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우리나라의 학교교육 현장에서는 심각한 ‘가치파괴’가 일어나고 있다. 이러한 가치파괴는 전적으로 ‘교육의 국가독점’ 구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교육은 교과서, 교육과정, 교육시설, 학생선발 등 모든 부문에서 국가가 개입·간섭·규제하고 있다. 세계는 지금 과거 어느 때보다도 개성과 창의가 중요시되는 지식정보화가 고도화되는 추세다.
그러나 우리 교육은 아직도 과거의 산업시대의 교육논리에 사로잡혀있다. 교육수요는 21세기에 맞추어져 있는데 공급은 20세기에 맞추어져 있는 ‘시대지체(時代遲滯),’ 이것이 우리 교육문제의 근원이다. 학교의 교육공급이 학생·학부모의 수요에 따라가지 못하다보니 모두 ‘스스로의 교육개혁’에 나서고 있다. 이 과정에서 가정경제가 압박받고 교육재정이 낭비되고 있다.
국가독점 교육 구조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바로 고등학교 평준화정책이다. 교육은 주거와 아울러 우리 가계에서 가장 많은 자원이 투입되는 부문이다. 따라서 교육 부문의 자원배분은 국가 전체의 자원배분 효율성 여부와 직결된다. 자원배분이라는 측면에서 평가할 때, 평준화로 상징되는 교육자원의 배분구조는 사회주의 체제의 그것과 다를 바 없다. 지금 우리 교육에서는 과거 동독의 자동차 산업이, 소련의 농업 부문 등등이 경험한 것과 같은 심각한 가치파괴가 진행되고 있다.
2. 평준화는 평준화에 기여했는가?
1977년 이후 30년간 시행한 고교평준화는 그 명분과는 달리 비평준화를 심화시켜왔다. 최근 지역 간·학교 간·학교 내 모든 범위에 있어서 비평준화가 심화되고 있다는 다양한 실증자료들이 발표되고 있다. 학교교육의 부실과 사교육의 증가로 인해 학력격차의 문제가 교육의 형평성 문제로까지 급속히 확대되고 있다. 유독 교육부만이 지역 간, 학교 간, 학교 내 격차를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을 뿐이지 다양한 연구결과들은 학력격차가 현재 전국적으로 보편화된 현상이며 나아가 확대되고 있음을 증명하고 있다.
PISA 2000년도의 읽기성적을 전국의 고등학교별 평균점수(한국학생 전체 평균 525점)로 살펴보았을 때 전체 150개 학교 중에서 최상위권 학교와 최하위권 학교간의 평균점수차가 무려 200점 이상 나타나며, 이를 다시 인문계 학교만을 비교해 볼 경우에도 150점의 격차가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이 조사만 보더라도 전국의 고등학교별로 학력격차가 얼마나 큰 지 알 수 있다.
2001년도 치러진 전국 규모의 ‘국가수준학업성취도평가’ 결과에 따르면 전체 175개 고등학교 중 최상위 10%에 속하는 학생이 한 명도 없는 학교가 전체 대상학교 중에서 무려 39.4%에 달했으며, 10%미만인 학교는 27.4%, 10%이상인 학교가 16.6%로 나타났다. 특히 전체 학생의 절반이상이 상위 10%에 속하는 학교가 6.3%나 되었다.
최근 고려대학교가 보유하고 있는 입시자료를 활용한 분석에서도 격차를 재확인할 수 있다. 전국 1,847개 고등학교 수능성적을 재학생 중 수능상위 10%에 포함되는 비율로 비교하면 이들 학교 간에 학력격차가 얼마인지 가늠할 수 있다. 이 분석에 의하면 전체 고등학교 중에서 수능성적 상위 10%에 한 명도 포함되지 않은 학교가 823개나 되며, 재학생 전원이 수능성적 상위 10%이내에 들어 있는 학교가 3개교인 것으로 조사되었다.
지역 간 학력격차는 더욱 심화되는 양상이다. 최근 한 연구소가 전국 136개 고교의 수능성적을 지역별, 평준화 여부별로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서울 강남지역의 평균점수는 236.5점으로 강북과 비교해서 22.1점이 높으며, 비평준화고교인 경기도와 강원도의 평균은 32.2점의 학력격차가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3. 평준화와 교육시장의 복수, 부익부-빈익빈의 악순환
시장을 통제하면 암시장이 성행하듯, 공교육이 통제되자 사교육이 비정상적으로 확대되었다. 평준화라는 공교육시장에 대한 규제가 본격적으로 ‘시장의 복수’를 불러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사교육이 학업성취의 주 수단이 되다보니 사교육비의 다과에 따라 학생들의 학업성취도가 결정된다. 교육은 이제 부익부-빈익빈 구조의 핵심이다. 평준화는 평등한 사회를 만들겠다는 본래의 목적을 이루기는커녕 오히려 사회적 불평등을 심화시키는 요인이 된 것이다.
2005년 서울대사회과학연구소는 25년간의 서울대 사회과학대 입학생들의 자료를 기초로 ‘누가 서울대에 오는가’라는 보고서를 발표했다. 이 보고서는 “고소득직군 아버지 자녀 입학률은 기타 그룹의 입학률보다 20배 높은 수준을 보이고 있으며, 최근에는 그 격차가 확대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고 결론내리고 있다.
고려대학교 교육학과 김경근 교수는 ‘부모의 월 소득과 자녀의 수능성적 차이’라는 논문에서 2005년도 대입 수능에 응시했던 일반계 고교생 1,537명의 수능 성적 표준점수 합계와 부모의 소득을 비교했다. 이에 따르면 월 소득 5백만 원 이상인 부모를 둔 학생의 평균 점수는 316.86점을 기록했고 월 소득이 3백만∼5백만 원인 부모의 학생은 305.82점, 300만원 미만은 291.12점으로 추정되었다. 이러한 결과에 대해 김경근 교수는 “어떤 정책수단을 동원한다고 해서 메워질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격차가 크다”고 우려했다.
고교 평준화 정책은 학생들을 ’입시지옥’에서 해방시키고 ’망국적인 과외병’을 치유하자는 목적 하에 도입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슬로건이 무색하게도 오늘날 학생들은 과거보다 더욱 격화된 입시경쟁에 시달리고 있으며, 학부모들은 사교육비 앙등으로 고생하고 있다. 이제 학교는 ‘졸업장을 받는 수단’ 이상의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 학교교육의 보완재여야 할 사교육이 학력신장의 주된 수단이 되는 등 우리 교육은 소위 ‘왝 더 독(wag the dog: 꼬리가 몸통을 흔드는 현상)’의 부작용으로 신음하고 있다.
학원·과외·유학 등 사교육 시장은 전형적인 ‘머니게임(money game)'의 시장이다. 이에 따라 부모의 경제력이 자녀의 학력차로 고스란히 전이된다. 지식정보사회가 고도화되면서 지식은 결국 경제력을 결정한다. 이러한 구조 때문에 교육이 부익부-빈익빈의 사회계층고착화의 주된 연결고리가 되고 있다. 우리 사회에서는 지금 평준화의 부작용으로 결코 ’정의롭지도 효율적이지도 못한‘ 부의 대물림이 구조화되고 있는 것이다.
4. 정부기능은 시장실패의 영역에서 효율적, 교육 분야도 예외가 아니다
학교교육의 붕괴는 교육재정·가계지출의 낭비를 촉진하는 가치파괴를 불러일으켰다. 거의 모든 학생에게 학교수업 시간은 그만큼의 시간 낭비를 강요하고 있다. 학원·과외 열풍, 사교육비 앙등, 교육대탈출(education exodus)이 심화되는 것은 바로 이러한 학교교육 현장에서의 가치파괴를 반영하는 것이다.
- 학습지도 비용증가, 곤란성은 배증
평준화는 지능이나 수학능력에 따른 개인차가 큰 학생들이 함께 공부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에 따라 일선교실에서는 중위권 학생의 수준에 맞추어 수업을 진행한다. 우수학생들에게는 교사의 수업이 시시하고 열등학생들에게는 교사의 수업이 너무 어렵다. 조금 과장하면 2/3의 학생들은 교사의 수업이 의미가 없다. 일선교사의 학습지도에 따른 곤란성은 배증하였지만 그 성과는 2/3로 떨어지는 것이다. 이처럼 평준화는 수준 차가 심한 학생집단 내에서 획일적인 학습지도 실시로 우수학생들은 학습의욕을 상실하고, 열등학생들은 더욱 뒤떨어지는 결과를 초래했다.
- 경쟁유인 제거, 정체를 고착화
평준화제도는 학교현장에서 개선과 혁신을 만들어내는 경쟁유인을 제거함으로써 정체를 고착화하는 잘못된 제도다. 모든 학교는 잘하던 못하던 관계없이 국가가 정해준 방식에 따라 학생들을 배정받는다. 모든 학교는 교육성과에 상관없이 동일한 정부지원을 받는다. 한마디로 ‘파산의 위험’이 없는 것이다. 성과급을 비롯해서 교육정책당국이 다양한 경쟁촉진 정책을 내놓지만 평준화라는 상위구조가 변경되지 않는다면 결코 그 효력을 발휘할 수 없다.
- 개성·창의성 계발을 위한 교육 저해
교육은 학생들이 지닌 다양한 잠재력을 계발하여 자기 발전은 물론 사회가 필요로 하는 여러 분야의 인재를 길러 내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그러나 평준화 정책은 특성화된 학교의 설립을 원천적으로 금지하고 획일적인 교육을 강요함으로써 학생들의 다양한 잠재력을 계발하는데 장애가 되고 있다. 세계적인 경쟁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서 교육이 다양성·수월성 추구라는 질적 개념으로 전환하는 것은 시대적인 요청이다. 최근 설립 신청 러시를 이루고 있는 미니고교, 즉 자동차고, 디자인고, 영상미디어고, 대중음악고, 패션코디네이터고 등은 다양성·수월성·창의성에 기초한 교육에 대한 사회적 수요가 얼마나 큰지를 보여준다.
교육은 공공재는 아니나 ‘공공성이 큰 사적재화’다. 경제학에서는 이러한 특성을 가진 재화를 ‘가치재(merit good)’라고 칭한다. 가치재가 가진 공공성과 사적 성격이라는 양면성 때문에 가치재의 배분에 있어서 ‘정부실패(government failure)’와 ‘시장실패(market failure)’가 동시에 발생할 가능성이 높다. 이 때문에 정부기능과 시장기능 간에 적절한 조화가 무엇보다 요구된다.
평준화에 따른 부작용은 가치재 배분 실패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평준화는 사적재화로서의 교육의 특성이 무시하고 교육의 공익성이 지나치게 강조되는 방식이다. 이에 따라 교육투자의 효율성(efficiency)이 심각하게 저하되고 있다. 공익성에 대한 강조는 학교를 ‘관청화’시켰고 교사를 ‘관료화’시켰다. 공익성 강조가 오히려 교육의 공익성을 해치는 ‘부메랑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정부기능이 시장실패의 영역에서 효율적이라는 진리는 교육 분야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다.
5. 제안: 자유와 자율 그리고 자기책임
평준화를 폐지 또는 반대하는 사람들에 대해 평준화 옹호론자는 “그렇다면 고등학교 입시를 부활하자는 말인가?”라고 반문한다. 고교평준화의 폐지가 반드시 과거의 고교입시로 회귀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평준화 폐지를 입시부활로 해석하는 것부터 어쩌면 구시대적 사고의 결과다. 급속하게 변화하는 국제경쟁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질적 변화로서의 수월성을 추구하고 그러면서도 다양한 지식정보사회의 추세에 부응하기 위한 학생들의 소질 및 적성을 살리기 위해서 우리 사회는 다양한 가치를 지닌 독특하고 개성 있는 학교를 필요로 한다.
사회가 급속도로 복합·다기화 됨에 따라 학생·학부모의 교육에 대한 수요도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다양화되고 있다. 현재와 같은 동일한 교과서, 교육과정, 획일적인 교육설비로는 이러한 다양한 교육수요를 결코 만족시킬 수 없다. 학교는 교과서 채택, 교육과정, 교육방식, 교육시설 등의 면에서 광범위한 자유와 자율을 누릴 수 있어야 한다. 학생선발의 자유는 기본 중에 기본이다. 학생·학부모 역시 학교를 선택할 자유가 있어야 한다. 현재의 평준화 정책 하에서 이러한 자유는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
우리 교육이 ‘21세기 지식정보사회를 이끌어 갈 인적자원 배출’이라는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서는 교육시스템의 전반적인 개혁이 필요하다. 학급·학교 단위에서 다양하고 창의적인 ‘미시적 교육실험’이 행해지고 성공한 실험이 교육시스템 전체로 확산·파급될 수 있어야 한다. 무엇이 성공한 실험인지는 철저히 학생·학부모의 평가에 의해 판단되어야 한다. 성공한 실험이 보상을 받고, 실패한 실험은 대가를 치르는 자유와 자율의 경쟁, 그에 따른 자기책임의 원칙이 우리 교육을 오늘날의 실패에서 구원할 수 있다.
학교도 학생도 좋은 것을 추구해야 한다. 단정적으로 말하면, 좋은 것을 추구하지 못하도록 하는 모든 정책이나 규제는 일반적으로 옳지 않은 것이다. 평준화는 이러한 규제의 대표적인 예다. 좋은 것은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경쟁은 필연적이다. 경쟁은 좋은 것을 가장 간절히 원하는 사람과 또 그것을 가장 효율적으로 공급하는 사람에게 기회를 준다. 따라서 제대로 된 경쟁은 창조적이며 낭비를 막는다. 오늘날 우리 교육에서 일어나고 있는 교육시장의 복수를 극복하기 위해서 우리 교육시스템에 자유와 자율, 그리고 자기책임의 경쟁구조의 도입이 무엇보다 시급하다.
조전혁 (인천대학교 경제학 교수/자유주의교육운동연합 상임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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