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트 디즈니, 꿈과 상상력의 원형을 제시하다

곽은경 / 2017-09-05 / 조회: 30,976


cfe_한국의기업가_17-72.pdf


전 세계 아이들은 아이곰 '푸’가 그려진 기저귀를 차고, 아기 돼지 '피글렛’이 그려진 그릇에 밥을 먹고, '미키 마우스’ 캐릭터 티셔츠를 입고 자란다. 그들이 글자를 읽을 수 있는 나이가 되면 백설공주, 이상한 나라 앨리스, 피터팬, 피노키오와 같은 그림책을 읽기 시작한다. 또 가족들과 <인어공주>, <미녀와 야수>, <알라딘>과 같은 영화를 보기 위해 극장을 찾기도 한다.

그렇게 자란 아이들이 성인이 되어 가정을 꾸리고 아이를 낳으면 그 아이에게 디즈니 캐릭터가 들어가 있는 물건을 사주고, 디즈니 동화책을 읽어주기 시작한다. 그리고 아이와 함께 <라이온킹>, <토이스토리>를 관람하기 위해 극장을 찾는다. 이런 현상은 세대를 두고 반복된다. 하루에도 수십 개의 문화 콘텐츠들이 쏟아져 나오는데 디즈니와 같이 오래 사랑을 받는 경우는 드물다.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한 사람이 바로 월트 디즈니다. 그는 인류의 문화자산을 상품화 했고, 이를 통해 전 세계 사람들이 꿈을 꾸고 상상력을 키우며 보편적인 정서를 공유할 수 있게 만들었다. “이 모든 것은 생쥐 한 마리에서 시작됐다.” 


미키 마우스 시대를 열다


오늘의 월트 디즈니를 있게 한 '미키 마우스’ 캐릭터는 그가 가장 힘들고 처절했던 순간에 기적같이 탄생했다. 그의 스튜디오에서 일했던 애니메이터들과 투자자가 그를 따돌리고 그의 흥행작인 '오스왈드’를 가로채며 배신을 했다. 그는 한순간에 캐릭터에 대한 저작권도 빼앗기고, 직원, 투자자를 잃고 빈털터리가 되었다. 그러나 “참담한 실패가 때로는 가장 좋은 묘약이 될 수 있다.”는 말을 자주 하곤 했던 그는 절망하지 않았으며 최고의 애니메이터가 되겠다는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월트 디즈니는 분노와 배신감에 몸서리치며 집으로 돌아가던 기차 안에서 오스왈드를 대체할 캐릭터를 구상하기 시작했다. 주변에서 늘 봐왔던 생쥐로 새로운 캐릭터로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가 차린 스튜디오가 늘 재정난에 시달렸기 때문에 숙식을 사무실에서 해결할 때가 많았다. 이때 사무실 구석을 돌아다니던 쥐를 자주 목격했고 때때로 쥐들에게 먹이를 주며 키우기도 했다. 월트 디즈니는 쥐들의 움직임을 눈여겨봤었는데, 이때의 경험을 되살린 것이다.


동료였던 어브 아이웍스의 도움을 받아 동글동글한 얼굴에 가늘고 긴 팔다리를 가진 생쥐 '미키 마우스’가 탄생했다. 그리고 1927년 대서양을 단독 비행한 찰스 린드버그의 성공스토리에 착안해 <미친 비행기>의 시나리오를 만들고 주인공으로 '미키 마우스’를 등장시켰다. 


월트 디즈니는 애니메이션으로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하고 싶었다. 기존의 애니메이션과 차별화하기 위해 새로운 기술을 도입했다. 최초의 유성영화 <재즈싱어>가 흥행에 성공하자 여기에 착안해 최초로 유성 애니메이션 <증기선 윌리>를 제작했다. 이미지에 단순히 소리를 입히는 수준이 아닌 그림과 소리가 동시에 움직여 생생하게 살아있는 느낌을 제공했다. 


관객들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미키 마우스는 <증기선 윌리>가 상영된 지 3주 만에 3만여 통의 팬레터를 받을 정도로 스타가 되었다. 이때부터 미키 마우스가 그려진 상품들이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미국 전역에 미키 마우스 클럽이 생겨났는데 그 수가 걸스카웃, 보이스카웃을 합친 것보다 많았다. 과히 1930년대는 미키 마우스의 시대라고 불러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렇게 월트 디즈니는 '오스 왈드’를 빼앗긴 지 1년 만에 보란 듯이 재기에 성공했다.


애니메이션의 역사를 새롭게 쓰다


미키 마우스를 제작한 이후 10년간 월트 디즈니는 세계 애니메이션의 역사를 혼자 새롭게 써갔다. 삼도인쇄법이 개발되자 최초로 컬러 애니메이션인 <실리 심포니> 시리즈 '꽃과 나무’를 제작했다. 흑백영화의 시대가 가고 칼라 영화시대가 오고 있다고 판단하자, 흑백에 비해 3배나 비싼 컬러 애니메이션에 과감히 투자한 것이다.


그리고 <아기 돼지 삼형제>를 통해서 살아있는 생생한 이미지를 추구하기도 했다. 적절한 명암과 부드러움을 나타내는 기법을 통해 사실적이지 않으면서, 그렇다고 노골적으로 만화같이 보이지 않은 애니메이션을 제작했다. 월트 디즈니는 이전까지는 단순히 움직이는 그림에 불과했던 애니메이션에 “마침내 진정한 퍼스낼리티를 담아냈다.”고 기뻐했다.  


특히 이 작품은 대공황과도 연결된다. 1929년 10월 주식시장이 붕괴되자 미국 전체가 불황에 휩싸인다. 관객들은 <아기 돼지 삼형제>의 막내 아기 돼지를 통해 철저히 준비만 하면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는 희망을 확인하게 됐고, '누가 나쁜 늑대를 무서워할까? Who's afraid of the Big Bad Wolf?’ 삽입곡이 국민적 인기를 끌기도 했다.


한편 당시 애니메이션은 8분 정도의 분량으로 실사 영화 앞부분에 흥미를 끄는 요소로 주로 사용됐다. 누구도 10분 이상 애니메이션에 집중할 수 없다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모두의 편견을 깨고 월트 디즈니는 80분짜리 장편 애니메이션 <백설공주>를 기획한다. 재미만 강조하면 됐던 단편과 달리 장편은 스토리, 내러티브, 캐릭터의 특성을 잘 살려야 했다. 이를 위해 업계 최초로 스토리 보드만 따로 만드는 직원을 채용했다. 


4년간 난쟁이 7명의 이름을 하나하나 정하고, 그들의 캐릭터를 설정했다. 25만 장의 애니메이션을 제작하고 촬영한 끝에, 1937년 <백설공주>를 개봉할 수 있었다. 10개 언어로 49개국에 상영될 정도로 인기가 높았으며, 실사 영화의 관객 수를 훌쩍 뛰어넘었다. 영화 개봉 5개월 만에 디즈니는 영화 제작을 위해 빌렸던 대출금을 모두 갚을 수 있을 정도였다. 


전래동화를 상품화하다


문화콘텐츠의 성공비결은 대게 보편성과 특수성으로 정의되는데 디즈니의 애니메이션도 이러한 성공방식에 부합한다. 월트 디즈니는 오랜 세월이 지나도 다시 볼 수 있는 작품을 만들기 위해 관객들에게 익숙한 고전, 전래동화의 스토리를 사용했다. 누구나 아는 보편적인 스토리를 상품화했고, 전 세계로 유통시켜 큰 수익을 거두었다. 


새로운 기술로 혁신을 계속하며 경쟁자들과 차별화하는 '특수성’ 역시 디즈니가 세대를 거듭하며 어린이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비결 중의 하나다. 그가 만든 <운 좋은 토끼 오스왈드>는 실사와 애니메이션이 결합하지 않고 100% 애니메이션으로 제작한 최초의 작품이었다. 이후 '미키 마우스’를 시작으로 최초의 애니메이션 유성영화, 컬러영화, 장편영화를 시도하며 경쟁자들이 따라올 수 없는 애니메이션을 제작한다. 


관객을 즐겁게 하기 위해 과장된 몸짓을 강조하는 만화에 불과했던 애니메이션은 월트 디즈니 이후 캐릭터와 내러티브와 감정을 강조하는 예술로 인정받을 수 있게 되었다. 또 실사영화와 다른 새로운 대중문화 장르로도 인정받을 수 있게 됐다.


성공을 위한 몰입과 완벽주의


월트 디즈니는 어릴 때부터 에니메이터가 되기를 꿈꿨다. 그는 꿈을 이루기 위해 집요하리만큼 그림 그리는 것에 몰입했다. 가난한 집안환경과 엄격하고 보수적인 아버지 때문에 농사일을 거들거나 신문배달을 하며 학창시절을 보내야 했다. 그러나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연필을 잡기 시작하면서부터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어떤 시련이 와도 시간만 나면 그림을 그렸다. 그의 눈빛은 매우 강렬했고 때로는 눈을 마주치기 무서울 정도였다는 평가도 있다. 그의 가족들은 “뭐든 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 달성할 수단이 있거나 없거나 재지 않고 무작정 뛰어들었다.”고 회고하기도 한다.


그의 집요함은 그가 제작한 애니메이션에도 그대로 반영된다. 그는 유성 애니메이션에 푹 빠졌다가 컬러 애니메이션에 빠져들었다. 제작비용과 시간이 얼마가 들더라도 최고의 작품을 만드는 생각만 했다. 밤낮 장소를 가리지 않고 애니메이션의 스토리만 생각했고 수차례 회의를 거쳐야 다음 장면으로 넘어갈 수 있었다.  


그는 완벽한 작품을 위해 최고의 직원을 채용했다. 또 사내에 미술학교를 열어 직원들을 교육시키기도 했다. 이것이 디즈니가 다른 경쟁사들보다 항상 앞설 수 있는 비결이었다. 경쟁사 워너 브라더스의 경우 만화영화 한편에 감독, 작가, 레이아웃맨 단 3명이 투입되는데 반해 디즈니는 단편영화 하나에도 여섯 명의 작가와 개그맨을 투입했다. 애니메이터를 키 애니메이터-인 비트위너-어시스턴트로 세분화하는가 하면, 레이아웃 아티스트, 조명 필터작업, 특수효과 책임지는 이펙트 애니메이터 등 각 단계를 전문화 했다. 이후 이것이 애니메이션 산업의 표준이 된다. 


그는 직원들도 자신과 같이 애니메이션에 몰입하기를 바랐다. “강한 자는 살아남는 반면 무능한 사람은 낙오한다는 것은 만고의 진리다. 그 어느 것도 이 진실을 달라지게 만들 수 없다”고 말하며 성과급제를 적극 활용했다.


한편 현재의 성공에 안주하지 않았다. <아기 돼지 삼형제>의 성공 이후 속편을 만들라는 주변의 권유에 “돼지 위에 돼지를 얹지 마라! 안일하게 전편의 성공에 기대어 요행을 바라지 말라.”고 답하기도 했다. 그는 쉽게 돈을 버는 방법도 많았지만 끊임없이 도전하고 노력하는 길을 택했다.


이러한 삶에 대한 집중력은 투자한 애니메이션이 실패했을 때도, 한시 바삐 그 영화에 대한 생각을 털어내고 신경을 끊게 만든다. 물론 작품이 성공했을 때도 더 이상 나아질 기미가 없는 상황이 되면 이내 관심을 다른 곳으로 옮긴다. 애니메이션 시장에서 최고의 자리에 오르자 월트 디즈니는 애니메이션이 아닌 전혀 다른 곳으로 눈을 돌렸다.


디즈니랜드, 상상을 현실화하다


애니메이션이 성공궤도에 오르자 이에 대한 관심이 시들해졌다. 월트 디즈니는 우연히 시카고에서 열리는 철도 박람회에 갔다가 기차의 매력에 빠진다. 그는 애니메이션에 쏟던 모든 열정을 기차 부품을 사서 조립하는 데 쏟았다. 새로운 집을 물색할 때도 철도 트랙을 놓을 수 있는 곳으로 고를 정도였다. 


그는 놀이공원 안에 어릴 때 살던 마을을 재현하고, 그 안을 기차를 타고 다니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두 딸들을 데리고 자주 갔던 놀이공원이 더럽고, 따분했으며, 탈것, 게임, 쇼 등 여러 가지를 섞어놓은 잡탕밥 수준이었다는 것을 기억했다. 단순히 오락거리를 넘어서, 자신의 작품들이 몽땅 등장하는 상상 속의 공간을 현실화하겠다는 계획을 세운다.


세상을 놀라게 하고 사람들을 즐겁게 할 만한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겠다는 월트 디즈니의 열정은 애니메이션에서 테마공원으로 옮겨가며 점점 원대해지고 더 뜨거워졌다. 디즈니 공원은 그의 새로운 꿈이 되었다. 기차의 매력에 빠진지 1년 만인 1952년, 월트 일라어스 디즈니의 약자를 딴 WED 엔터프라이즈를 설립했다. 직원들에게 전통적인 놀이공원과 차원이 다른 곳을 만들 것을 요구했으며, 직원들을 상상력을 갖춘 기술자라를 의미로 이매지니어라고 부르기도 했다.


디즈니랜드는 1954년 공사를 시작해 1955년 7월 17일 개장했다. 3천 명의 인부가 목재 6천 미터를 사용하고 4,000세제곱 미터의 콘크리트를 쏟아 붓고, 아스팔트 3만 3,000제곱미터를 깔았다. 그리고 월트 디즈니는 개장 당일 아침까지 디즈니랜드 곳곳을 직접 페인트칠을 하며 밤을 새웠다. 그는 “간절히 바라면 마음먹은 일은 끝까지 해야 한다. 생각에 그치지 말고 실천해야 한다.”며 모두의 반대를 이겨 내고 디즈니랜드를 현실화시켰다.


디즈니랜드의 모토는 '꿈이 이루어지는 곳(Where Dreams Come True)’이다. 입장하는 순간부터 외부와 철저히 단절되며, 고민, 스트레스, 현실을 모두 잊고 환상의 세계에 빠져들게 만든다. 디즈니랜드 직원들에게 소비자는 공연의 관객이다. 그들은 완벽한 공연을 위해 공원 안을 쓰레기 하나 없이 깨끗하게 만들었으며, 늘 새로 페인트를 칠한 느낌이 들게하고, 왁스로 반들반들 윤을 냈다.


디즈니랜드가 미국인들에게 큰 사랑을 받았던 것은 그 속에 전형적인 미국이 녹아있기 때문이다. 20세기 개척의 시대를 살았던 전형적인 미국인의 생활상, 즉 '자랑스러운 과거’와 월트 디즈니가 창조한 캐틱터들, '찬란한 미래’를 한번에 보여줌으로써 미국인들에게 친숙하게 다가갔다. 미국인들에게 디즈니는 전형적인 미국의 상징이라고 느낀다. 디즈니화 Disneyfication, Disneyzation이라는 용어까지 등장하며 미국 대중문화의 아이콘이 되었다.

 

엔터테인먼트 비즈니스 최고 경영자


월트 디즈니는 대중을 사로잡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정확하게 알고 있는 경영자였다. 그는 직원들에게 “사람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파악해 그들이 사용할 제품을 만들어야 한다.”라는 말을 자주 했다. 미키 마우스가 인기를 끌자 부모들이 악동 이미지를 우려했고, 월트 디즈니는 시리즈를 거듭할수록 미키 마우스를 얌전한 이미지로 변화시켰다. 또 그것이 너무 재미없다는 평가를 반영해 미키 마우스 대신 웃음을 줄 악동 '도날드 덕’을 등장시키기도 했다.


그는 스튜디오, 미디어 산업, 놀이공원, 캐릭터 상품을 디즈니라는 단일 기업으로 묶어낸 최초의 인물이다. 특히 1930년대 중반 등장한 텔레비전에서 새로운 기회를 발견했다. 영화 제작자들은 TV가 관객을 빼앗아 간다고 분노했지만, 그는 TV가 영화를 보완해줄 수 있다고 믿었다. 자신의 영화를 홍보하기 위해 TV를 적극 활용했다. ABC 채널을 통해 과거 단편 애니메이션과 몇 개의 고정물로 1시간 분량의 <미키 마우스 클럽>, <디즈니랜드> 등의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온 가족이 볼 수 있는 최초의 텔레비전 프로그램으로, 새로 개봉할 영화를 소개하고 디즈니랜드에 대한 홍보도 했다.


시청자들은 디즈니 애니메이션을 TV로 보는 것에 흥미로워 했다. 시청률은 50%까지 기록했고 재방송도 큰 인기를 끌었으며, 프로그램을 진행했던 월트 디즈니도 스타덤에 올랐다. ABC가 NBC, CBS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방송사로 자리매김한 것도 디즈니 콘텐츠의 힘이라고 볼 수 있다. 월트 디즈니는 헐리우드와 텔레비전의 관계를 새롭게 썼다. 


TV 프로그램의 성공은 디즈니랜드 건설, 애니메이션 제작 등의 재원 마련에도 큰 도움이 되었다. 애니메이션이 고비용 구조이기 때문에 수익을 크게 낼 수 없었고 자금이 늘 부족해 은행의 대출을 받아왔다.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활용해 디즈니랜드에 투자할 방송사나 기업후원자를 찾았다.


또 문화콘텐츠의  원 소스 멀티 유즈(One Source Multi Use)의 특성을 적극 활용해 수익을 창출했다. 디즈니사는 핵심 사업분야인 스튜디오, 미디어 산업, 놀이공원 뿐 아니라 디즈니 컨슈머 프로덕트을 통해 캐릭터 상품을 판매하고 있다. 디즈니 캐릭터는 TV, 영화, DVD, 동화책, 놀이공원, 등 여러 상품으로 끊임없이 유통되고 판매된다. 이는 영화 수입을 능가한다. 한 예로  블룸버그 통신에 따르면 '위니 더 푸’의 경제적 가치를 150억 달러로 집계하는데 이는 삼성의 127억 달러 보다도 높다. 김지영, 월트 디즈니(살림 지림지식총서), 살림, 2009.

 


미국 대중문화의 상징


디즈니의 애니메이션은 주인공이 역경에 부딪히지만 주변의 적절한 도움과 본인의 노력으로 이겨낸다는 기본적인 줄거리는 유지한다. 해피엔딩과 교훈적 메시지를 빼놓지 않는다. 이러한 내러티브 구조 덕에 디즈니 애니메이션은 품위와 건강함을 강조한 건전한 가족오락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이를 두고 평론가들은 월트 디즈니와 그의 작품은 미국인의 원형(An American Original)을 상징한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즉 전형적인 백인, 중산층을 기반으로 보수주의적인 면모를 보인다는 것이다. 실제 월트 디즈니는 두 딸을 매일 아침 학교에 등교를 시켜주는 자상한 아버지였으며, 두 딸의 영향을 받아 디즈니랜드를 기획하기도 했다. 직원들을 칭할 때도 “MY BOY”라는 표현을 하며 가족을 강조했다.


그리고 전 세계로 팔려가는 디즈니의 캐릭터 상품의 판권을 판매할 때도 보수적인 원칙을 적용한다. '창의적이고 혁신적인 방식으로, 일정 수준 이상의 품질을 충족해야 하며, 전 세계 누구라도 공감하며, 지역사회에 공헌할 수 있고, 긍정적인 가치를 제공하며, 믿고 보며 즐길 수 있는, 유해요소가 없는 콘텐츠를 생산해야 한다.’는 원칙이다. 


디즈니는 세계 최초, 최대 기업이자 코카콜라, 맥도날드, 마이크로소프트, 구글, 나이키 등과 함께 미국적 문화의 상징이 되었다. 


참고문헌

닐 개블러, 월트 디즈니-미국적 상상력의 승리, 여름언덕, 2008.

김지영, 월트 디즈니-살림지식총서, 살림출판사, 2009.

신진, 만화 영화의 제왕-월트 디즈니, 한국헤밍웨이

김현태, 내사랑 미키 마우스-월트디즈니, 한국톨스토이 



곽은경 / 자유기업원 기업문화실장



       

▲ TOP

NO. 제 목 글쓴이 등록일자
월트 디즈니, 꿈과 상상력의 원형을 제시하다
곽은경 / 2017-09-05
곽은경 2017-09-05
67 어른도 아이로 만드는 모두의 장난감, 레고
김규태 / 2017-02-10
김규태 2017-02-10
66 유니클로, 혁신으로 상식을 깨다
송영출 / 2017-02-03
송영출 2017-02-03
65 질주하는 페이스북, 마크 주커버그의 영리한 선택
이근미 / 2017-01-24
이근미 2017-01-24
64 베네통: ‘컬러(color)’로 세상을 매혹하다
김인영 / 2016-12-23
김인영 2016-12-23
63 가진 것 하나 없는 흙수저(?) 신격호가 일군 한·일 모두의 기업 ‘롯데’
윤서인 / 2016-12-16
윤서인 2016-12-16
62 사양산업 ‘가발’을 성장산업으로: 하이모 홍인표 회장
김우철 / 2016-12-09
김우철 2016-12-09
61 삼성을 세계적 기업으로 만든 이건희: 전자, 반도체, 스마트폰으로 세계를 매혹하다
김인영 / 2016-12-02
김인영 2016-12-02
60 빌 게이츠는 세상 사람을 가장 많이 도와준 사람
최승노 / 2016-11-18
최승노 2016-11-18
59 쥬씨(Juicy), 생과일주스계의 혁신트리오로 소비자의 마음을 훔치다
김우철 / 2016-10-28
김우철 2016-10-28
58 고통스러운 이삿날을 통째로 바꾸다 -통인익스프레스 김완규-
윤서인 / 2016-10-21
윤서인 2016-10-21
57 최고의 결혼정보업체를 소개해 ‘듀오’
이웅희 / 2016-10-14
이웅희 2016-10-14
56 콘텐츠로 세상을 바꾸다 -CJ E&M ‘김성수’ 대표-
곽은경 / 2016-09-09
곽은경 2016-09-09
55 세탁기의 장인, LG 조성진 사장
박기성 / 2016-08-19
박기성 2016-08-19
54 포항제철의 탄생, 기업가정신으로 대한민국을 살리다 -POSCO, 박태준 회장-
김상겸 / 2016-08-12
김상겸 2016-08-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