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인당 국민소득이 만 달러 시대에 돌입한 우리 나라의 국민은 이제 먹고 사는 기초적인 문제에 연연하기보다는 어떻게 건강한 생활을 유지하며 여가를 즐기고 또한 노후를 안정되게 보낼까 하는 삶의 질에 대한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이에 걸맞게 의료보험, 국민연금, 산재보험, 고용보험, 즉 4대 사회보험체제가 정비됨으로써 한국도 앞으로 서구와 같은 복지국가로 변하여 `요람에서 무덤까지` 국가가 다 책임질 것이라는 기대감에 부풀어 있다.
그러나 현실은 어떠한가. 이 네 가지 사회보험 중 가장 그 파급효과가 큰 국민연금의 기금이 2033년에는 완전히 고갈되어 우리 후손들에게 엄청난 빚을 남기게 된다고 한다. 정부연구기관들의 발표에 따르면, 1988년 이후 적립된 우리 나라 국민연금의 총액은 1997년 3월 말 현재 22조 6천 7억 원인데 이 금액이 2000년에는 43조 원, 2010년에는 189조 원, 2020년에는 352조 원으로 피크를 이룬 뒤 갑자기 썰물처럼 적립금이 빠져나가 2033년에는 국민연금 금고에 한 푼의 돈도 남지 않는다는 끔찍한 시나리오이다.
한국 연금제도의 위기
우리 나라 국민연금제도의 문제는 잘못된 설계와 방만한 운영, 바로 이 두 가지로 귀착된다. 정치적으로 국민연금이 탄생한 탓에 무리하게 끼운 첫 단추가 말썽을 부리고 있는 것이다. 설계가 잘못되었다는 것은 `낮은 보험료, 높은 지급액` 문제를 말한다. 엄격한 경제논리보다는 선심성 정치논리가 개입된 혐의를 지울 수 없다. 우리나라의 국민연금은 동일세대 내에서 소득재분배가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세대 간에 소득재분배가 이루어지고 있다. 자신이 낸 보험료의 현재가치와 자신이 받을 연금급여의 현재가치를 비교해 보면, 저소득층은 자신이 낸 것보다 3~5배를 더 받으며, 고소득층은 1.5~2배를 더 받는다(KDI 추계)
즉 이러한 연금급여를 지급하여 위하여는 지속적이고 안정된 연금기금이 조성되어야 하는데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따라서 부족한 연금급여에 대하여 현세대가 후세대에 부담을 떠 넘기고, 또 후세대는 그 다음 세대에 부담을 계속 미룰 것이므로 궁극적으로는 연금재정의 파산을 피할 수 없다. 또 하나의 큰 문제는 엄청나게 불어나는 국민연금 기금의 방만한 운영이다. 1997년 3월 말까지 적립된 국민연금기금 22조 6천 7백억 원 중 68.1%인 15조 4천억 원이 공공부문, 28.7%인 6조 5천억 원이 금융부문, 그리고 3.2%인 7천 3백여억 원이 복지부문에 투자되어 있다.
즉 시중금리보다 이자율이 낮은 공공부문에 투자가 집중되어 1988년 이후 매년 1,000억 원 이상의 기대수익이 감소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정부는 공적연금기금을 재정투융자 특별회계로 예탁케 하여 활용할 수 있도록 공공기금관리법을 신설하여 돈을 맡긴 국민들의 의사에 관계없이 필요할 때마다 연금기금을 공공부문에 전환시키고 있다.
세계 연금제도의 위기
아직까지도 우리 국민 대부분은 현 연금제도의 심각성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지 못하지만 우리보다 오래 전부터 연금제도를 시행해 온 미국을 비롯한 유럽에서는 이것이 가장 심각한 사회문제 중의 하나로 대두되고 있다. 1994년 11월 이탈리아에서는 150만 명의 노동자들이 일제히 파업에 들어갔는데 그 이유는 바로 정부가 퇴직연령을 높히고 연금을 줄이는 내용의 연금삭감 정책을 발표하였기 때문이었다. 또한 1996년 말 프랑스에서도 공무원, 노조, 트럭운전사들이 잇따라 파업을 벌였는데, 그 이유 역시 정부가 국민연금 가입기간 연장을 발표하였기 때문이다. 늘어나는 사회보장급여의 증가로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재정적자에 각국은 골머리를 썩고 있으며, 프랑스는 공기업의 매각대금으로 이 적자를 충당하였지만 턱없이 모자랐고, 덴마크는 외채를 들여오기도 했다. 이렇듯 연금제도는 잘못 건드리면 한 국가의 정권을 무너뜨릴 수도 있는 시한폭탄과 같은 것이다. 미국 연방하원의 수장 자리를 오랫동안 지켰던 팁 오닐Tip O`Neill 전 연방하원의장도 사회보장문제는 미 정계의 `제3레일third rail`(송전용 레일)로 만약 그것을 건드리기만 하면 그 사람의 정치생명은 끝난다는 경고를 한 적이 있다. 미국의 사회보장제도도 2029년이면 완전히 파산상태에 이를 것이라고 미국의 연금신탁관리위원회Board of Trustees가 보고했다.
성공적인 연금개혁 사례 : 칠레의 연금 민영화
원래 칠레의 사회보장제도는 1924년 설립되어 지구상에서 가장 오래된 제도 중의 하나였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이 제도는 비효율 운영과 만성 재정적자의 상징으로 변하여 1970년대 말 더 이상 존속이 불가능한 상태에 도달했다. 모든 서구의 국가들이 아직 공적연금의 멘탈리티metality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을 때 칠레 정부는 과감한 발상의 전환을 통해 세계에서 처음으로 공적연금의 민영화를 추구하였다. 1981년 5월 1일부터 새로운 개인연금저축구좌Personal Savings Account(PSA) 방식을 도입한 이래 16년이 지난 지금 칠레의 제도는 자타가 인정하는 성공적인 모델로 자리잡아 가고 있다.
이미 중남미권에서 칠레모델을 채택한 나라는 페루(1993), 아르헨티나(1994), 콜롬비아(1994), 멕시코(1997) 등이며 미국, 영국, 뉴질랜드, 중국 등에서도 칠레모델 도입을 연구 중이다. 이 새로운 사적연금제도 도입의 결과로 현재는 연금기금이 250억 달러로 늘어나 GNP의 40%를 차지하게 되었고 저축률 역시 GNP의 27%를 차지하여 아시아 신흥개발국가와 유사한 발전형태를 보여주고 있다. 칠레의 사적 연금제도는 칠레경제 전체의 발전을 이끄는 견인차 역할을 하고 경제 선순환 효과를 촉진시킨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다.
칠레 연금개혁으로부터 배워야 할 교훈
첫째, 모든 근로자는 임금의 10%를 연금기여금으로 의무 적립하되 본인이 선택하는 연금관리회사AFP에 그 기금의 운용을 맡길 수 있다. 둘째, 연금관리회사는 이러한 연금기여금으로 신탁기금mutual fund을 조성해 금융시장 및 기타 부문에 기금을 적절히 투자하여 수익을 극대화시킨다. 셋째, 연금관리회사는 연금관리회사감독원SAFP의 철저한 감독을 받되 정부가 허용해 놓은 포트폴리오 내에서 신중한 투자를 한다. 넷째, 연금가입자의 은퇴연금액은 각 연금관리회사의 투자수익률에 따라 결정되며 본인의 선택에 따라 한 회사에서 다른 회사로 옮길 수 있다.
다섯째, 사용자는 더이상 근로자의 연금기여금을 부분 부담할 필요가 없다. 여섯째, 남자 65세, 여자 60세로 되어 있는 은퇴연령을 자유롭게 조정할 수 있되 10%에 추가하여 매월 일정금액을 적립하면 된다. 일곱째, 근로자가 은퇴할 때 연금급여가 부족하여 충분한 생활이 보장되지 않을 경우 정부는 최저연금급여액을 채우기 위해 모자라는 부분을 보충해준다. 여덟째, 법정 연금기여금 의무비율인 10% 이외에도 근로자는 현재 가입되어 있는 AFP에 자율적으로 추가 저축을 할 수 있으며 이것은 면세혜택을 받는다.
사적연금제도의 도입을 반대하는 논리
사적연금제도를 배격하는 공적연금 옹호주의자의 일반적인 반박논리는 사적연금제도가 생계가 어려운 저소득층을 보호하지 못한다는 것, 즉 사회보장제도의 근본정신인 `소득재분배` 기능을 수행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기우에 지나지 않는다. 미국재정학의 대두인 하바드 대학교 마틴 펠트스타인Martin Feldstein 교수의 말을 인용하자면 사적연금제도의 매력은 중저소득 근로자들이 은퇴 후뿐만 아니라 은퇴 전에도 자신들의 소득을 증가시킬 수 있다는 점으로, 보다 높은 실질임금과 보다 낮은 의무저축비율로 (미국의 경우) 일반 근로자의 가처분 소득이 30% 이상 증가한다고 밝히고 있다. 또한 정부는 개인저축구좌에 축적된 금액이 만족스러운 노후생활을 유지하기에 너무 낮은 수준인 구좌에 한해 보조금을 충당하여 최저 연금을 보장해주면 된다는 논리이다. 칠레에서는 이미 이 원칙을 현실에 적용하고 있다.
고양이 목에 방울달기
사실 연금제도는 정치적으로 인기가 없는 분야이며 항상 뜨거운 감자이다. 따라서 누구도 과감히 이 문제를 제기하고 해결할 엄두를 못낸다. 칠레는 개혁 당시 더 이상 과거의 공적연금제도를 지탱할 수 없다는 국민적 공감대가 형성이 되어 있었으므로 그나마 과감한 시도가 가능하였다. 칠레는 공적연금제도를 사적연금제도로 바꾸는데 56년이 소요되었다. 반면 한국은 국민연금제도에 대한 경험이 10년밖에 되지 않는, 복지에 관한한 아직 초보국 수준이다.
현재 우리 나라 정부, 학계, 언론 등에서 국민연금제도에 대한 심도있는 연구 및 토의가 진행되고 있는 이 시점에서 우리가 택할 수 있는 새로운 대안의 하나로 칠레의 사적연금제도를 소개하고 싶다. 공적연금제도에 대한 개혁을 시도하는 것은 바로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다는 것과 같다. 모두 필요를 느끼지만 아무도 나서지 않는 문제, 그러나 언젠가는 누군가 풀어야 할 우리 모두의 문제임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이 글은 칠레의 연금개혁에 관련된 세 가지 이야기를 담고 있다. 첫번째는 칠레 연금개혁의 아버지였던 호세 삐녜라Jose Pinera 박사가 미국 연방상원 소분과위원회에서 1997년 6월 26일 증언한 내용이고, 두 번째는 세계은행의 연금전문가인 로버트 팔라시오스Robert Palacios가 1997년 1월 22일 미국의 USIA Economics지와 인터뷰한 내용이며, 마지막 세 번째는 미국 델라웨어Delaware의 전 주지사인 피트 두 폰트Pete du Pont가 1996년 5월 20일 미국 연방상원 소분과위원회에서 증언한 내용이다. 이 세 가지 모두 미국 및 세계 연금제도의 문제를 지적하며 그 해결방안으로 칠레모델을 소개하고 있다. 따라서 아직 우리 나라에 연금의 민영화에 대한 구체적인 연구가 부족한 현 상황에서 이 자료는 타산지석의 효과가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