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날이 왔다. 1995년 대학 2년생인 나를 깜짝 놀라게 했던 기업. 어엇? 이게 뭐지? 너무나 신기하고 처음 보는 풍경에 놀라면서 하나하나 뜯어보고 살펴보고 감탄했던 21년 전 그 감정을 다시 되살릴 수 있는 날이 왔다. 1995년 봄, 학창시절 내내 살았던 오랜 대치동 생활을 끝내고 잠실로 이사 가는 날, 우리 집에 우르르 들어오던 칼 같은 제복을 입은 아저씨들, 호랑이 로고가 그려 있던 거대한 트럭들, 예쁘고 깔끔한 상자들, 쫙쫙 떼어 붙이던 주황색 테이프에도 선명하던 호랑이 로고와 그 옆에 무슨 독특한 디자인 타이포였던 글씨, 바로 ‘통인 익스프레스’다. 선명하게 떠오르던 그 날로 돌아간다.
필자는 강남 토박이다. 지금이야 강남이 뭐 비싼 동네니 뭐니 하지만 그땐 별로 그런 것 없었다. 그냥 강남은 내 어린 시절의 추억이 어린 동네일뿐이다. 지금은 많은 것이 변해서 좀 낯설어졌지만 아직도 내가 뛰어 놀던 흔적들과 추억이 구석구석 남아 흐르는 정겨운 동네. 태어나 젖먹이 시절을 용산에서 보내고, 1980년 강남 개발 및 이주 붐을 타고 역삼동 개나리아파트로 이사 오면서 우리가족의 강남 생활이 시작 된다.
이상하게 우리 집은 ‘코앞 이사’를 많이 다녔다. 역삼동 개나리 아파트에서 인근 대치동 쌍용아파트로, 그 옆 우성아파트로, 다시 쌍용아파트로, 또 다시 우성아파트로. 마치 메뚜기가 뛰듯이 짧은 기간에 집중적으로 왔다갔다 이사를 다녔다. 지금 생각해 보면 집을 옮길 때 마다 평수가 넓어진 걸로 봐서 부모님의 재테크였던 것 같은데 자세한 것은 모르겠고, 이사가 잦으니 전학도 잦고, 새로 지은 학교에서 개교 기념식만 두 번 치렀던 정신없던 초등 시절. 가장 강렬하게 기억나는 건 이사라는 건 참 피곤했다는 것…….
일단 이삿날이 잡히면 그 때 부터는 집은 마치 폭격을 맞은 것처럼 모든 살림살이들이 다 쏟아져 나오고 발 디딜 틈도 없이 변한다. “아아 또 이사야…….” 아침에 학교 갈 때 어머니는 “야 너 올 때 여기로 오면 안 된다! 새로 이사 가는 집으로 와라!” 학교 끝나고 열심히 두리번거리면서 낯선 길로 귀가를 하던 기억들. 그 동네가 그 동네라 한번 씩 헷갈려서 전에 살던 집으로 간 적도 있고, 열쇠가 자주 바뀌다 보니 내 몫까지 돌아오는 열쇠가 없어 일찍 귀가할 경우 소화전을 뒤지다 그냥 이웃집 아주머니에게 발견 돼 그 집에서 밥을 먹고 그랬던 시절.
그 때 이사는 당연히 용달차 이사였다. 전화를 받은 2424 전화번호의 러닝셔츠 차림의 시커먼 아저씨가 집으로 들어온다. 아저씨의 땀내와 발 냄새가 코를 찌른다. 휘 휘 둘러본 아저씨는 엄마와 흥정을 시작한다. “이 정도면 얼마는 주셔야지~” “에이 아저씨 저거 다 가벼워요~” 티격태격 둘 사이에 얼마나 치열한 흥정이 벌어지는지 모른다. 아저씨가 가고 나면 그 때부터 바로 집안 살림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한다. 포장 할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에 이삿날은 꽤 여유를 두고 잡는다. 당연히 포장은 모두 엄마의 몫이다. 엄마는 이삿날까지 매일매일 짐을 싸고 또 쌌다. 이사 업체는 큰 가구, 냉장고 정도만 운반해 주고 끝이기 때문에 모두 엄마가 해야 했다. 우리도 당연히 도와야 했다. 과자 이름이 써진 상자엔 각각 세 남매의 이름이 매직으로 쓰여 있었고 여기에 장난감, 학용품, 책 등등을 열심히 구겨 넣었다.
부엌의 가동이 중단되다 보니 이삿날까지 식사는 주로 짜장면 아니면 라면이었다. 짐으로 빼곡한 집 틈에서 대충대충 잤다. 이삿날 까지 일주일 동안에도 필요한 것들은 계속 나온다. 갑자기 봐야 할 책이나 필요한 물건을 꺼내려 다시 또 이삿짐 싸놓은 상자들을 뒤진다. “에이 이사 가면 그때 꺼내기로 하자“ 하며 참아야 하는 물건들도 생긴다. 입고 씻고 먹고 자는 모든 것들이 이사를 가는 순간까지 매우 불편해져서 이사 스텐바이를 하는 집에는 들어오기도 싫었다.
그리고 이사 당일 아침에 아저씨들이 온다. 처음에 오면 꼭 타박을 한번 한다. “에이 짐 별로 없다더니 엄청 많으시네요~” “아이고 여기도 좀 더 이렇게 싸시지~” 우리 집 일이 유난스럽게 어려운 케이스라는 걸 일단 강조하고 시작한다. 그리고 이 아저씨들은 마치 약속이나 한 듯이 꼭 일을 하다가 “에이~ 이건 빠져나가기가 너무 힘드네요~” “아휴 이건 도저히 안 되겠는데요?” 이런 소리를 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면 엄마는 웃돈을 또 얹어 준다. 뭔가 계속 눈치 보이고 아저씨들이 상전이다. 때 되면 식사도 대접해야 하고, 혹시 우리 짐을 다칠까 신경 써서 잘 다뤄달라고 전전긍긍이셨다.
당시 재밌는 것은 “아이고 그 집이 이사래?” 하면서 괜히 삼촌이나 친척들이 뭐라도 돕는다고 찾아와 하얀 면장갑을 끼고 함께 짐을 나른다. 어머니도 손에 들리는 짐들은 우리 차에 열심히 실으셨다. 점심 짜장면은 물론 이사가 끝나면 저녁 식사로 삼겹살을 또 대접해야 했다.
학교가 쉬는 날일 경우 짐을 가득 실은 이삿짐 트럭에 아이들을 올려 태웠던 기억도 난다. 큰 트럭은 운전석 뒷자리가 있었다. 우리는 거기에 타고 아저씨들은 막 트럭 짐칸에 위태롭게 올라탔다. 엄마 역시 짐을 가득 실은 차(르망)를 몰고 트럭을 따라 오셨다. 새로운 집으로 옮기는 순간 이미 탈진 상태지만 현실은 그 때 부터가 시작이다. 아저씨들은 큰 짐들만 대충 옮겨 놓고 가버린다. 모든 정리는 역시 어머니의 몫이다. 갈 때도 또 힘들었다고 투덜거리면서 웃돈을 또 요구하는 아저씨들도 있었다. 가구가 파손되는 일도 잦았지만 어디다 하소연할 데도 없었다. 또 하나 잊을 수 없는 것은 이사를 치르고 나면 이상하게 물건이 없어지는 일도 잦았다는 것. 엄마는 이삿짐 인부들을 의심하시곤 했는데 중요한 물건들을 미리 챙기지 못한 잘못으로 대충 덮어졌다.
예전의 이사는 말 그대로 여자가 죽을 고생을 하는 이사였다. 이사에 관한 진행들 모두가 어머니가 직접 챙겨야 하는 것들이었다. 이사가 끝난 이후 집안의 디테일한 세팅과 정리는 하염없이 오래 걸렸다. 이사를 한번 하게 되면 앞뒤로 한 달 정도는 모든 것들이 엉망이 되었다. 어머니는 이사 한번 하고 나면 골병이 걸리셨다.
우리는 점점 크고 살림은 계속 불어나고 집도 넓어지면서 어머니는 이제 더 이상 이사를 끔찍해서 못하겠다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셨다. 그러다 우리가 마지막으로 한 이사가 바로 1995년 봄, ‘통인 익스프레스’를 통한 당시로서는 이름조차 낯선 ‘포장이사’였다. 1995년 대치동 우성아파트 65평 집엔 이미 살림살이가 가득했다. 잠실로의 이사를 준비하던 어머니는 누군가의 추천으로 통인 익스프레스를 접하셨던 모양이다. 일반 용달차 이사와는 차원이 다른 비싼 가격을 기꺼이 지불하기로 하고 선택한 통인 익스프레스 포장이사 서비스가 그렇게 대학 2년생인 나에게 나타났다.
그야말로 모든 것이 달랐다. 이사 전날 깔끔한 제복을 입은 아저씨들의 미칠 듯 한 친절한 서비스, 물건 하나하나 다 뽁뽁이로 알아서 싸주는 세심함, 처음에 정해진 그대로만 받는 아저씨들. 우리는 그저 지시만 하면 그만이었다. 우리 식구들은 그동안 하던 습관이 있어서 자꾸 물건에 손을 대려고 했는데 아저씨들은 “놔두세요^^ 저희가 다 하는 거예요^^” 하면서 ‘포장이사라는 것은 이렇게 다른 거다’를 계속 알려주며 짐을 쌌다. 지금 생각해보면 포장이사에 대한 교육을 하면서 서비스를 진행하느라 일이 더 힘들었을 것 같다. 새로 이사한 집의 세팅은 물론 청소까지 싹 해놓고 군말 없이 가는 아저씨들을 보면서 문화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생생하다.
이사의 혁명이나 다름이 없었다. 집은 가장 커졌고, 살림도 가장 많아졌는데 이상하게 힘은 10%도 안 들었던 통인 익스프레스의 포장 이사. 어머니는 계속 “돈이 좋구나~ 좋은 세상이구나~”를 반복하셨고 우리들도 편안해진 이사가 너무 어색해서 “이거 뭐지?”를 연발했다. 조그만 볼펜 하나까지 깔끔하게 정비된 제대로 된 이사 서비스의 경험이 정말 놀라웠다.
통인 익스프레스는 알고 보면 ‘통인’이라는 이름을 가진 여러 계열사들 중 하나이다. 통인 안전보관, 통인 인터내셔날, 통인 가구, 통인 도자박물관 등등 인사동의 골동품 전문 업체 ‘통인 가게’에서 출발한 독특한 이력을 가진 이사 전문업체이다. 인사동에서 골동품을 수집하고 보관하고 전시하며 옮겨 다니다 보니 여기서 파생된 여러 서비스들이 하나씩 계열사가 되었는데 그 중에 통인 익스프레스가 가장 대중들에게 많이 알려졌다.
통인가게는 1924년 서울 인사동에서 인제 김정환이 창업했다. 고미술품과 골동품을 전문적으로 취급하던 이곳은 초창기 외국인들을 상대로 미술품과 도자기 등을 포장·운송·통관·선적시켜 주는 서비스를 시작했다. 1972년 포장사업부를 분사시켜 ‘통인익스프레스’를 설립했다. 통인은 1985년부터 빠르게 성장했다. ‘한국 미술 5000년 전’이 미국 등 해외에서 열릴 때 우리나라의 문화재 이송을 담당한 것이 기폭제가 됐다. 현재 통인가게의 대표인 김완규는 김정환의 막내아들이다. 중학생 때부터 아버지의 어깨 너머로 골동품에 대한 안목을 배웠다고 한다. 현재는 통인 화랑이 인사동의 중심에 자리하고 있다.
김완규는 우리나라에서 알아주는 예술인이라고 봐도 무방하겠다. 다수의 아티스트들을 지원하고 후원해주고 있다. 인사동 통인 갤러리에서 와인을 마시며 전시를 하는 것을 좋아한다. 오페라나 뮤지컬 등을 무료로 개최해 대중들에게 문화예술 기부를 하는 것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매월 한차례씩 오페라 아리아만 골라 부르는 갈라 콘서트를 현장무대로 진행한다. 주한 외교사절 가족이나 기업인들이 단골이다. 통인가게 5층에 마련된 오붓한 공간에서 성악교수들이 마이크도 없이 주옥같은 아리아를 열창하는 모습에 관객들은 너무 행복해한다. 김완규의 집무실이 있는 구산동 통인 인터내셔날 건물은 23년이 된 허름한 외관을 하고 있고 안에도 낡은 골동품들과 예술적인 분위기로 채워져 있다. 여기서 20년 된 국산 지프차를 몰고 다니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가 값비싼 골동품을 나르면서 떠올린 서비스가 바로 포장이사 서비스다. 이사에 포장을 더했다. 분명히 수요가 있을 거라고 봤다. 김완규에게 골동품이 중요하듯이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살림살이가 골동품처럼 소중하다. 그것을 싸고 또 싸서 안전하게 나르는 프리미엄 이사 서비스를 창시한 것이다. 이 안목은 매우 정확했고, 소득이 오르고 살림이 많아지고 가족 수는 줄어들면서 과거의 이사 형태는 점점 더 사라지고 지금은 수많은 업체들이 포장이사 서비스에 뛰어들어 거대한 이사의 트렌드가 되었다.
중고차 시장처럼 체계적이지 못하고 눈감으면 코 베어가는 이사 시장에 큰 변화를 일으킨 위인, 모두가 고통 받고 힘들어하던 이사에 편안함의 혁명을 일으킨 혁명가, 대한민국 주부들을 이사의 구렁텅이에서 건져 준 당대의 기업가 김완규. 그 덕에 우리도 무려 20년 전에 큰 혜택을 봤고 강렬한 기억으로 남아 있는 기업, 통인 익스프레스이다.
현재 통인 익스프레스는 2000년대 이후 포장이사 회사를 넘어 아닌 토털 홈 케어 회사로 거듭나고 있다. 2004년부터 이사 전·후 하우스클리닝, 알레르기 클리닝, 오존살균 클리닝 등 집안 환경을 총체적으로 관리하는 홈 케어 서비스를 시작한 것. 포장이사의 창시업체답게 계속해서 새로운 시장을 개척해 나가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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