로 노동시장 내부의 상층부를 형성해 왔다. 특히 공공부문 노조의 요구는 기업 이윤이 아니라 국민 세금과 공공요금으로 귀결된다. 국민이 부담하고 일부 조직노동이 혜택을 가져가는 구조가 반복된다면, 이는 노동권 보호가 아니라 공공성을 앞세운 특권 유지다.


반면 2차 노동시장에 있는 중소기업 노동자, 협력업체 노동자, 비정규직, 청년 구직자들은 '일반 노동자’에 가깝다. 이들에게는 영업이익 몇 퍼센트를 성과급으로 달라는 선택지가 없다. 회사가 이익을 내도 대규모 성과급은커녕 임금 체불과 고용 불안을 걱정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 노조 조직률도 낮고 교섭력도 약하다. 왕족노조와 귀족노조가 성과의 과실을 더 크게 가져갈수록, 일반 노동자들은 더 좁은 문 앞에 서게 된다.


문제는 이 신분화를 누가 조장하고 있느냐는 점이다. 노동운동은 늘 연대와 평등을 말해왔다. 그러나 현실에서 가장 강한 노조일수록 가장 약한 노동자와 연대하기보다, 자신들이 속한 기업의 초과이익을 독점하려 한다. 삼성전자·SK하이닉스 노조의 성과급 요구는 바로 그 모순을 드러낸다. 노동자 전체의 권익을 말하면서 실제로는 최상층 노동자의 몫을 극대화하는 운동이 과연 사회적 정당성을 가질 수 있는가.


왕족노조의 요구는 기업 내부 문제에 그치지 않는다. 대기업 정규직의 과도한 보상 구조는 협력업체 납품단가, 신규채용 축소, 자동화 압력, 소비자 가격, 주주가치 훼손으로 이어질 수 있다. 기업은 성과급 지급 기관이 아니라 글로벌 경쟁 속에서 생존해야 하는 경제 주체다. 반도체 산업은 막대한 선제 투자와 기술 리스크, 경기 변동을 감내해야 한다. 호황기 이익은 나누자면서 불황기 손실과 투자 실패의 책임은 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분배가 아니라 권리만 있고 책임은 없는 특권이다.


더 큰 우려는 노조 간 위계가 고착화된다는 점이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노조가 '왕족’이 되고, 대기업·공공부문 노조가 '귀족’이 되며, 중소기업 노동자는 '평민’처럼 남는 구조가 굳어지고 있다. 노동시장 이중구조를 비판해온 노조가 오히려 그 이중구조를 삼중구조로 심화시키고 있는 셈이다. 결국 노조 스스로가 노동시장 간, 노조 간 신분화와 계급화를 누가 조장하는지 확인시켜주고 있다.


이 문제를 지적하는 것은 노동권을 부정하자는 뜻이 아니다. 정당한 임금교섭과 성과 보상은 필요하다. 그러나 노동권이 특권으로 변질되고, 성과급 요구가 기업의 지속가능성과 노동시장 전체의 공정성을 훼손한다면 사회는 이를 비판해야 한다. 특히 최상위 기업 노조가 약자성을 내세우며 성과의 과실을 독점하려 할 때, 그 피해는 결국 조직되지 못한 다수 노동자에게 돌아간다.


지금 필요한 것은 노동개혁의 관점을 바꾸는 일이다. 사용자와 노동자의 대립만 볼 것이 아니라, 노동자 내부의 격차와 특권 구조를 직시해야 한다. 삼성전자 노조 성과급 요구 사태는 노조가 여전히 약자의 편인지, 아니면 노동시장 상층부의 특권을 지키는 새로운 신분집단이 되었는지를 묻고 있다. 왕족노조와 귀족노조의 기득권은 줄이고, 중소기업·비정규직·청년 노동자의 기회와 이동성은 넓혀야 한다. 노동의 이름으로 특권을 정당화하는 시대는 끝나야 한다. 진정한 공정은 가장 강한 노조의 몫을 키우는 것이 아니라, 가장 약한 노동자의 기회를 넓히는 데서 시작된다.


고광용 자유기업원 정책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