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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마거릿 대처로부터 배울 수 있는 것

글쓴이
라이너 지텔만 2025-10-24

마거릿 대처(Margaret Thatcher)는 10월 13일에 100세가 되었을 것이다. 그녀는 영국 총리로 거의 12년간 복무해서, 그녀를 20세기 최장기 복무 총리로 만들었다. 어떤 다른 정치 지도자도 지금까지 선진 복지 국가를 개혁하기 위해 조세 삭감들, 규제 해제, 그리고 민영화를 그녀가 한 것만큼 급진적으로 집행한 적이 없다. 오늘날, 많은 유럽 나라가 비슷한 도전 과제들에 직면하여, 이 질문이 일어난다: 무슨 조건들이 대처에게 그러한 지대한 영향을 가져올 개혁들을 집행하게 할 수 있었는가?

상당한 시장 경제 개혁들의 기초를 놓기 위해서는, 세 가지 주요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첫째, 상황이 인구의 큰 부문들에 대해 비참하게 되어야 했다. 둘째, 지적 기초 공사가 이미 놓여야 했다−올바른 사상들이 다년의 기간 여론 지도자들에 의해 보급되어야 했다. 그리고 오직 그때에만−셋째−카리스마적 정치인이 기회를 지닌다. 이것은 하비에르 밀레이(Javier Milei)가 선출되기 전 아르헨티나에서 그러했고 그것은 영국에서 대처가 권좌에 오른 동안에도 똑같았다.

대처가 취임하기 전에, “민주적 사회주의(democratic socialism)”의 실험은 그 나라를 거의 나락의 끝으로 몰았었다. 인플레이션은 27퍼센트로 치솟았었고, 최고 소득자들에 대한 세율은 83퍼센트에 달했었으며, 상당한 자본 소득들을 가진 사람들은 98퍼센트의 최고 세율로 세게 맞았다. 고용인들의 30퍼센트가 국유 회사들에서 일했고, 생산성이 침체했으며, 국가 부채는 계속해서 상승했다. 1979년에, 광업같이, 대개 이익 없는 산업들에 대한 정부 보조금들은 총계 £46억(오늘날의 £290억과 같다)에 달했다. 결국, 영국 정부는, 전형적으로 개발 도상국들에 도움을 제공하는 조직, 국제 통화 기금(International Monetary Fund; IMF)으로부터 도움을 머리를 조아리며 부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것은 자부심 강한 영국인들에게 치욕이었다. 급진적인, 공산주의자 지배 노동조합들이 그 나라를 확고히 장악했다. 1970년대에, 매년 2,000건 이상의 파업이 발생하여, 평균 거의 1,300만 작업 일수의 비용이 들었으며 1979년에는 거의 3,000만으로 상승하였다.

대처는 자기의 사명이 한 움큼의 개혁을 넘어 확대된다는 점을 이해했다−그녀는 사상들의 투쟁에 종사했다. 그녀의 전기 작가 찰스 무어(Charles Moore)는 쓴다, “그녀가 지적으로 정연한 생각을 지니고 있지 않았고, 그녀가 독창적인 생각을 지니고 있지도 않았다. 자기 자신의 사상들을 전개하기보다, 그녀는 다른 사람들의 사상들에 대한 일종의 ‘여배우를 사귀려고 극장에 자주 가는 남자(stage-door Johnny)’였다.” 학생 때, 그녀는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폰 하이에크(Friedrich August von Hayek)의 사회주의 예측, ≪농노의 길(Road to Serfdom)≫로 감명을 받았었다. 정책 연구 센터(Centre for Policy Studies), 애덤 스미스 연구소(Adam Smith Institute), 그리고 경제 문제 연구소(Institute of Economic Affairs; IEA) 같은 친자본주의 싱크 탱크들이 그녀의 사상들을 형성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1975년부터 1979년까지 야당 지도자로서, 대처는 자주 IEA 행사들에 참가했고 그 싱크 탱크의 간행물들을 읽었다. 그녀가 하이에크 및 밀턴 프리드먼(Milton Friedman)과 개인적으로 알게 된 것도 또한 IEA를 통해서였다. 1979년 그녀의 첫 선거 승리 후, 그녀는 IEA가 “우리 승리를 가능하게 한 여론 분위기”를 창출한 공이 있는 것으로 말했다. 애덤 스미스 연구소, 그리고 그것의 회장 매드센 피리(Madsen Pirie)는, 그녀의 광범위한 민영화 프로그램을 포함하여, 그녀의 개혁들에 대해 청사진을 제공했다.

대처가 권좌에 오르는 문을 연 것은 이 두 전제 조건, 즉 경제 환경, 그리고 싱크 탱크들이 놓은 지적 기초 공사였다. 그녀의 주요 공헌은 올바른 사상들을 흡수하고 효과적으로 의사 전달하는 능력이었다. 덧붙여서, 로널드 레이건(Ronald Reagan)과 밀레이처럼, 그녀는 홍보 활동과 자기 홍보에 뛰어났다. 촬영자들과 보도진을 마거릿 대처만큼 능숙하게 다룬 영국에서 유일한 다른 공공 인물은 다이애나 공주(Princess Diana)였다.

민영화는 그녀의 두 번째 임기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250,000명 고용인을 가진 회사, 브리티시 텔레컴(Bristish Telecom; BT)이 증권 거래소에 상장되었다. 이것은 그 당시 세계에서 신규 상장(IPO; initial public offering)이었고, 200만 영국인이, 그들 중 거의 반은 전에 주식들을 소유해 본 적이 전혀 없었는데, BT 주식들을 샀다. 대처 정부 치하에서, 주식들을 소유한 영국인들의 백분율은 7퍼센트에서 25퍼센트로 올랐다. 사회 임대 주택 단위들(social rental housing units)은 지방 자치 단체들이 세입자들에게 팔려고 내놓았다. 이 정책은 백만 임차인들을 가구주들로 바꾸었다. 그러나 이 경우 이 국유 주거들을 전문적으로 관리되는 민간 주택 회사들에 팔거나 그것들을 증권 거래소에 상장하는 것이 더 나았을지 모른다. 영국에서 민영화 성공은 매우 널리 알려져서 그것은 다른 나라들에 강력한 본보기가 되었고 세계적인 민영화 물결을 유발했다. 자기의 자서전에서, 대처는 자기가 더욱더 많은 회사를 민영화하고 싶었을 것임을 인정했지만, 다음을 부언했다: “나의 임기 아래 영국은 사회주의의 전진 행진을 역진시키는 첫 번째 나라였다. 내가 공직을 떠났을 때까지는, 국유 산업 부문은 약 60퍼센트만큼 감소했었다. 인구의 약 네 명 중 한 명이 주식들을 소유했다. 60만 개 이상 일자리가 공공 부문에서 민간 부문으로 넘어갔었다.”

그녀는 또한 1983년 3월과 1990년 3월 사이 영국에서 창출된 332만 개 새 일자리에 대한 공의 많은 부분을 인정받을 수도 있었다. 1976년에, 영국은 국가 파산의 직전에 있었었다; 1978년까지는, 그 나라의 예산 적자는 국민 총생산의 4.4%였다(그 당시 독일에서 2.4%와 비교된다). 10년 후, 1989년에, 영국은 1.6퍼센트의 예산 흑자를 게시했다. 1980년에 GDP의 54.6퍼센트였던 국가 부채는 1989년까지는 40.1퍼센트로 떨어졌었다.


라이너 지텔만(Rainer Zitelmann)은 역사학자이자 사회학자이고, ≪부유한 자본주의 가난한 사회주의(The Power of Capitalism)≫ (링크), ≪반자본주의자들의 열 가지 거짓말(In Defense of Capitalism)≫ (링크), 그리고 ≪국가들이 가난에서 벗어나는 방법(How Nations Escape Poverty)≫(링크)의 저자이다.
번역: 황수연(전 경성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