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공정거래정책의 가장 큰 특징은 시장지배력과는 무관한 재벌의 일반집중을 문제시한다는 것이다. 이 같은 경제력집중 억제정책의 도입은 우리나라의 대기업집단의 문제가 다른 나라와는 다른 특수한 상황에 있다는 문제의식을 전제로 한다. 이와 같은 도입배경에서도 알 수 있듯이 우리나라 공정거래정책은 대중적이고 현상적인 관심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대중적이라는 말은 경제력집중 억제정책을 도입할 때에 재벌에 대한 국민여론이나 정서가 그 중요한 판단기준이 되었음을 지칭한다. 또한 현상적이라는 말은 심도 있고 전문적인 분석을 전제로 한 것이 아니고 피상적으로 나타난 현상과 이에 대한 상식적인 논거가 중심이 되었음을 의미한다.
경쟁참여자와 일반대중은 경쟁의 과정과 결과에 대한 현상적 관심을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시장의 룰을 규정하고 집행하는 공정거래당국은 정책의 정당성과 유효성에 보다 큰 역점을 두어야 한다. 이와는 반대로 현상적 관심의 대상인 경쟁의 과정과 결과가 강조될 때에 경쟁 자체는 손상을 입는 경우가 많이 나타난다. 특히 과학적인 분석과 객관적인 근거에 기초하지 않은 자의적인 공정거래정책의 입안과 집행은 법과 공정거래당국의 규제권위를 저하시킨다.
외국의 경쟁당국은 소비자의 선택을 보호하는 경쟁정책에 집중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 공정거래당국은 경쟁촉진과는 관계없는 기업내 주주간의 관계를 규정짓는 내용, 그리고 채무보증이나 금융기관의 의결권 행사와 같이 금융관련법에서 규정되어야 할 내용을 규제하고 있다.
2. 한국형 공정거래정책인 경제력집중 억제정책의 문제점
(1) 대기업에 대한 차별적 규제의 시발점
경제력집중 억제정책은 대기업에 대한 차별적 규제가 본격화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1986년 경제력집중 억제정책이 시행된 이래로 각종 법률에서 대기업에 대한 규제가 봇물처럼 쏟아지기 시작했다. 경제력집중 억제정책이 도입된 이후 뚜렷한 근거없이 공정거래법을 인용하여 대기업에 대한 규제가 여기저기서 나타났다. 세제에서의 차별규제를 비롯하여 특정 산업에 대한 진입규제와 중소기업 고유업종 지정 그리고 산업자본의 금융지배 방지 등에서 대기업을 차별적으로 규제하게 된 중요한 시발점이 되었다.
(2) 경쟁정책과의 모순
경제력집중 억제정책은 공정거래위원회의 본질적인 업무인 경쟁정책을 오히려 위축시킨다. 현재 공정거래위원회는 인력에 비하여 업무량이 폭주하고 있다. 한정된 인력이 경쟁촉진 업무에만 전념해도 충분치 못한 형편에서 그 효과가 의문시되고 외국에서도 시행되지 않는 경제력집중 억제정책에 상당한 인력과 자원이 동원되고 있다. 2003년말까지 공정거래법 개정항목 79건 중 대기업관련 규정이 31건으로서 총 개정항목의 40%에 가깝다. 이는 그동안 공정위의 입법노력 중 상당부분이 경제력집중 억제정책에 할애되었음을 말해준다. 대표적인 경쟁촉진업무라고 할 수 있는 기업결합 제한위반은 2004년까지 755개로서 경제력집중 억제 위반의 시정실적 481개보다 훨씬 많이 나타나지만 신고위반과 같이 경미한 시정실적을 제외할 경우 사실상 기업결합 제한에 대한 시정실적은 20여년 동안 겨우 28건에 불과하다. 또한 이에 대한 조치유형별 시정실적에서도 기업결합 제한 위반 755건 중 대부분인 726건이 경고이고 고발과 시정명령을 내린 경우는 겨우 22건에 지나지 않는다. 반면에 경제력집중 억제 위반의 경우 481건 중 경고는 339건, 고발·시정명령·시정권고는 142건에 이르고 있다. 이같은 사실은 공정위가 선진국에서 행하고 있는 전통적인 기업결합규제는 등한시하고 경제력집중 억제정책에 집중하였음을 보여준다.
경제력집중 억제정책은 대기업간의 경쟁을 위축시킨다. 경제력집중 억제정책에서 동원하고 있는 출자규제, 의결권규제 및 채무보증제한은 대기업이 새로운 분야에 진출하는 유력한 수단을 억제하기 마련이다. 현실적으로 대기업과 경쟁할 수 있는 것은 다른 대기업일 수밖에 없는데 이처럼 대기업이 새로운 분야에 진출하는 유력한 수단을 제약하니 경제력집중 억제정책은 개별 상품시장에서 경쟁의 정도를 약화시키는 셈이다. 대기업집단 중 출자규제 및 채무보증제한의 대상이 되는 자산규모 2조 또는 6조에 근접하는 대기업집단은 자산규모를 증가시켜 경제력집중 억제정책의 대상이 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전경련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2004년 4월 1일 기준으로 자산규모 4조원대의 기업집단은 10개인데 그 중 7개가 4조원대 후반에 집중되어 있었다. 이는 당시 출자총액제한의 규제기준이 자산규모 5조원부터였기 때문에 이에 근접하는 대규모 기업집단이 스스로의 성장을 자제하였다는 것을 말해 준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상품시장에서의 경쟁을 약화시키는 전형적인 경제력집중 억제정책의 수단이 출자총액제한이다. 즉, 신규사업에 참여하기 위하여 다른 기업을 인수하는 것은 출자총액제한에 위배되므로 대기업이 참여하고자 하는 시장에서의 경쟁의 정도를 약화시키는 것이다. 특히 최근의 글로벌 경쟁환경은 IT, 유전공학사업, 환경사업 등 다양화되고 급변하는 사업환경 속에서 기업들의 순발력 있고 기민한 투자가 요구되는 시점이다. 또한 국제적인 경쟁은 외국의 초대형 기업과 동일한 시장에서 선두를 다투도록 요구하고 있다. 이러한 시점에서 경제력집중 억제정책을 통하여 우리 기업의 투자를 제약하고 우리 기업의 투자를 제약하고 경쟁을 둔화시키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생각이라고 할 수 있다.
(3) 경영권방어에서 국내기업을 역차별
경제력집중 억제정책은 우리 대기업을 역차별하는 규제이다. 우리나라의 대기업에게만 적용되는 규제이기 때문에 국제시장에서 또한 국내의 자본시장 및 금융시장에서 우리 대기업은 심한 역차별을 받고 있다. 경제력집중 억제정책의 주요 수단인 상호출자금지, 출자총액제한 및 금융·보험사 의결권 제한으로 인하여 국내 대기업은 불필요하게 M&A의 위협에 대비하여야 한다. 이 때문에 기업의 자원이 실물투자에 활용되지 못하고 경영권을 방어하고 외국인 주주의 위협으로부터 지키기 위한 데에 쓰이는 등 그 사용이 왜곡되고 있다.
출자총액제한은 계열사에 대한 출자를 제한하므로 계열사에 대한 주식의 인수를 통하여 경영권이 위협받을 때 이를 방어할 수단을 앗아가 버리는 셈이다. 상호출자금지도 경영권을 방어할 수단을 제약한다. 상법에 의하면 10% 이내의 상호출자는 의결권을 행사할 수 있다. 따라서 상법의 규제가 적용된다면 10% 이내의 계열사간 상호출자는 유사시 경영권 방어에 도움을 줄 수 있다. 그러나 공정거래법의 상호출자금지는 원천적으로 상호출자를 금지하고 이에 따른 의결권행사를 무효화하기 때문에 경영권 방어를 위하여 활용할 수 없다. 동일한 문제점이 금융·보험사의 의결권제한에서도 나타난다. 대기업의 금융 및 보험계열사가 갖고 있는 지분에 대한 의결권을 행사할 수 없으므로 유사시 경영권 방어에 활용할 수 없게 된다.
이와 같은 문제점은 최근 외국인에 의한 국내주식투자가 많아지고 실제로 SK의 소버린사태 등에서 나타났듯이 경영권 위협이 현실화되고 있는 시점에서 국내 대기업에 대한 심각한 역차별이라고 할 수 있다.
3. 결 언: 공정거래정책은 경쟁정책에 집중해야
이와 같은 공정거래정책의 특징과 문제점을 감안할 때 향후 공정거래정책은 순수한 의미에서의 상품시장에서의 경쟁촉진에 맞추어져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지금까지 공정거래정책을 통해서 시행되어 왔던 여러 가지 기업에 대한 규제와 제한이 철폐되거나 다른 시장규율 메커니즘으로 이관되어야 한다. 반면에 경쟁정책은 보다 강화되고 정밀성을 갖추어야 할 것으로 판단된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볼 때 공정거래정책의 개선방향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1) 경제력집중 억제정책의 폐지
현 공정거래정책은 경쟁정책을 보완한다는 명분 하에 대기업집단에 대한 규제를 시행하고 있다. 또한 이를 통하여 대기업의 지배구조와 재무구조를 개선하려 하고 있다. 그러나 기업의 지배구조는 공정거래정책의 대상이 아니다. 이는 개별 경제주체가 선택하여야 할 사항이다. 소액주주 등 여러 이해당사자들과 관련된 사항은 상법이나 증권거래법에서 관련 사항을 집행하고 필요하다면 이를 보완하고 강화하면 된다. 기업의 재무구조와 채무에 관련된 사항도 금융관련법이나 규정 그리고 채권자와 채무자간의 선택의 문제로 남겨두어야 한다. 공정거래법에서 규정하고 있는 상호출자의 금지, 출자총액의 제한, 계열사에 대한 채무보증의 제한, 금융·보험사에 대한 의결권 제한 그리고 지주회사규제도 모두 삭제하여야 할 것이다. 이와 함께 기업집단 지정제도 자체를 폐지하여 공정거래정책을 순수한 경쟁정책으로 가다듬어야 할 것이다.
(2) 산업정책 및 중소기업정책적 배려의 삭제
현 공정거래법은 기업결합과 부당공동행위에 대한 규정에서 산업정책적이고 중소기업정책적인 배려를 여러 곳에서 보이고 있다. 일례로 공정거래법 제7조(기업결합의 제한)에서는 매출액 또는 자산규모가 2조원 이상인 대규모회사가 중소기업의 시장점유율이 3분의 2 이상인 거래분야에서 기업결합을 통하여 진입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다. 또한 제19조(부당한 공동행위의 금지)에서는 산업합리화, 불황의 극복, 산업구조의 조정, 중소기업의 경쟁력 향상 등의 경우에 해당되면 담합금지의 예외사항으로 취급하고 있다. 결국 경제개발기의 산업정책과 중소기업정책적 배려를 엄정한 경쟁촉진보다 앞세움으로써 경쟁정책의 순수성을 떨어뜨리고 있는 것이다.
특히 글로벌 경쟁시대에서 산업정책적이고 중소기업정책적인 지원은 외국의 경쟁력 있는 기업들과 경쟁할 때 큰 의미를 갖기 어렵다. 정부의 정책적 지원과 보호를 통하여 성장한 기업이 치열한 글로벌 경쟁환경에서는 도태되어 오히려 국내산업의 경쟁기반을 약화시키는 경우를 쉽게 볼 수 있다. 기업의 창의력과 자율적인 효율성을 증진시키기 위해서는 시장질서에 부합되지 않는 이와 같은 정책적 배려는 공정거래법에서 삭제하여야 할 것이다.
(3) 경쟁정책의 강화 및 과학화
지금까지 경제력집중 억제정책에 대한 강조로 경쟁정책을 합리적으로 개선하고 이를 발전시키는 공정위의 노력은 다소 미흡하였다. 이제 공정위는 경쟁정책을 강화하고 이를 세부적으로 과학화하는 데에 역점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우선 개별시장에서 나타나는 수평적 시장지배력 등과 같은 독과점적 시장구조는 강력한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개선하여야 한다. 그 한 예로 과거 스탠더드 오일을 분할하였던 미국 반독점법의 강력한 구조개선 방안을 도입하여 개별시장에서의 독과점 현상이 지나치게 커서 소비자의 후생을 저해시킬 경우에 대비하여 기업분할 청구권제도를 채택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담합과 같은 공동행위에 대한 감시와 제재도 강화하여야 할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사업자단체와 전문가 집단 및 이익단체를 통한 제도적인 진입규제의 설정, 가격 및 공급조건에 대한 담합 등도 원천적으로 봉쇄하여야 한다. 우리의 시장환경에서 자주 나타나며 근절되지 않고 있는 건설입찰의 담합 등과 같은 분야는 별도의 연구와 조사를 거쳐서 규제 및 조사방법, 적절한 감시 및 제재방안 등을 검토하여야 할 것이다. 한편, 현 공정거래법 제19조(부당한 공동행위의 금지) 제5항은 2 이상의 사업자가 경쟁을 실질적으로 제한하는 행위를 하고 있을 때 명시적인 합의가 없는 경우에도 부당한 공동행위를 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는 우리나라 공정거래법에만 발견될 수 있는 부당공동행위 추정조항으로서 위헌적 성격이 크다. 많은 전문가들이 이 조항은 공정위의 구체적이고 과학적인 조사와 집행노력을 유도하기 위하여 폐지를 주장하는 만큼 반드시 삭제되어야 할 조항이라고 판단된다.
불공정거래행위 및 재판매가격유지행위에 대해서도 보다 과학적인 접근이 요구된다. 일례로 공정거래법 제3조의2(시장지배적지위의 남용금지)의 제1항에 규정되어 있는 가격남용 및 출고조절행위 금지는 시장경제의 중요한 경쟁행위 자체를 제약할 수 있으며 지금까지 집행실적이 거의 없는 형식적이고 명목적인 조항으로서 구조적 수단과 경쟁제한행위에 대한 규제로 충분히 경쟁환경이 보호될 수 있는 만큼 삭제되어야 할 것이다. 또한 경쟁과정에 대하여 지나치게 개입하고 있는 부당지원행위에 대한 규제도 삭제되어야 한다. 한편 사업자간의 관계를 중심으로 설정되어 있는 불공정거래행위에 대한 기준은 소비자를 포함한 전체적인 시장에서의 효율성을 감안한 기준으로 바뀌어야 한다. 현 공정거래법에서 ‘공동의 거래거절’, ‘계열회사를 위한 차별’, ‘부당염매’ 등의 불공정거래행위와 재판매가격유지행위는 당연위법으로 규정하여 일단 원칙적으로 공정경쟁에 위배되는 것으로 간주하며 예외적으로 정당한 사유가 있을 시에만 그 위법성을 검토하고 있다. 그러나 최근 외국의 판례와 사업관행에 대한 연구를 살펴보면 불공정거래행위로 분류된 여러 유형의 거래행위와 재판매가격유지 등이 소비자에 대한 서비스 질을 높이려는 제조업자와 판매업자의 판매촉진 노력과 투자를 보호하며 이에 대한 재산권을 설정하려는 사업관행으로서 인식되고 있다. 따라서 우리 공정거래법에서 이러한 불공정거래행위에 대해서는 합리의 원칙을 적용하여 시장에서의 경쟁촉진을 위한 노력을 보호하여야 할 것으로 판단된다.
조성봉 (한국경제연구원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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